무공 쓰는 외과 의사 57화
제10장 수술 체질(2)
해나와 어르신의 배웅을 받은 뒤.
준후는 후련한 마음으로 주택가를 벗어나고 있었다.
다행히도 지애와는 이야기가 잘 됐다.
지애가 속한 소속사가 배우뿐만 아니라 아이돌 및 엔터테이너까지 육성했기 때문이다.
-비공개 오디션 한 번 알아보고 연락줄게.
-그럼 오디션을 볼 수는 있는 거지?
-나를 뭘로 보고. 친구를 위해서 그 정도 힘은 써줄 수 있어. 단 오디션에 합격하는 건 그 아이의 몫이겠지만.
-고맙다, 지애야. 우리 병원에 검진받으러 오면 잘해줄게.
-됐거든요? 나 아직 검진 같은 거 받을 나이 아니거든요?
어쨌거나 오디션만 볼 수 있다면 해나가 합격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라고 준후는 확신하고 있었다.
음공 능력자 곽서우와 해나는 닮은 점이 많았다.
발성은 물론이요 음성까지.
내공으로 청각을 예민하게 가다듬은 후 노래를 듣지 않았던가.
판단이 빗나갈 확률은 적었다.
해나가 오디션에 합격하기를.
본인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고 인정받기를 준후는 진심으로 바랐다.
희망이 고문처럼 변한 시대라고는 해도 희망은 여전히 필요했다.
희망은 등대이면서 나침반이었다.
‘아직 널널하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4시였다.
오늘은 쉬는 날이었고 내일 오전 5시까지만 병원에 복귀하면 됐다.
그전까지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면 좋을까.
준후는 고민하다가 가장 가까운 역에 위치한 서점으로 이동했다.
-내가 준후 씨, 얼굴하고 목소리를 가졌으면 의사 안 해. 가진 재능이 너무 아깝잖아.
-연예계에 관심이 없으면 틈틈이 뉴튜브라도 해 봐요. 나중에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까.
병원 홍보 촬영을 진행했던 감독의 말에 따라서.
준후는 뉴튜브를 시도해 볼 작정이었다.
구독자가 늘고 조회수가 늘고.
나중에 수익이 생기면 그 수익금으로 해나처럼 형편이 힘든 아이들을 도울 수 있을 테니까.
서점으로 향하는 동안.
준후는 뉴튜브에 접속해서 다른 의사들의 동영상을 확인했다.
인턴과 레지던트는 주로 브이로그를 올렸다.
브이로그란 일상을 담은 동영상으로 일하는 모습, 식사하는 모습, 출 퇴근하는 평범한 모습을 다루고 있었다.
자극적인 맛은 없었지만
시시콜콜 수다를 떠는 편안함과 친근함이 매력이었다.
전문의 같은 경우 자신들의 지식을 전문적으로 풀어주는 영상을 업로드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의사들이 운영하는 채널들은 대부분 구독자가 적고 조회수도 낮은 편이었다.
음악, 동물, 먹방, 게임 같은 컨텐츠에 비하면 모든 면이 뒤떨어졌다.
선방하고 있는 채널이라면 닥터 프렌들리.
단 한 채널뿐이었다.
너무 겁먹을 필요 없어.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자.
기운을 북돋은 준후는 서점에서 뉴튜브 관련 서적을 구입해서 모처럼 집으로 돌아갔다.
부모님과 정겹게 대화를 하고.
방으로 돌아가 뉴튜브 관련 서적을 독파한 뒤 뉴튜브 채널도 만들었다.
채널명은 닥터 서튜브.
준후는 시험 삼아 휴대폰으로 촬영도 해보았다.
인턴 근무의 특성상.
제대로 된 환경에서 카메라를 갖춘 채 영상을 촬영하는 일은 불가능할 테니까.
3분짜리 영상을 컴퓨터에 옮기고 준후는 짤막하게 편집에도 손을 대보았다.
자막을 다는 매우 기초적인 편집이었지만 나름 즐거웠다.
신선한 자극이 되기도 했다.
견물생심이라고 채널을 만들고 동영상까지 촬영하고 나니 뉴튜브가 흥했으면 하는 욕심이 생기는 준후였다.
* * *
다음 날 오전.
응급의학과에 출근한 준후는 컨퍼런스가 끝난 후 지도 교수를 찾았다.
휴식 시간에.
또는 퇴근 후에 뉴튜브 촬영을 해도 되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요즘 다들 뉴튜브라면 사족을 못 쓰구나. 다른 과 인턴도 뉴튜브를 찍는다고 난리던데.”
교수의 대답에 준후는 적잖이 놀랐다.
자신 말고도 뉴튜브를 운영하는 인턴이 있구나 싶었고.
또 그 인턴이 누구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업무에 지장이 안 간다면 촬영해도 좋단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악담처럼 들릴지 모르겠는데 그리 오래는 못할 거야.”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미 레드 오션이 된 뉴튜브에서 밋밋한 의학 동영상이 무슨 인기가 있겠니.”
“…….”
“영상도 끽해야 20개 정도 올리고 그만둘 확률이 높지. 다들 그러더구나.”
지도 교수는 의사의 뉴튜브 활동을 부정적으로 바라봤는데 준후는 그래서 더 오기가 발동했다.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대박은 못 치더라도 의미 있는 결과는 얻을 수 있으리라.
“저는 꾸준히 잘할 자신 있습니다. 나중에 잘 되면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제발 그래다오. 건투를 빈다.”
지도 교수에게 촬영 허락을 받은 준후는 곧장 응급실로 향했다.
그로부터 3주가 지났다.
* * *
응급의학과 스테이션.
저녁 근무자가 아침 근무자에게 업무 인수인계를 하는 중이었다.
인계를 받는 쪽은 소진과 성민 등등이었고 인계를 하는 쪽은 준후와 명훈 등등이었다.
“정들 만하니까 벌써 마지막 날이네.”
소진이 아쉬워하며 준후를 바라보았다.
“나중에 정말 외과 갈 거야? 응급의학과에는 손톱만큼의 미련도 없고?”
“네.”
“야박하네. 잠깐 생각하는 척이라도 하지.”
“이래야 선배님들이 미련을 가지지 않을 것 같아서요.”
준후는 멋쩍게 웃었다.
한 달간의 응급의학과 수련은 오늘로 끝이었다.
그동안 준후는 환자를 진료 및 진단하는 법.
환자와 진료과를 연결하는 교통정리.
내공 혈관 조영술을 개발하는 등의 쾌거를 이루었다.
응급의학과를 전공할 계획이 없으니 이만하면 얻을 것은 다 얻은 셈이었다.
이제는 타 과에서 다른 지식을 익힐 차례였다.
“준후, 명훈이 둘 다 고생했다. 인턴끼리 인수인계 잘하고 다른 과에서도 열심히 해.”
“감사합니다. 선배.”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응급의학과 레지던트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준후는 스테이션을 빠져나왔다.
“헤어지기 전에 커피라도 한 잔 빨아야지. 먼저 야외 휴게실 가 있어. 난 화장실 갔다 올게.”
“오케이.”
명훈의 제안에 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준후는 응급실 바깥에 위치한 음료 자판기 앞에 섰다. 캔 커피 2개를 뽑은 후 휴대폰을 살폈다.
하…… 형편없네.
자신의 뉴튜브 채널을 확인하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지난 3주간 총 9개의 일상 동영상을 올렸는데 사람들의 반응이 영 시원치 않았다.
평균 조회수는 200회.
구독자는 40명.
구독자의 대다수가 동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성적은 더욱 처참하고 초라했다.
댓글 또한 몇 개 달리지 않았는데 대부분 준후의 외모를 칭찬하는 내용이었다.
-이분 진짜 의사 맞아요? 배우 아님???
-와 존잘! 눈 호강하고 갑니다.
-없는 병이라도 만들어서 찾아뵙고 싶네요^^
댓글을 보며 준후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차라리 외모가 돋보이는 쪽으로 영상을 찍어볼까?
외모 말고 다른 이야기는 아예 안 나오는데?
준후는 채널의 방향성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대로라면 죽도 밥도 안 될 것 같았다.
“뭐야? 또 네 뉴튜브 보고 있었어?”
“뭐. 그렇지.”
준후가 명훈에게 캔 커피를 내밀며 말했다.
“그 바닥이 그렇게 쉬운 게 아니란 말이지. 뉴튜브에서 뜨려면 뭔가 확 끌리는 컨텐츠가 있어야 해.”
“그게 뭔데?”
“그거야 나도 모르지.”
명훈의 무책임한 발언에 준후는 박장대소했다.
“그나저나 너 휴대폰 좀 보자. 내 채널 아직 구독 안 했지?”
“해…… 했는데?”
“어쭈, 목소리에 자신이 없다? 한 거 맞아?”
“그래. 했다니까! 했는데 왜 봐?”
명훈이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며 뒤로 물러섰는데 그 의미를 모를 리 없는 준후였다.
“칫, 됐다. 됐어.”
“흠흠. 그나저나 너 이번 달에 힘들어서 어떻게 하냐?”
명훈이 어색하게 헛기침하고 화제를 돌렸다.
“뭐가?”
“너 이번 달에 정형외과 아니야? 정형외과가 제일 빡세잖아.”
명훈의 목소리에 걱정이 잔뜩 묻어났다.
준후가 이번 달부터 근무하는 정형외과.
정형외과 근무가 타과보다 고된 것은 수술 보조 업무 때문이었다.
정형외과 수술에는 톱과 망치, 끌, 나사 같은 무시무시한 도구들이 사용되는데.
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강인한 체력과 근력이 필요했다.
레지던트뿐만 아니라 인턴까지도.
“오죽 힘들면 정형외과 인턴을 100만 원씩 주고 남한테 대신 서달라고 하겠어. 그거면 말 다 했지.”
“난 오히려 좋은데?”
“엥? 정형외과가 좋다고?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제대로 들었어.”
준후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무림을 경험하고 내공을 축적한 준후는 이미 초인이나 다름없었다.
정형외과 근무에 나가떨어지고 싶어도 나가떨어질 수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드디어 외과 근무를 할 수 있다는 사실.
수술방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준후의 기쁨 중 하나였다.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다른 사람은 모르리라.
“준후, 너는 진짜 별종이다. 별종.”
“그걸 이제 알았어?”
“알기야 진작 알았지만 오늘에서야 뼈에 새겼다.”
“명훈이 너는 호흡기 내과 간다고 했지?”
“응. 하루 종일 ABGA 채혈이나 할 팔자다. 이러다 흡혈귀가 되는 건 아닌지 몰라.”
명훈과 잡담을 나누는 동안.
응급의학과 인수인계를 받을 인턴들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 주인공은 아영과 정찬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깨가 쏟아지게 하고 있나? 우리도 좀 듣자.”
“준후야, 명훈아. 안녕.”
“둘 다 잘 왔어.”
준후는 두 사람에게 최대한 꼼꼼하게 인턴 업무 인수인계를 하고 주의사항도 알려주었다.
그렇게 정들었던 명훈과도 헤어지고.
준후는 정형외과 병동이 위치한 4층으로 향했다.
[닥터 서튜브, 구독자 41명.]
문득 휴대폰으로 뉴튜브 구독자를 확인하고 준후는 실소를 머금었다.
* * *
민망해 죽겠네, 진짜.
정형외과 병동으로 향하던 도중.
준후의 얼굴이 갑자기 붉게 물들었다.
병원 홍보용 모니터에 자신의 얼굴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머릿속으로 생각한 것을 현실로 마주할 때의 느낌은 또 달랐다.
준후는 부끄러운 감정을 물리치며 정형외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정형외과는 성형외과와 더불어 외과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과 중 하나였다.
첫째로 병원을 나와서 의원을 차리기 좋았고.
둘째로 전망이 좋았다.
장수시대로 접어드는 환경에서 고령층은 근골격계 질환을 피할 수가 없었다.
즉 정형외과를 찾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소아과나 산부인과가 지는 해라면 정형외과는 지지 않는 해와 다름없었다.
“뭐야? 병원 모델 선생님이 짝턴(짝궁 인턴)이셨나?”
빈정거리는 목소리에 준후가 뒤를 돌아보았다.
운동선수처럼 체구 좋은 인턴이 준후에게 다가오는 중이었다.
선우현.
의대 시절 사고만 일으켰던 승범의 패거리 중 한 명이었다.
하필이면 짝턴이 저 머저리라니.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 비실비실한 몸뚱이로 정형외과 수련을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네.”
“내 걱정해 줘서 참 고맙네. 눈물이 다 날 것 같아.”
“X랄 염X. 너 때문에 유기정학 먹은 거 아직 똑똑히 기억하고 있거든?”
우현이 와락 얼굴을 구겼다.
목에는 굵직한 핏줄까지 돋아났다.
“난 모르는 일이야. 그보다 카데바와 찍은 사진을 SNS에 올린 걸 부끄러워해야 하는 게 먼저 아닌가?”
준후는 우현에게 받은 비아냥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무림에서도.
현대에서도 당하고는 못 사는 성격의 준후였다.
“하여간 입만 살아 가지고. 두고 봐. 정형외과에서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게 해줄 테니까.”
우현이 준후를 지나쳐 혼자 병동으로 향했고.
준후는 그런 우현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지옥을 구경할 사람이 나일까?
네가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