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60화
제10장 수술 체질(5)
“…….”
“…….”
준후의 대꾸에 당직실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시한폭탄이 점화된 것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기도 했다.
‘준후, 얘는 사람을 몇 번이나 놀라게 하는 거야?’
현진이 준후를 힐끔 쳐다보고 혀를 찼다.
방금 준후는 벌집을 건드리고야 말았다.
동석은 3년 차지만 정형외과의 실세이자 군기 반장이었다.
성질 더러운 동석의 말을 거역한다면 그 대가는 구타로 치러야 했다.
운이 좋으면 뺨을 맞고.
운이 나쁘면 주먹이나 발길질에 당하고.
마가 꼈다면 야구 방망이로 맞아야 했다.
현진은 1-3단계를 모두 겪어봐서 그 고통을 잘 알았다.
그냥 네, 라고 대답했으면 끝날 일인데.
왜 사서 문제를 키우는 거야.
눈앞에 있을 때만 비위를 맞춰주면 되는데!
쿵. 쿵. 쿵.
동석이 접근하면서 현진은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준후가 맞는 것도 싫었고 도중에 불똥이 자신에게 튀는 것도 싫었다.
“이현진, 너는 잠깐 비켜 봐.”
“……네.”
“인턴, 방금 뭐라고 했냐?”
동석이 도끼눈을 뜨고 준후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준후는 전혀 겁먹은 기색이 아니었다.
저건 용감한 게 아니라 무모한 것이라고 현진은 생각했다.
“선배님이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인턴은 오직 예, 아니요, 로만 대답한다. 그게 이해가 안 되나?”
“…….”
“그 머리로 의대는 어떻게 들어가고 어떻게 졸업했지?”
“그러는 선배는 중세 사람입니까? 요즘에도 사람을 노예처럼 부리네요?”
준후의 말은 명백한 도발이었다.
동석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저항이기도 했다.
이에 동석의 얼굴이 모욕감으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하…… 이 당돌한 새끼를 봐라? 주제 파악도 못 하고 상황 파악도 못 하네?”
“…….”
“못된 송아지에게는 자고로 매가 약이지.”
동석이 솥뚜껑만 한 손바닥을 치켜든 순간.
현진은 자신이 맞는 것처럼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런데 우려했던 짝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조심스레 눈을 떠보니 펼쳐진 놀라운 광경.
귀싸대기를 맞기 전 준후가 동석의 손목을 낚아채 버린 것이다.
“이이이익. 이 새끼가?”
동석이 안간힘을 쓰며 준후의 귀싸대기를 때리려 했지만 준후가 손목을 붙잡고 있자 힘을 쓰지 못했다.
뭐야?
준후가 동석 선배보다 힘이 세다고?
체급 차이가 심한데 그게 가능한가?
믿기 힘든 사건이 다시 한번 현진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아까 준후가 반깁스와 통깁스를 한 번에 성공한 것처럼.
“아까 못된 송아지는 매가 약이라고 했죠? 그 말 돌려드리겠습니다.”
“으으으으.”
동석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준후가 손아귀 힘으로 동석의 손목을 압박했던 것이다.
드르르륵.
상황이 요상하게 흘러가는 가운데, 당직실 문이 열렸다.
4년 차 치프가 등장한 것이다.
“너희 둘, 거기서 뭐 해?”
준후는 그제야 동석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동석의 손목에는 주홍글씨처럼 준후의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김동석, 또 애들 군기 잡고 있었어?”
“그렇기는 한데 이 녀석이 먼저 저한테 개겼습니다. 인턴 주제에 까불었다고요.”
“인마, 너도 좀 적당히 해라 그러다가 신고당하면 어떻게 하려고. 요즘 애들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
“…….”
“간식 먹게 빨리 회의실로 와.”
“알겠습니다. 너 운 좋은 줄 알아. 다음에는 진짜 뒈진다.”
대답을 마친 동석이 준후를 이글이글 노려보곤 당직실을 벗어났다.
그제야 찾아온 당직실의 평화.
현진은 긴장이 풀려 하마터면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의국 분위기가 이 정도로 살벌해진 건 정말 오랜만이었으니까.
“서준후, 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하자.”
현진은 준후를 의자에 앉히고 그 맞은편에 자리했다.
하지만 꼬인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 * *
정형외과 병동 회의실.
동석은 치프에게 길고 지루한 잔소리를 듣고 있는 중이었다.
“동석아, 너도 적당히 해라. 기분 나쁘다고 매번 손부터 나가면 되겠냐?”
“…….”
“내 선에서 막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누구 한 명이 교수님한테 바로 찌르면 그때는…… 무슨 말인지 알지?”
치프가 타이르듯이 말했다.
하지만 동석은 치프의 조언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거야 교수님께 못 찌를 만큼 미리 손을 봐주면 되는 부분 아닙니까?”
“으이그. 너는 후배들 패려고 의사 됐니?”
“그건 아니지만 서열 정리는 확실히 해야죠.”
동석은 자신의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레지던트 간에는 확고한 위계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동석도 3년 차가 되기 전까지는 지독하게 맞고 살았다.
처치를 잘하지 못해서 맞았고.
환자 관리를 못 해서 맞았고.
심지어 선배들이 그냥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맞았다.
이게 정형외과 의국의 규칙이구나.
깨달음을 얻은 동석은 자신의 짬이 찬 후.
선배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후배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물론 죄책감은 느끼지 않았다.
때리고 맞는 것이 규칙이라면 동석은 오히려 규칙을 준수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내 말은 적당히 선을 지키라는 거잖아. 넌 손속이 너무 지나쳐.”
“빈도랑 강도는 조절해 볼게요. 쓰으읍!”
“왜 그래?”
“손목이 좀 안 좋아서요.”
동석은 눈살을 찌푸리며 오른쪽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손목에 준후의 손자국이 도장처럼 붉게 찍혀 있었다.
통증이 심하지는 않았지만.
손목을 움직일 때마다 욱신거려 거슬렸다.
대체 뭐 하는 새끼지?
준후를 떠올리면 그저 황당하기만 동석이었다.
동석에게 대든 인턴은 준후가 처음이었다.
준후는 아까 동석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대꾸를 했다.
가장 경악할 만한 부분은 준후가 공중에서 동석의 손목을 독수리처럼 낚아챘다는 점이었다.
완력으로 동석을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는 점이었다.
생긴 건 예쁘장하게 생겼는데.
대체 어디서 그런 힘과 순발력이 나왔을까.
호기심으로 시작한 감정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동석은 준후에게 맹렬한 분노와 적개심을 느꼈다.
인턴 주제에 설쳐댄 준후에게 따끔한 처벌을 내려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두 발 뻗고 편하게 잠을 못 잘 것 같았다.
두고 봐.
날 건드린 걸 뼈저리게 후회할 테니.
* * *
정형외과 당직실.
“준후야. 너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일을 이렇게 크게 벌였어?”
현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치프 덕분에 한고비는 넘겼지만 너 동석 선배한테 찍혔다고.”
“제가 기계도 아니고 예, 아니오 로만 대답하면서 살 수는 없잖아요?”
“나도 알아. 동석 선배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했다는 거. 그래도 선배 앞에서만 조심하면 되는 거였는데.”
현진이 한탄하며 혀를 찼다.
동석에게 찍힌 건 준후인데 어쩐지 현진이 더 고통스러워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준후는 동석이 두렵지 않았다.
혹시 의술이나 처치라면 모를까.
힘으로 자신을 이겨 먹을 생각이라면 동석은 번지수를 한참 잘못 찾았다.
무림에서 셀 수 없을 만큼 전투를 치르고.
현재 내공까지 보유한 준후였다.
천 명의 동석이 준후에게 한꺼번에 덤벼도 동석에게는 승산이 없었다.
“선배도 동석 선배한테 많이 맞았죠?”
“많이 맞았지. 앞으로도 많이 맞을 예정이고. 그래도 내가 3년 차가 되면 손을 안 댄다고 했으니까 그때부터는 좀 괜찮아지겠지.”
현진의 대답에는 깊은 체념이 녹아 있었다.
구타를 당하고 있음에도 벗어나거나 도망칠 길이 없다는 뿌리 깊은 체념이.
점차 사라지고는 있다지만.
의사 간의 폭력이 대물림되는 현실이 준후는 안타깝고 답답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다음에 선배 보면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어. 그럼 최악의 사태는 면할 수 있을 거야.”
“아니요. 그렇게는 못 하겠네요.”
“미치겠네, 진짜! 솔직히 아까 좀 멋있긴 했는데 그래도 동석 선배는 네가 감당할 사람이 아니야.”
“길고 짧은 건 대봐야겠죠.”
동석이 한 번만 더 폭력을 휘두르려 한다면.
그때야말로 준후는 가만히 있지 않을 계획이었다.
“휴우, 이젠 나도 모르겠다. 내가 알아서 해.”
“너무 걱정 마세요. 정말 알아서 해결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대화는 끝이 났다.
준후는 당직실을 나와 밀린 오더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현진에게 배운 캐스트와 스플린트도 척척 해냈다.
환자의 골절 부위와 골절 정도에 따라서 캐스트와 스플린트를 변형하는 센스도 선보였다.
준후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처치와 검사를 하는 동안.
준후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바로 수술 어시스트였다.
병동 일을 하더라도 보통 하루에 한 번 이상은 수술방에 들어간다고 했는데.
대체 언제 스크럽을 서는 거지?
준후는 언젠가부터 수술방에 들어가는 시간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처치를 막 끝내고 스테이션으로 이동하던 중.
준후는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우현을 발견했다.
우현의 표정은 얼이 빠져 있었다.
어깨는 처져 있고 발걸음에는 힘이 없었다.
한쪽 뺨이 빨갛게 부은 걸 보면 동석에게 귀싸대기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야, 괜찮아?”
“어? 어.”
준후가 코앞에서 말을 걸자 그제야 우현이 준후를 알아보았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지. 그 상태로 다음 수술 들어갔다가 무슨 사고를 치려고.”
“그건 아는데 너무 힘들어. 죽을 것 같아.”
우현이 다짜고짜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수술방 분위기가 너무 무섭다.
뭐 하나만 잘못해도 쌍욕이 날아온다.
환자 체위를 변경하고 수술 부위를 견인하다 보면 체력이 떨어져서 온몸이 바들바들 떨린다 등등.
준후를 싫어함에도 우현이 속내를 솔직하게 드러냈다.
정형외과 수술이 그만큼 힘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우현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오히려 수술방에 들어가고 싶어서 안달이 나는 준후였다.
피지컬이라면 어디에 내놓아도 자신이 있었으니까.
“내가 이 정도면 너는 한 타임도 못 버틸걸?”
“그건 네 착각이고. 오늘 스크럽은 몇 번 섰는데?”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다 합치면 8시간은 되는 것 같다.”
우현이 질렸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다음 스크럽은 언제인데?”
“한 시간 뒤. 하필이면 또 고릴라가 퍼스트야. 그 새끼한테 맞아서 이 꼴이 됐다고.”
우현이 분통을 터뜨리며 검지로 본인의 한쪽 뺨을 가리켰다.
준후의 예상이 맞았던 것이다.
준후도 우현이 싫었지만 동석은 우현보다 더 싫었다.
“그럼 나랑 스케줄 바꿀래?”
“어떻게?”
“한 시간 뒤에 있는 수술, 내가 들어갈게. 네가 병동 잡하면 되잖아.”
“야, 서준후!”
“왜?”
“X발, 졸라게 고맙다. 난생 처음 네가 멋있어 보이기 시작했어.”
우현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준후는 실소를 터뜨렸다.
스크럽이 오죽 힘들면 이런 반응이 나오나 싶기도 했고.
이래서 내부 결속을 다지기 위해 외부의 적을 만드는가 싶기도 했고.
“밀린 오더는 내가 다 처리했으니까 어디 짱박혀서 요령껏 쉬어라.”
“네. 형님.”
우현이 너스레를 떨고는 준후를 지나쳤다.
좋았어.
내 힘으로 스크럽 하나를 따냈다.
앞으로 1시간만 지나면 드디어 학수고대하던 수술 어시스트구나.
준후는 스테이션에 도착해서 처치 물품들을 정리했다.
그런데 때마침 태진 간호사가 준후를 호출했다.
“선생님. 소아 병동 한 번 내려갔다 오셔야겠는데요?”
“소아 병동이요? 갑자기?”
준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