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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65화 (65/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65화

제11장 수련(3)

밤 11시.

저벅. 저벅.

준후는 응급실에서 병동으로 복귀하고 있었다.

단순 골절 환자에게 스플린트(반깁스)를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본래라면 1년 차 현진의 일이었지만 준후가 대신 처리했다.

인턴답지(?) 않게 깁스를 할 줄 알았던 데다가 바쁜 현진이 안쓰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복도를 걷다가 준후는 창밖을 응시했다.

깜깜한 밤을 병원 건물들이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환자들에게 희망의 등대가 되려는 듯이.

각종 사고와 질환들은 물러가라는 듯이.

그러고 보니 병원 생활도 벌써 두 달 차로 접어드는 중이었다.

그래서일까.

준후는 병원에서 지내는 일이 바깥에서 지내는 일보다 훨씬 편하고 익숙하게 느껴졌다.

바깥세상이 오히려 이상한 세상처럼 느껴졌다.

그런 낯선 감정은 특히 쉬는 날 외출할 때 심해졌다.

준후의 체질이 보통 사람에서 의사로 변하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복도를 지나면서 준후는 오늘 하루를 돌이켜 보았다.

오늘 하루는 전체적으로 만족스러웠다.

현진에게 반깁스와 통깁스를 배웠고.

수술 스크럽을 두 번이나 섰고.(특히 동훈의 칭찬을 받으며 양손 사용에 대한 힌트를 얻았다는 점이 유익했다.)

정형외과 병동 업무에도 익숙해졌다.

옥에 티라면 동석과 악연이 된 정도였는데.

크게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다.

도착한 정형외과 병동은 고요했다.

병실의 불은 조명등을 빼고 다 꺼져 있었으며 복도를 얼씬거리는 환자나 보호자가 없었다.

“선생님. 오늘은 별일 없었어요?”

준후가 스테이션에서 근무 중인 민경에게 물었다.

병동 최고의 소식통은 누가 뭐래도 간호사였다.

간호사의 도움을 받으면 병동에서 벌어진 일을 속속들이 알 수 있었다.

일종의 관제탑이랄까.

“오늘이요? 으음…….”

민경이 볼을 긁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어떤 보호자분이 음주를 하셔서 주의를 준 적이 있고요. 입원비 깎아달라고 한 환자도 있었고. 또…….”

민경의 대답이 한참 이어졌고.

준후는 그중에서 몇 가지 유용한 정보만 기억해두었다.

모르는 것이 약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

뜻이 충돌하는 두 가지 속담이 있는데 적어도 병원에서는 후자가 전리였다.

“아 참 선생님. 소아 병동의 건우에 대해 아는 거 있으세요?”

준후는 건우를 화제로 돌렸다.

9살 건우는 준후가 직접 통깁스를 해주었던 소아 환자였다.

문제는 준후가 건우의 어머니에게서 수상한 냄새를 맡았다는 점이었다.

본래 대로라면 어머니와 직접 대화를 시도할 계획이었지만.

병동 일이 바쁘고 수술 어시스트가 연속으로 잡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건우요? 별일 없었던 걸로 아는데요?”

타다다닥.

민경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말했다. 간호기록지를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으음…… 어머니랑 계속 병동에 있었던 걸로 나오네요. 특이한 처방이나 처치도 없었고요.”

“선생님이 보기에 건우 어머니는 어떤 사람인가요?”

“사근사근하고 저희한테 커피도 가끔 사주시고 좋은 분이죠.”

민경 역시 정화처럼 건우의 어머니를 좋게 보고 있었다.

하지만 준후는 오히려 그 점이 더 수상했다.

무림에서 지낸 오랜 경험상.

평판이 너무 선하다면 위선자가 아닌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었으니까.

오늘은 너무 늦었고.

내일 직접 얼굴을 봐야겠어.

“오늘 하루도 진상 환자 처리하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사실 친절하고 좋은 환자와 보호자 분이 더 많은데 이상하게 진상 환자 하나가 더 기억에 남는 거 있죠?”

“…….”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민경이 씁쓸하게 웃었다.

“선생님만 그런 거 아니에요. 저도 그러더라고요.”

“정말요?”

“사람은 원래 힘든 일을 더 마음에 두는 성향이 있는 게 아닐까 싶네요.”

준후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무림 시절을 떠올렸다.

무림에서도 행복했던 기억이 많았을 텐데 당장 떠오르는 건 다 악몽 같은 기억뿐이었다.

적일도에게 무림의 아버지가 목숨을 잃은 일.

무림맹 임무를 수행하다가 동료들이 다치거나 사망한 일.

마지막으로 자신이 사망한 일 등등.

행복은 급성이라 사라지만 고통은 만성이라서 상처가 된 채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고통에 민감한 인간의 성향을.

준후는 의사의 방식대로 해석해 보았다.

급성과 만성으로.

“일은 좀 어때요? 할 만해요?”

준후가 화제를 돌렸다.

민경은 근무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신규 간호사였다.

“외울 것도 많고 신경 쓸 것도 많지만 그래도 버틸 만해요. 태움을 걱정했는데 태움이 없어서 좋더라고요.”

“…….”

“다들 저한테 잘해주세요.”

“그거 다행이네요. 원래 일보다 동료를 잘 만나는 게 더 중요한데.”

“근데…….”

민경이 준후의 눈치를 보다가 말을 이었다.

“선생님. 이 말 하면 어디다 소문 안 내실 거죠?”

민경은 숨기고 있는 무언가가 있는 듯했다.

호기심이 생긴 준후는 대답 대신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민경이 웃으며 준후와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다른 건 아니고 동석 선생님이 저한테 찝쩍거려서요. 번호 물어보고 음흉하게 쳐다보기도 하고.”

민경의 고백에 준후는 눈살을 찌푸렸다.

동석은 나쁜 일이라면 안 끼는 곳이 없었다.

후배 레지던트와 인턴에게 손찌검하는 것도 모자라 신규 간호사에게 추파를 던진다니.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바깥에서 샌다고 딱 그 꼴이네요.”

“아직은 치근덕거리기만 해서 뭐라고 말하긴 힘들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가 조만간 건수를 잡아서 따끔하게 혼내줄게요. 너무 걱정 마세요.”

“죄송하지만 서 쌤. 인턴이잖아요. 3년 차 레지던트를 무슨 수로…….”

“다 방법이 있죠. 저만 믿으세요.”

준후는 씨익 웃으며 민경과의 대화를 마쳤다.

드르르륵.

당직실로 들어가기 무섭게 고소한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준후만 쏙 빼놓고 레지던트들과 짝턴 우현이 치킨을 야식으로 먹고 있었던 것이다.

“어. 준후 왔냐? 연락 못 해서 미안하다.”

“괜찮습니다. 마침 음식 생각도 없었어요.”

현진이 미안해하며 말했고 준후는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책상에 앉았다.

준후는 이 상황이 어떻게 벌어졌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동석이 준후를 따돌리고 야식을 먹자고 제안했겠지.

동석이 준후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만큼 준후도 동석을 향한 적개심을 키워갔다.

건수만 제대로 잡히면 본때를 보여주리라.

“야, 역시 치킨은 양념 치킨 아니냐? 매콤달콤한 게 끝내주네.”

동석이 준후 들으라는 듯 한마디 했다.

그리고 닭 다리를 양손으로 집어서 우적우적 먹기 시작했다.

준후가 관찰한 결과.

야식으로 치킨 5마리를 배달시켰는데 치킨의 다리를 싹쓸이한 사람은 동석이었다.

동석의 인성은 구제불능이었다.

* * *

그날 자정, 당직실.

준후는 현진과 당직 근무를 서고 있었다.

잠을 잘 수 없다뿐이지 당직 근무 자체는 여유로웠다. 정형외과의 특성상 응급실의 응급 콜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선배. 제가 일 좀 도와드릴까요?”

준후가 선뜻 제안했다.

“응. 네가?”

“선배 일이 빨리 끝나야 저도 편히 쉴 것 같아서요.”

“눈치 보지 말고 쉬고 싶으면 쉬어. 나대신 캐스트랑 스플린트도 하고. 스크럽도 두 번이나 서서 피곤할 텐데.”

“전 별로 안 피곤한데요?”

준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까 전 영양제를 먹고 화장실에서 잠깐 운기조식을 했다.

덕분에 체력과 집중력이 풀충전되어 있었다.

“괴물 같은 녀석. 네가 돕겠다면 말리지는 않을게. 그런데 아까 못한 말이 있다.”

“뭔데요?”

“아까 야식 먹을 때 말이야. 너한테 콜하려고 했는데 동석 선배가 하지 말라고 했어…….”

“…….”

“어쩔 수 없었다는 거 알지?”

“그 정도야 말하지 않아도 알죠. 선배. 저도 할 말이 있는데.”

“말해봐.”

“낮에 이동훈 교수님한테 뉴튜브 촬영해도 된다고 허락 맡았거든요. 일하는 거 뉴튜브로 촬영해도 돼요?”

“교수님 허락받았으면 상관없지.”

“감사합니다.”

준후는 삼각대에 휴대폰을 올려놓고 동영상을 촬영했다.

자신의 얼굴이 잘 보이도록.

미남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준후의 새로운 채널 성장 전략이었다.

동영상 촬영을 하며 준후는 현진을 도왔다.

업무의 대부분은 차트 입력이었다.

입원 환자의 경과기록지, 입퇴원 기록지 작성, 환자의 처방 지시 등등.

입원 환자가 많았으므로 그 양 또한 어마어마했다.

준후는 일머리가 좋았기에 현진의 일을 빠르게 거들었다.

“서준후, 너 일 좀 친다?”

준후를 지켜보던 현진이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준후의 차트 입력 속도와 정확도가 자신과 비슷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본랜 인턴은 차트 입력에 서툴러야 정상이었다.

레지던트의 검사나 처치 오더를 확인하고 그것을 실시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준후는 아니었다.

벌써 차트 입력이 수준급이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응급의학과 근무할 때 차트 입력 많이 배웠어요. 성민 선배라고 있는데 그 선배가 시키는 걸 하다 보니까 자연히 늘더라고요.”

준후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독이 약이 된다는 말은 이런 때 쓰는 것이리라.

성민은 준후를 괴롭힌다고 이것저것 일을 떠넘겼는데.

그 일을 통해 준후의 일솜씨가 더욱 야무지게 되었으니까.

준후가 일을 거들면서 현진의 업무는 고작 한 시간에 모두 끝났다.

* * *

드디어 기다리던 시간이 왔구나.

준후는 책상 위에 엎어져 자고 있는 현진을 바라보았다.

할 일도 없고.

응급실 콜도 없으니 솔솔 잠이 오겠지.

아마 두세 시간은 쥐 죽은 듯 자지 않을까.

당직실의 고요함을 음미하던 준후는 무림의 옛 기억을 더듬었다.

지금부터 양손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무공을 익혀볼 계획이었다.

무공의 이름은 양수호박 기술.

적일도를 물리치기 위해 은거기인을 찾던 도중.

한 괴짜 은거기인에게 전수받은 무공이었다.

-하루는 내가 심심해서 만든 무공인데 자네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겠어.

-…….

-아주 간단하면서 재미있는 무공이지. 자네도 알게 되면 밤을 새우게 될걸?

-이 무공의 효과는 무엇입니까?

-제대로 익히면 양손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지. 한 번 따라 해보게.

기인이 전해준 무공 수련법은 다음과 같았다.

일단 훈련하고 싶은 손을 정해라.

그다음 훈련하고 싶은 손으로 훈련이 된 손을 가위바위보로 이겨라.

놀랍게도 이 단순한 수련법이 양수호박 기술의 정수였다.

당시 이 무공을 전수받았을 때.

준후는 어이가 없었다.

뭐 이딴 걸 무공이랍시고 가르쳐주냐고 기인에게 따질 뻔했다.

하지만 현대의학을 배운 지금은 생각이 꽤 바뀌었다.

양수호박기술의 수련법은 일종의 뇌를 자극하고 뇌신경을 활성화한다는 과학적인(?) 방법이었다.

일단 해볼까.

준후는 능숙한 오른손으로 바위를 내고 왼손으로는 보자기를 냈다.

이게 무공 수련이냐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단순한 수련이었다.

하지만 속도를 조금 올리니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뇌신경이 뒤죽박죽으로 바뀌면서 손도 엉키기 시작했다.

오른손이 보자기인데 왼손은 주먹을 내는가 하면.

오른손이 보자기인데 왼손도 보자지를 내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나중에는 오른손도 같이 꼬이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우스꽝스럽고 쉬워 보이지만 따라 해보면 누구나 알 것이다.

속도를 높여서 안 쓰는 손으로 자주 쓰는 손을 가위바위보로 이기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준후는 자신의 엉성한 셀프 가위바위보로 고통받았지만 이를 악물고 견뎌냈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농담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 자신과의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준후는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왼손과 오른손으로 가위바위보를 펼쳤다.

하루라도 빨리 왼손을 능숙하게 쓰고 싶어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외과의가 되기 위하여.

한편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자던 현진이 잠에서 깨었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벽을 바라보다가 당직실을 훑었다.

“……!”

준후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현진은 졸린 기운이 확 달아났다.

준후가 몹시도 진지한 표정으로 양손으로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쩐지 일을 너무 잘한다 싶더라.

과도한 업무로 결국 정신이 나가버렸구나.

준후의 멘탈이 심히 걱정되었으므로 현진은 다급하게 준후에게 다가가 어깨를 흔들었다.

“서준후, 인마. 정신 똑바로 안 차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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