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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61화 (61/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61화

제10장 수술 체질(6)

저벅. 저벅.

준후는 소아 병동의 복도를 가로질러 걷고 있었다.

창가를 통해 바라본 병실에는 다양한 나이대의 소아들이 입원해 있었다.

유치원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아직 꽃도 피워보지 못한 생명들이 병원에 답답하게 갇힌 채.

질병으로 고통받는 중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아파 왔다.

저 새파란 것들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하늘은 이리도 혹독한 시련을 내려주었을까.

준후는 괜히 야속한 하늘을 원망해 보았다.

드르르륵.

복도 끝에 위치한 병실에 들어가서 준후는 환자를 마주했다.

환자의 이름은 건우.

나이는 9살.

오늘 오전 전방십자인대 파열로 수술을 받았다. 건우에게 캐스트(통깁스)를 하기 위해 준후는 병실을 찾았다.

“건우야, 안녕?”

“…….”

준후가 아는 체를 했지만 건우는 대답이 없었다.

경계하는 눈빛으로 준후를 쳐다볼 뿐이었다.

낯가림이 심한 성격인가?

“선생님. 나쁜 사람 아니야. 건우를 치료해 주려고 온 사람이지. 어머니는 잠깐 어디 가셨니?”

준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이의 곁을 지켜야 할 보호자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

“다리는 좀 어때?”

“많이 아프지는 않아요.”

“그거 다행이구나. 가만히 누워만 있으니까 심심하지?”

“아니요. 만화 보면 돼요.”

건우가 손에 들고 있는 휴대폰을 준후 쪽으로 내밀었다.

건우는 아동 애니메이션 같은 것을 보고 있었다.

요새 어린 친구들은 휴대폰만 손에 있으면 몇 시간이라도 잘 논다고 하던데…….

그 말은 사실인 듯했다.

“선생님이 건우한테 해야 할 일이 있어. 아픈 건 아니니까 선생님 말을 따라주렴.”

준후는 드레싱 카트에 챙겨 온 물품으로 건우의 왼쪽 다리에 통깁스를 했다.

푹 적셨다가 물기를 짜낸 석고 붕대를 건우의 다리에 감고.

그 위에 일반 붕대를 감고.

그 위에 초록색 석고 붕대를 감았다.

당연하게도 통깁스는 완벽했다.

붕대를 감는 횟수나 방향은 물론이요.

다리를 단단히 고정하면서도 혈액 순환에 문제가 없는 수준의 높은 퀄리티를 이뤄냈다.

현진의 통깁스 능력을 100퍼센트 흡수한 덕분이었다.

소아에게 통깁스를 하는 것 처음이었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흡수한 통깁스 요령을 적당히 변형하면 그만이었기에.

준후는 한 때 칼밥(?)을 먹었던 화려한 손놀림으로 처음 하는 소아 깁스를 말끔하게 성공했다.

정형외과에서만 할 수 있는 처치에 숙달하니 뿌듯했다.

이래서 여러 과를 도는 인턴이 좋단 말이지.

각 과마다 배울 것들이 존재하니까.

“다리는 좀 어때? 너무 꽉 조이는 느낌이 들면 말해줄래?”

“으음…… 괜찮은 것 같아요.”

“다행이구나. 엄마 올 때까지 잘 쉬고 있으렴.”

“근데 선생님.”

준후가 돌아서는 순간, 건우가 준후를 호출했다.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어?”

“그런 건 아니고요. 선생님, 그림 잘 그려요?”

“그림은 왜?”

“여기다가 그림 그려주시면 안 돼요? 다른 친구들은 여기에 막 그림 그리던데.”

건우가 검지로 통깁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통깁스에 지인들이 낙서하는 일은 유서 깊은(?) 전통이었다.

건우는 아마 그게 부러웠던 모양이었다.

“못 해줄 것도 없지. 혹시 좋아하는 캐릭터 있니?”

준후는 가운 주머니에서 유성펜을 꺼내며 물었다.

“선비요.”

“조선 시대 선비? 요즘은 그런 캐릭터가 인기야?”

“제가 말한 선비는 얘예요.”

건우가 다시 한번 보고 있던 휴대폰을 내밀었다.

액정에 동글동글한 2등신 캐릭터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건우의 말에 따르면 선비는 착한 요괴고 요즘 초등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 중 하나라고 했다.

“선생님이 똑같이 그려줄게. 기대해.”

“네.”

건우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준후는 자신만만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준후는 손으로 하는 일에는 다 자신이 있었다.

검법과 권법을 익히면서 손가락과 손목과 팔을 무수히 움직이고 단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여운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손쉽게 따라 하…… 기는 개뿔이었다.

검과 다르게 유성펜은 준후의 뜻을 따라주지 않았다.

손이 엇나가면서 보고 있는 것과 그리고 있는 것의 괴리가 심해졌다.

대략 5분 만에 완성한 준후의 선비.

준후 판 선비는 착한 요괴가 아니라 악한 요괴였다.

아이들을 지켜주기는커녕 아이들을 잡아먹을 것처럼 험상궂었다.

제……젠장. 이게 아닌데?

검술과 그림은 별개였나?

그림을 다 그린 준후는 낭패감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건우의 표정을 살폈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건우의 표정이 심각했다.

투박하고 못생긴 준후판 선비가 통깁스의 중앙을 차지한 것이 못마땅한 눈치였다.

당장 울 것 같기도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잘 그린다고 허세나 부리지 말걸.

“건우야, 이 친구는 사실 선비가 아니야.”

“그럼 누구인데요?”

“선비 친구 산비라고 하는데 얘도 나쁜 요괴를 혼내줘.”

“만화에 이런 요괴 없어요. 이름도 이상하고 너무 못생겼단 말이에요. 그리고 전 선비 그려달라고 했는데.”

건우의 목소리에 서러움이 잔뜩 담겼다. 말을 하다가 감정이 더 북받쳤던 것일까.

당장 울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준후는 다급하게 소아 병동 스테이션으로 이동했다.

정화 간호사를 붙잡았다.

“선생님. 저 좀 도와주세요.”

“쌤. 무슨 일이길래 표정이 그렇게 심각해요? 응급이에요?”

놀란 정화가 눈을 치켜뜨며 물었고 준후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림 잘 그리면 건우한테 가서 선비 좀 그려주세요.”

“네? 선비요?”

“네. 선비요. 응급입니다.”

우스꽝스러운 내용을 진지하게 말하는 준후였다.

* * *

정화의 도움으로 선비의 난(?)은 나름 행복하게 마무리되었다.

정화는 그림을 잘 그렸는데.

산비 옆에 진짜 선비를 그려 넣었고 주변에 꽃과 잔디 같은 아기자기한 배경도 추가했다.

덕분에 통깁스는 말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건우의 표정도 그제야 풀렸다.

임무를 마치고 정화와 스테이션으로 돌아오는 길.

준후는 모처럼 자괴감을 느꼈다.

아니, 무림을 경험하고 나서 처음으로 자괴감을 느꼈다.

그림이라는 벽 앞에서 이렇게 무기력해질 줄이야.

손으로 하는 일은 다 잘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그림 그리는 거 쉽지 않네요.”

준후가 한탄하며 말했다.

“그럼요. 그림도 훈련이 되고 익숙해져야 잘 그릴 수 있어요. 캐릭터가 단순해서 쉽게 생각하셨죠?”

“네. 근데 제가 완벽하게 오판했네요.”

“그래도 서 쌤은 참 대단한 것 같아요.”

정화가 준후와 눈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어떤 점에서요?”

“인턴인데 혼자서 캐스트 한 것도 그렇고. 아이한테 선뜻 그림을 그려주셨잖아요. 바쁘다고 무시할 수도 있었는데.”

“제가 투자한 몇 분으로 환자가 행복할 수 있다면 마땅히 그래야죠.”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타인에게 받은 사소한 칭찬이나 사소한 배려에 하루 종일 즐거워해 본 경험을.

준후는 환자들에게 되도록 그런 경험을 많이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런 작고 사소한 경험들이야말로 고된 삶을 지탱해 준다는 사실을 알아서였다.

“아, 그건 그렇고 건우 보호자는 어디 갔나요? 아까부터 계속 안 보이던데?”

준후가 보호자로 화제를 돌렸다.

“그래요? 제가 봤을 때는 분명 같이 있었는데.”

“…….”

“잠깐 볼일 보러 밖에 나가셨나 봐요.”

“아무리 바빠도 어린아이를 혼자 두는 건 안 좋은데. 지인하고 교대하면 모를까.”

준후는 보호자의 행동이 탐탁지 않았다.

오늘 막 수술을 받은 건우 아닌가.

혼자 병실을 지키고 있으면 그 외로움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뭔가 사정이 있겠죠. 건우 어머니 좋은 분이에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마침 저기서 오시네요.”

정화가 손짓으로 한 여성을 가리켰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보호자는 복장이 화려했다.

병원이 아니라 학예회에 참석할 때나 어울릴 법한 옷을 입고 있었다.

“선생님, 죄송해요.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 잠깐 나갔다 왔어요. 건우한테 별일은 없었죠?”

“별일은…….”

정화가 준후를 쳐다보고 피식 웃다가 대답을 끝마쳤다.

“없었죠.”

“자리를 비우면 안 되는데 건우를 부탁할 사람이 없어서요.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게 할게요. 그럼 수고하세요.”

보호자가 떠나자 정화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보셨죠? 건우 어머니 괜찮은 분이라니까요? 향수를 좀 진하게 쓰시는 게 탈이지만. 에취!”

정화가 재채기를 했고 준후는 뒤를 돌아 보호자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정화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었다.

보호자에게서 담배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아무리 강한 향수를 써도 후각이 발달한 준후는 속일 수 없었다.)

물론 담배를 피우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보호자의 옷에서 단순한 담배 냄새가 아닌 담배 찌든 냄새가 났다는 점이었다.

담배 냄새가 옷에 찌들었다면.

최소한 한 시간 이상 자리를 비웠다는 건데.

한 시간 이상 담배 냄새에 노출된 장소에 있었다는 건데.

그 장소가 과연 건전한 곳일까.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준후는 보호자를 더욱 의심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보호자가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알아봐야겠다.

지이이잉.

때마침 상념을 깨뜨리는 콜폰의 진동.

준후는 곧바로 통화를 연결했다.

-서준후, 나 대신 스크럽 서준다고 했지? 고릴라가 당장 준비하란다.

* * *

드디어 정규 수술 첫 어시스트에 들어가게 된 준후였다.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이날을 얼마나 꿈꿔왔는지.

준후는 설레는 발걸음으로 4층 수술실을 찾았다.

위이이잉.

자동문을 통과하자 간호사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각 수술방에 필요한 수술 도구를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준후는 경의실로 이동해 수술복을 입고 수술모와 마스크를 착용했다.

장소를 세면대로 옮겨 스크럽(수술 전 소독)을 실시했다.

벅. 벅. 벅.

소독액을 묻힌 솔로 손가락, 손가락 사이, 손등과 손목, 팔꿈치까지를 힘차게 문질렀다.

수술 전 위생 관리는 항상 철저해야 했다.

수술을 잘 끝마쳐도 감염증이 생긴다면 수술이 말짱 꽝이기 때문이다.

준후는 양쪽 팔꿈치를 든 상태로 수술실에 붙어 있는 중앙 공급실을 찾았다.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수술 가운을 착용하고 수술 장갑까지 착용했다.

“선생님. 정형외과 인턴이죠?”

복장 착용을 도왔던 간호사가 준후에게 말을 걸었다.

“네. 맞습니다.”

“각오 단단히 하시는 게 좋아요. 같이 수술 들어가는 교수님이 호랑이 교수님이에요.”

“…….”

“게다가 퍼스트(제1보조) 선생님도 한 성깔해서 인턴들 막 때리고 그러더라고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준후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애초에 고릴라 동석은 두렵지 않았고.

집도의가 호랑이 같은 성격이라면 오히려 준후와 케미가 좋을 것이다.

무림에서 무공을 갈고 닦을 때.

준후는 인자한 성격의 스승보다는 엄격한 스승을 선호했다.

망치를 수없이 두들겨야 검이 단단해지는 것처럼.

준후는 남이 자신을 두드려야 더 강해지는 부류였다.

“이동훈 교수님은 어떤 분인가요?”

준후가 호기심에 물었다.

“엄청 대단한 분이죠. 정형외과 쪽으로는 국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세요.”

“…….”

“수지접합 수술 빼고는 다 하시니까요. 키 크는 수술 성공률도 80퍼센트가 넘어가세요.”

간호사의 대답에 준후는 흐뭇하게 웃었다.

새로운 스승을 만나게 될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들어서.

지이이잉.

잡담을 마치고 진입한 수술방.

자동문이 열리고 새하얀 소독 연기가 준후를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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