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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67화 (67/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67화

제11장 수련(5)

이 의심스러운 걸 예전에는 왜 그냥 지나쳤을까.

조금만 더 집중하고.

조금만 더 의심했으면 되는 건데.

준후의 이맛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소아 병동 스테이션.

준후는 건우의 응급실 기록지를 살피고 있었는데 다시 보니 내용이 가관이었다.

[밤 9시 응급실을 통해 내원.

환자는 혼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짐.

넘어지면서 책상 모서리에 충돌하였고 CT 촬영 결과 전방 십자인대 파열 진단.]

얼핏 보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내용이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야외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다쳤으면 모를까.

한참 졸린 시간에 집에서 혼자 놀다가 무릎을 다쳤다?

그것도 전방십자인대가 파열될 정도로?

결코 상식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건우는 분명 놀다가 다친 게 아닐 것이다.

보호자가 학대하는 과정에서 넘어져 다쳤을 것이다.

-아이가 혼자 놀다가 다쳤어요.

아동 학대를 저지르는 부모가 입버릇처럼 내뱉는 말이었다.

이걸 미리 알아차리고 의심을 했어야 했는데…….

실책이 뼈아팠지만 그래도 깨달음이 늦지 않아 다행이라고 준후는 생각했다.

다른 스태프들은 아동 학대를 까맣게 모르는 상황.

준후라도 나서서 건우의 고통을 달래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히 뜻깊은 일이 될 것이다.

아직은 안 되겠지?

준후의 시선이 건우가 지내는 병실에 머물렀다.

당장에라도 건우의 몸을 살펴 학대의 증거를 잡고 싶었다.

몸이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조급해선 안 됐다.

보호자가 건우의 곁을 비웠을 때.

그때를 노려야 했다.

그래야 보호자의 저항을 막을 수 있고 건우도 좀 더 편하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으리라.

“선생님.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준후는 곁에서 업무 중인 소라 간호사에게 물었다.

“네. 말씀하세요.”

“건우 말인데요. 아버지도 병동에 오나요?”

“당연히 오시죠. 근데 빠르면 밤 9시 늦으면 11시쯤 오세요.”

“무슨 일을 하시는지는 모르고요?”

“그건 저도 들은 게 없어서…….”

소라가 말을 계속했다.

“건우 아버지도 건우를 많이 아끼나 봐요. 일 끝나고 꼬박꼬박 병실에 오는 걸 보면.”

“그렇군요.”

준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건우나 건우 아버지에게 직접 들어야겠지만 아버지는 학대와 관련이 없는 듯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건우가 기댈 수 있는 곳이 존재해서.

“근데 선생님. 어제부터 건우한테 관심이 많으시네요?”

소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고 준후는 주변을 훑은 후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 건우가 아동 학대를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에이, 설마. 어머니 분 성격이 얼마나 좋으신데요. 잘 웃으시고 스태프들한테 인사도 잘해주시고.”

“겉모습만 봐서는 모르는 게 사람이죠.”

“그래도 너무 의심하시는 것 같은데…….”

“물론 저도 제 생각이 틀리길 바라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건 소라 선생님하고 저만의 비밀로 간직하죠.”

준후는 비밀 준수와 함께 소라에게 몇 가지 부탁을 했다.

여유가 있으면 건우와 건우 어머니의 병실을 찾아가 둘의 행동을 관찰해 달라.

건우 아버지의 연락처를 알려 달라.

또 보호자가 자리를 비우면 그 즉신 자신에게 연락을 달라는 것이었다.

준후는 건우의 어머니가 달아날 구멍을 원천 봉쇄해 버렸다.

이러면 몰이가 끝나는 대로 사냥에 들어갈 수 있겠지.

무림에서 갈고 닦은 치밀함은 현대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저벅. 저벅.

소아 병동 스테이션을 떠나 도착한 정형외과 병동.

준후는 복도에서 우현을 마주쳤다.

“서준후.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왜? 난 너랑 할 말 없는데. 병동 일로 바빠.”

준후의 대답이 퉁명스러웠다.

악독한 승범의 패거리 중 한 명인 우현이 아닌가. 준후는 우현을 곱게 보고 싶어도 곱게 볼 수가 없었다.

“까칠하기는. 사실 별 건 아니고…….”

우현이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오늘 오전에 수술 있는데 그거 네가 들어가 주면 안 되냐?”

“…….”

“디스크 수술이고 그렇게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닌데…….”

정형외과 수술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굴던 우현이 어제 오후부터 급격하게 약한 모습을 보였다.

수술 스크럽을 피하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얼씨구. 천하의 우현이 왜 이렇게 약해지셨나? 정형외과 수술 우습게 보더니.”

“몰라. 그냥 나랑 안 맞는 것 같아.”

“안 맞는 게 아니라 힘든 건 아니고?”

준후의 도발에 우현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화는 내지 않았다.

부탁하는 사람도 우현이었고.

아쉬운 사람도 우현이었다.

그러니 준후가 뭐라도 말하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너 외과의가 목표라며. 수술 많이 들어가면 좋은 거 아니야? 그냥 해줘라.”

준후가 수술 스케줄을 바꿔주지 않으면 얄미운 우현이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우현의 고통은 준후의 기쁨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수술 스케줄을 바꿔준다면 준후는 스크럽을 통해 또 다른 수술 경험을 쌓게 될 것이다.

둘 중 어느 기쁨이 더 클까.

사실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그럼 형님,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이라고 해봐.”

“야, 친구끼리 무슨 형님 타령이냐? 졸라 닭살 돋네.”

우현이 질색을 했다.

“너랑 내가 언제부터 친했다고 부탁이지? 그리고 수술방에 들어가라는 건 나보고 대신 고생하라는 뜻이잖아.”

“…….”

“난 최소한 이 정도 대가는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싫으면 말고.”

“으…….”

“할 말 다했으면 난 간다.”

준후가 쌩하니 우현을 지나치는데 뒤에서 우현의 목소리가 준후를 붙잡았다.

“혀…… 형님.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뒤를 돌아보니 우현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을 마쳤다.

자존심 대신 실리를 택한 것이다.

의대 시절 내내 승범을 믿고 거만하던 우현이 스스로 콧대를 꺾는 모습은 그 자체로 깨소금 맛이었다.

저벅. 저벅.

준후는 발길을 돌려 우현에게 다가갔다. 우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운을 뗐다.

“오냐. 아우야. 형님이 대신 고생 좀 하마.”

준후는 곧바로 수술실로 발길을 돌렸다.

서로 믿고 기대야 할 짝턴임에도 시비만 걸었던 우현을 혼내주고.

또 수술 경험까지 쌓고.

이게 바로 일석이조였다.

* * *

그 날 오전 수술방.

준후는 수술 스크럽을 서고 있었다.

수술 스태프는 다음과 같았다.

펠로우 1년 차 병구.

레지던트 3년 차 원석.

그리고 소독 간호사와 준후.

수술은 요추 추간판 제거술로 흔히 디스크 수술이라고 알려진 수술이었다.

환자의 상태와 증상을 고려해 수술은 레이저와 내시경이 아닌 일반 절제술로 진행되었다.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1) 병변이 있는 부위의 피부 절개.

2) 후궁이라고 불리는, 척추 뒤쪽에 위치한 아치 모양의 뼈를 절제.

3) 돌출되어 있는 디스크를 제거 및 감압.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준후는 야무지게 어시스트를 했다.

절개창을 미동도 없이 견인하고.

적절한 타이밍에 거즈로 피를 닦아내고.

시야 확보를 위해 이리게이션(식염수 세척)을 하고 등등.

준후가 가진 능력에 비해 실제로 하는 처치의 난이도는 낮고 쉬웠다.

그래서 틈틈이 생각할 여유가 많았다.

-이 정도면 수술 없이 나 혼자 감당할 수 있겠는데?

수술을 지켜보면서 준후가 가장 많이 한 생각이었다.

척추 바깥으로 빠져나와 척추뼈에 압박을 받고 있는 디스크.

이 디스크를 준후는 내공으로 치료할 수 있을 듯했다.

실체화한 내공을 발산하면서 빠져나온 디스크를 원위치로 밀어주면 되지 않을까.

그러면 굳이 수술이라는 번거로운 절차가 필요 없을 것 같은데…….

가능성과 잠재력은 충분했으나.

이는 병원에서 펼치기 힘든 치료법이었다.

준후의 치료법은 타인이 보기에 야매(?)처럼 보일 확률이 농후했다.

또 다른 문제점도 있었다.

설령 치료법이 인정받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준후를 이상한 사람 취급할 확률이 높았다.

최악의 경우 연구 대상으로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해외로 의료 봉사를 하러 가게 됐을 때.

또는 군의관이 됐을 때.

그때가 되어서야 내공 디스크 치료술을 써먹을 수 있겠다고 준후는 생각했다.

“잘하고 있어. 지금처럼만 해.”

“…….”

“그런데 황색인대 조금만 더 제거하자. 감압이 더 필요해.”

“네. 선생님.”

펠로우 병구의 가르침에 따라 3년 차 원석이 집도를 하고 있었다.

현재 수술은 하이라이트를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후궁은 이미 절개했으며.

디스크와 맞닿은 황색 인대를 제거하고 있는 도중이었다.

준후는 어시스트를 하면서 이번에도 어김없이 상상 집도를 했다.

내가 집도의라면 어떤 식으로 수술을 진행할까.

적극적인 자세로 임했던 것이다.

“선생님. 여기 있습니다.”

수술을 지켜보던 준후가 원석에게 건넨 수술 도구는 바로 펀치였다.

주로 산부인과나 피부과에서 쓰는 집게인데 생체조직을 집을 때 많이 사용했다.

정형외과에서는 황색인대를 쥐고 뜯어낼 때 사용하기도 했다.

“어, 땡큐. 안 그래도 막 펀치가 필요하던 참이었는데.”

원석이 준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너는 수술 도구를 알아서 척척 건넨다? 어시스트 선 적도 별로 없으면서?”

“제가 눈치가 좀 빠른 편입니다.”

“보통 빠른 게 아닌데? 절간에서도 새우젓도 얻어먹겠어.”

원석은 준후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수술 스태프들은 사실 인턴에게 별 기대가 없었다.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키는 것만 잘해도 A턴이라고 치켜세우곤 했다.

하지만 준후는 평범한 인턴과 달랐다.

보통 수술 방에 들어온 인턴은 어리바리해서 수술 도구를 달라고 해도 제대로 못 건네는 경우가 많았다.

수술 도구의 숫자와 용도가 워낙 다양했으니까.

그런데 웬걸?

준후는 수술 도구를 요청하기도 전에 수술 도구를 건네는 놀라운 솜씨를 발휘했다.

마치 수술 어시스트를 많이 해본 베테랑처럼 능숙하게.

“선배님에 비하면 아직 멀었죠. 썩션하겠습니다.”

원석이 황색인대를 떼어내거나 조각내면 준후는 이를 썩션기로 흡입했다.

두 사람의 호흡은 훌륭했다.

수술 도구가 엉키거나 부딪쳐 서로를 방해하는 일이 없었다.

물론 여기에도 준후의 세심한 썩션 컨트롤이 한몫했다.

준후가 원석의 펀치가 움직이는 동선을 예측하고 미리 피해 버렸으니까.

“자. 이제 터진 디스크 보이지? 원석아 디스크 제거하고 감압하자.”

“네. 선생님.”

병구의 지시를 따라 원석이 돌출된 디스크를 제거해 나갔다.

원석의 손놀림은 단단했다.

손 떨림이 없었고 처치도 과감했다.

당연히 어제 본 동훈만큼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배울 것이 있었다.

오늘 수술도 많은 걸 익히고 무난히 끝나는구나.

그럼 이제 남은 숙제는 건우가 학대당한 증거를 찾는 것뿐인가.

준후가 다음 스케줄을 생각하는 사이.

수술의 피날레가 찾아왔다.

원석이 돌출된 디스크를 깔끔히 제거하고 수술 부위에 지혈제를 뿌렸다.

펠로우 병구와 함께 혹시 건드린 신경이나 혈관이 없는지를 꼼꼼히 평가했다.

그렇게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나는 듯했지만 뜻밖의 비보가 날아들었다.

“선생님. 환자분 바이탈이 흔들리고 있는데요? 확인 좀 부탁드릴게요.”

마취의의 노티가 심상치 않았다.

환자의 체온과 호흡수는 정상 범위였으나.

혈압이 90/60mmHg.

맥박이 130.

98퍼센트였던 산소포화도는 삽시간에 93퍼센트까지 내려앉았음을 알려왔다.

순간 찬물을 얻어맞은 것처럼 싸늘해지는 수술방.

우왕좌왕하는 스태프들.

예기치 못한 악재에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준후였다.

준후는 비정상적인 리듬으로 변한 심전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선생님. 당장 처치가 필요합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

“…….”

준후의 경고에도 스태프들은 단체로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 너무 뜻밖의 상황이 벌어지니 사고가 한순간 마비된 것이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패닉이라니…….

그렇다면 특단의 대책을 쓰는 수밖에…….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어주겠어.

준후는 목소리에 내공을 담아 사자후의 수법을 펼쳤다.

“다들 정신 차리세요! 환자에게 처치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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