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62화 (62/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62화

제10장 수술 체질(7)

수술방에 들어서자 공기부터 달라졌다.

알싸하고 진한 알코올 향이 코를 찔렀고 살갗에 닿는 공기는 서늘했다.

알코올 향을 피 냄새로.

공기의 서늘함을 오한으로 바꾼다면.

무림에서 악귀들과 전투를 펼치기 직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다.

준후는 수술방을 친숙하게 느끼며 주변을 훑어보았다.

각종 수술 및 처치 도구가 놓여 있는 서랍과 찬장들.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 무영등.

그 아래 놓여 있는 수술대.

환자를 기다리고 있는 환자 감시 장치 등등.

외과의를 꿈꾸면서 새로운 전장이 되어버린 수술방에서 경건함마저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이번 수술 스크럽 서는 인턴 서준후입니다.”

준후는 찬장으로 이동해 수술 도구를 정리 중인 간호사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수술방 간호사는 크게 두 가지 분류로 나뉜다.

수술에 직접 참여해서 수술을 보조하는 소독 간호사.

수술방과 수술실을 오가며 필요한 수술 도구를 전달해 주는 순환 간호사.

준후가 인사를 건넨 간호사는 순환 간호사였다.

“네. 안녕하세요. 정미주예요. 근데 꽤 일찍 오셨네요?”

“오늘 수술이 만만치 않다고 들었거든요. 미리 대비해야죠.”

“벌써 소문이 났나 보네요. 참고로 오전에 스크럽 섰던 덩치 큰 인턴 선생님 있잖아요.”

“…….”

“그 선생님, 완전 박살 났어요. 혹시 도망치진 않았죠?”

순환 간호사 미주가 우현을 걱정했다.

어쩐지 병동에서 마주쳤을 때 넋이 나갔던데 스크럽을 하다가 탈탈 털린 모양이었다.

준후야 하늘이 두 쪽 나도 그럴 일은 없겠지만.

“도망치는 대신 저한테 SOS를 청했죠. 그래서 구원투수로 왔고요.”

“…….”

“선생님하고 수술 도구 세팅하면 되는 거죠?”

준후가 화제를 돌렸다.

“네. 지금 당장은요. 인수인계는 제대로 받으셨죠? 물론 그렇다고 한 번에 잘할 수야 없겠지만.”

“받았습니다. 같이 준비하시죠.”

준후는 미주를 도와 수술 도구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달그락. 달그락.

찬장과 서랍장을 열어 멸균된 수술 도구를 꺼낸 뒤 드레싱 카트 위로 올려놓았다.

수술 도구는 그 종류가 많았다.

시저(scissor, 가위)만 해도 생김새와 용도에 따라 10개가 넘었다.

이름 그대로 외과용 가위.

메이요 시저, 메젠바움 시저.

안과 가위, 봉합 가위 등등.

하지만 준후는 어렵지 않게 척척 필요한 수술 도구만 챙겼다.

‘설마 이런 식으로도 무림의 덕을 볼 줄이야.’

준후의 입가에 문득 미소가 어렸다.

검객이었던 준후는 무림에서 수많은 무기를 다루고 수많은 무기를 상대해 보았다.

그래서 날붙이의 특성과 용도를 매우 잘 알았다.

쉬운 예를 들면 검과 도의 차이 같은 것이었다.

검은 양쪽에 날이 서 있고 끝이 뾰족해서 찌르기에 적합했다.

도의 경우 날이 한쪽에만 있으며 곡선의 형태를 띠어 적을 베었을 때 더 큰 타격을 줄 수 있었다.

이런 지식들은 자연스럽게 수술 도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메이요 시저의 경우.

날이 두껍고 뭉뚝한 것을 보면 굵은 조직을 자를 때 유용하겠다.

메젠바움 시저의 경우.

날이 얇고 곡선의 형태를 띠고 있어 미세한 조직을 자를 때 유용하겠다 등등.

준후는 수술 도구의 미세한 차이를 알아보았고.

그 미세한 차이가 실제 수술에서 어떻게 적용될지도 손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다른 인턴들은 의대 시절에 한 번 공부하고 까먹어서 다시 죽어라 공부하는 수술 도구의 용도를 준후는 손쉽게 기억했다.

수술방에서 처음 본 수술 도구들의 용도 또한 어렵지 않게 추론이 가능했고 말이다.

‘살벌하긴 살벌하네.’

준후는 정형외과에서만 쓰는 수술 도구들을 챙기며 혀를 찼다.

나사, 망치, 전기 톱, 드릴, 끌 등등.

전부 목공에 쓰일 법한 우악스러운 도구들이었다.

사람들이 정형외과의를 목수라고 부르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준후는 다 챙긴 수술 도구들을 관찰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수술 도구들을 통해 오늘 펼쳐질 수술의 설계도를 그려봤던 것이다.

복잡하긴 했지만 못 할 일도 아니었다.

준후의 추측에 따르면.

오늘 수술에는 힘쓸 일이 많을 것 같았다.

나사와 망치가 특히 많았다.

“선생님. 제 쪽은 끝났습니다.”

“네? 벌써요?”

미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준후를 쳐다보았다. 준후의 속도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오늘 처음 스크럽 서는 거 맞죠?”

“처음인데 무슨 문제라도…….”

“일찍 왔길래 성실한 쌤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설렁설렁 일하는 쌤이었나?”

미주의 눈초리에 의심이 가득했다.

최소 20분이 걸리는 일을 5분 만에 끝냈다?

그것도 순환 간호사인 자신에게 질문 한 번 안 하고?

심지어 자신보다 빠르게?

그렇다면 일을 대충했다고 밖에 판단할 수 없는 미주였다.

“선생님. 수술 도구 세팅 제대로 못 하면 교수님하고 레지던트 선생님한테 욕 바가지로 먹어요.”

“…….”

“인턴 일이 힘든 건 아는데 수술방에서는 특히 더 꼼꼼해야 해요.”

미주가 걱정하며 말했다.

“뭔가 오해가 있나 본데요. 설렁설렁한 게 아니고 일을 빨리 마친 겁니다. 못 믿겠으면 확인해 보세요.”

“하라면 안 할 줄 알았죠?”

미주가 새침하게 말하고 준후 쪽으로 다가왔다.

드레싱 카트에 놓인 수술 도구들을 유심히 살폈다.

뭐 하나 작은 꼬투리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어라?”

미주의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얼빠진 소리.

놀랍게도 준후의 말이 맞았다.

수술 도구 세팅은 완벽했다.

빠진 것도 없고 더해진 것도 없었다.

심지어 수술 도구를 용도 별로 분류하는 잔재주까지 부렸다.

“진짜 실수가 하나도 없네요? 완벽주의자신가?”

“이제 속이 후련하십니까? 제가 설렁탕을 좋아하지만 일을 설렁설렁하지는 않는다고요.”

준후는 말장난을 하는 여유도 보였다.

“오해해서 미안해요. 근데 일을 잘해도 너무 잘하는 거 아니에요? 이런 인턴 쌤은 본 적이 없어는데.”

“저는 이상하게 수술 도구들이 친숙하네요.”

“정말 이상한 일이네요.”

미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옥에 티가 딱 하나 있었어요. 그것만 고쳐주세요.”

“그게 뭔데요?”

“마지막에 설렁탕 개그요. 그건 좀 별로였어요.”

* * *

미주의 칭찬을 받은 후에도 수술 준비는 계속되었다.

준후는 수술용 모니터에 환자의 MRI 사진을 띄웠고 옆 수술 방에서 C-arm(이동 가능한 엑스레이)도 챙겨왔다.

보통 30분 이상 걸리는 수술 준비는 단 10분 만에 끝내는 기염을 토했다.

“쌤하고 일하니까 진짜 편하네. 병동 잡 하지 말고 스크럽만 서면 안 돼요?”

세팅이 끝난 후 미주가 후련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 되더라고요.”

준후가 아쉬워하며 대답했다.

준후는 그 어떤 인턴보다 수술방 업무를 간절히 원했다.

외과의가 목표였으니까.

하지만 세상일은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병동 잡 2주.

스크럽 2주.

준후는 두 종류의 순환 근무를 우현과 나눠야 했다.

“아, 참 선생님. 아직 시간 남았잖아요.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말씀하세요.”

“이동훈 교수님이 즐겨 쓰는 수술 도구를 알려주세요. 예습 좀 하고 싶어서요.”

“와, 그런 것까지 공부를?”

미주가 놀란 부엉이 눈으로 되물었다.

하지만 무림을 경험한 준후에게는 앞선 질문이 당연하면서도 자연스러웠다.

무인(武人)이라면 누구나 즐겨 쓰는 병장기가 있기 마련이었다.

이는 서전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이동훈 교수가 즐겨 쓰는 수술 도구를 파악한다면.

이동훈 교수의 수술 스타일.

더 나아가서는 이동훈 교수의 성격까지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으리라.

“공부에서 남 주는 게 의사인데 열심히 공부해야죠.”

“학구열 대박이다. 수술 종류에 따라서 다르긴 한데 대표적인 것만 알려드릴게요.”

미주의 수업이 시작되었다.

미주는 가위, 봉합사, 포셉, 니늘 홀더 등등.

이동훈 교수가 자주 사용하는 수술 도구를 종류별로 짚어주었고.

준후는 이를 암기하며 머릿속에 담았다.

그 덕분일까.

이동훈 교수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자신의 예측이 맞는지 실제 수술에서 확인해 보는 것도 어시스트의 묘미 중 하나가 될 것 같았다.

“전 먼저 가볼게요. 힘들겠지만 파이팅이요.”

수술 도구 교육을 끝내고 미주가 손을 흔들었다.

“수고하셨고 나중에 커피라도 한 잔 살게요.”

“네. 기억하고 있을게요.”

지이이잉.

미주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동석이 수술방으로 들어왔다.

당직실에서 시비가 붙다가 몸싸움 직전까지 갔기에.

둘 사이의 분위기는 냉랭하기만 했다.

하지만 준후는 애써 분위기를 풀 생각이 없었다.

-인턴은 오직 예, 아니오 로만 대답한다. 그게 이해가 안 되나?

동석은 준후에게 말도 안 되는 지시를 내렸다. 또 지시를 따르지 않자 손찌검까지 하려고 들었다.

비록 인턴이라고 해도.

이런 양아치 같은 놈에게 고개를 숙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어차피 인턴 일만 잘해도 동석에게 꼬투리 잡힐 일은 없을 테고.

“왜 네가 여기 있냐?”

동석이 못마땅하다는 눈빛으로 준후를 응시했다.

“우현이가 몸이 안 좋다고 교대해달라고 했습니다.”

“X발, 인턴끼리 아주 잘들 논다 잘들 놀아. 뭐, 차라리 더 잘 된 걸지도 모르겠지만.”

동석의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음흉했다.

“어디 수술 준비 잘했는지 확인해 볼까? 실수 하나 발견할 때마다 한 대씩이다?”

동석이 준후를 지나쳐 수술방을 살피기 시작했다.

드레싱 카트에 놓인 수술 도구.

수술용 모니터에 떠오른 MRI 영상.

미리 준비한 C-arm 등등.

동석은 한참 수술방을 살폈지만 결국 아무 소득 없이 수술대로 돌아왔다.

뭔가 트집을 잡고 싶었던 것 같은데 어림도 없지.

수술의 신이 와도 트집을 못 잡게 세팅했으니까.

준후는 속으로 웃었다.

“준비는 잘한 것 같은데 기고만장하지 마라. 이래 놓고 수술할 때 실수하면 처맞으니까. 알았어?”

“네.”

“어쭈? 대답이 시원치 않네?”

준후의 대답에 동석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젠 깔 게 없으니까 대답으로 까려는 건가?

동석의 행동이 어처구니없는 준후였다.

“근데 어떻게 대답해야 시원한 대답이 되죠?”

“이 새끼가 진짜! 너 지금 나 놀리냐?”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겁니다. 알아야 진심을 담든가 말든가 하죠.”

“그야…… 당연히 선배에 대한 존경을 담아서 대답해야지.”

“아까도 존경을 담아서 대답했는데 못 느꼈나 봐요?”

“이 새끼가 또 또 말장난을.”

동석이 손을 번쩍 올렸다가 내렸다. 때마침 환자가 수술방에 도착했던 것이다.

“너 수술 끝나고 보자. 교수님 올 때 됐으니까 나머지 준비해.”

“네에~”

준후는 존경(?)을 담아 대답하고 타임아웃을 실시했다.

타임아웃이란 수술 받는 환자와 수술방에 온 환자가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타임아웃 후 준후는 환자에게 환자 감시 장치를 연결하고 환자의 무릎 아래를 쿠션으로 받쳤다.

수술을 받는 경골 부위가 중립이 되도록 정렬했다.

일련의 동작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병동 일을 하는 내내.

스크럽을 서는 이 순간만을 그리고 또 기다려왔으니까.

마취의가 전신마취를 하면서 수술 준비는 끝났다.

지이이잉.

곧 수술방에 입장한 집도의 이동훈 교수.

수술 마스크와 수술 모를 썼음에도 이동훈 교수는 분위기부터 남달랐다.

걸음걸이는 당당했고.

눈빛에는 호랑이 같은 기백이 담겨 있었다.

이동훈 교수가 고수임을 준후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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