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68화
제12장 미련(1)
“선생님. 당장 처치가 필요합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
“다들 정신 차리세요! 환자에게 처치가 필요합니다!”
착각인지 몰라도 호랑이가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였다.
수술방을 뒤흔드는 천둥 같은 목소리였다.
준후의 우렁찬 일갈에 병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상황에 압도당했던 머리가 준후의 목소리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지고 있는 것도 느꼈다.
집 나간 의식이 돌아온 것이다.
이 녀석. 어렸을 때 웅변이라도 배웠던 건가?
울림이 장난이 아닌데?
준후 덕분에 이성의 끈을 부여잡은 사람은 병구뿐만이 아니었다.
원석도 방금 막 잠에 깬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준후 말이 맞아. 일단 할 수 있는 처치부터 하자고.”
“일단 승압제(혈압을 높이는 약물)부터 사용할까요?”
“아니. 무턱대고 승압제를 썼다간 부작용이 더 커.”
병구가 고개를 휘휘 저으며 말을 이었다.
“미도드린(혈관 수축제)만 1앰플 IV 믹스해 줘 봐.”
원석에게 지시를 내리고 병구는 수술 부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저혈압에 맥박 증가.
이는 출혈이 발생했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신호였다.
하……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단 말이지.
문제가 될 게 없었는데.
병구의 이마에 지렁이 주름이 생겨났다.
병구는 원석의 수술을 하나부터 열까지 지켜보았다.
맹세컨대 단 한 번도 눈을 뗀 적이 없었고 단 한 번도 다른 곳에 정신을 판 적이 없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런데 도대체 어디서!
출혈이 발생했단 말인가.
수술 부위에는 명확하게 출혈이 없었으므로.
병구는 수술 부위 주변까지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출혈 장소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실로 답답한 상황이었다.
추간판 절제술 도중.
이런 기이한 출혈을 경험한 적은 난생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선생님. 환자 바이탈은 어떻습니까?”
병구의 시선이 마취의에게 머물렀다.
“더 떨어지지는 않고 현상 유지 중입니다. 특이사항 있으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네. 부탁드릴게요.”
“이제는 어떻게 할까요?”
원석의 질문에 병구는 쉬이 답을 하지 못했다.
병구도 그게 궁금했으니까.
“일단 출혈이 발생한 건 확실한데 그 위치를 모르겠단 말이지.”
“…….”
“일반적인 케이스가 아니라서 생각을 더 해봐야 할 것 같다.”
병구는 환자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읽은 논문들을.
머릿속에 저장해 둔 논문들을 꼼꼼하게 뒤졌다.
스태프들이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펠로우 2년 차인 병구밖에 없었다.
병구도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고 펠로우 수련 중이지만 그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병구는 이번 수술의 선장이었다.
스태프들 잘 이끌어 환자를 무사하고 건강하게 회복실로 보낼 막중한 책임을 지녔다.
“…….”
“…….”
수술방은 고요하고 적막했다.
모든 처치가 중지되었으므로 스태프들은 손을 놓고 환자와 병구를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답답한 상황은 좀처럼 나아질 줄 몰랐다.
“선생님! C.A(Cardiac Arrest, 심정지)입니다! CPR 부탁드립니다.”
마취의가 다급하게 외쳤다.
삐이이이.
삐이이이.
환자 감시 장치에서 위급한 알림도 들려왔다.
병구가 심전도를 모니터를 확인하자 심전도 그래프가 완전히 바닥에 누워 있었다.
신이시여.
왜 제게 이런 시련을…….
눈을 뜨고 있음에도 병구는 모든 사물이 어둡게만 보였다.
“어…… 어떻게 할까요? 선생님. 환자가 누워 있어서 CPR을 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원석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환자는 디스크 수술을 받는 도중이라 복와위(엎드려 누운 자세) 상태였다.
그런데 흉부 압박을 하려면 환자가 천장을 보고 눕도록 체위를 변경해야 했다.
문제는 체위 변경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환자 허리에 절개창이 있지 않은가.
절개창이 수술대 바닥에 닿는다면 2차 감염의 위험이 컸다.
흉부 압박을 하는 도중 2차 부상의 염려도 있었다.
“일단 에피네프린 1앰플하고 리도카인 1앰플 IV(정맥)로 주고 제세동기 준비해.”
병구는 흔들리는 멘탈을 부여잡으며 대답했다.
악몽 같은 사건이 잇달아 벌어지고 있건만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디스크 수술 중에 환자가 심정지로 사망한다고?
하늘이 두 쪽 난다고 해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흉부압박은 어떻게 할까요?”
“별수 있나? 준후랑 같이 환자 앙와위(천장을 보고 똑바로 누운 자세)로 돌려. 체위 변경 다음이 흉부압박이다.”
“오염이나 추가 부상은…….”
“심장 리듬을 회복하는 게 최우선이야. 심장이 멎었는데 허리가 정상이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병구가 속사포로 말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지금까지 얌전하게 있던 준후가 병구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선생님. 이 환자, CPR 제가 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답답해 죽겠는데 속 터지는 소리할래? 누가 CPR 하지 말라고 했어? 체위 변경부터 하라고!”
“아뇨. 체위 변경 없이 CPR을 해보고 싶습니다.”
준후의 눈빛은 침착했고 목소리는 가라앉았다.
“Prone CPR을 해보겠습니다. 전 할 수 있어요.”
* * *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준후는 퍼뜩 Prone CPR을 떠올렸다.
Prone CPR.
이것은 복와위(엎드려 누운 자세)인 환자에게 실시하는 흉부압박법이었다.
그러니까 Prone CPR을 사용하면 굳이 환자의 체위를 바꿀 필요가 없었다.
체위 변경에 따른 오염이나 추가 부상의 염려도 없었다.
준후가 Prone CPR을 알게 된 시기는 생각보다 오래전이었다.
무려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CPR 대회를 준비하면서 CPR에 대한 호기심이 커졌는데.
그때 우연히 Prone CPR을 접했던 것이다.
“Prone CPR을 할 수 있다고? 네가?”
병구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보통 Prone CPR을 할 케이스가 없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도, 영화에서도, 드라마에서도 환자를 엎드려 눕힌 채 CPR을 할 일이 얼마나 많겠는가.
“네.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실시하겠습니다.”
준후가 속사포로 말을 이었다.
“응급의학과 근무할 때 해본 적이 있습니다. 공사장에서 추락한 인부에게 해봤습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준후는 Prone CPR을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처치 지연으로 환자가 사망할 것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Prone CPR이 비록 처음이지만 준후는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하…… 인턴한테 Prone CPR을 맡겨야 할 줄이야.”
“…….”
“원구, Prone CPR 해봤어?”
“아니요. 못 해봤습니다.”
“나도 안 해봤는데…… X발, 이러면 이판사판 공사판이다. 서준후, 너만 믿는다.”
“…….”
“믿는 만큼 잘해라. 네 손에 환자의 목숨이 달렸어.”
“네. 선생님. 결코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허락이 떨어진 후 준후는 환자의 우측 옆구리 방향으로 이동했다.
깍지 낀 두 손을 환자의 우측 흉추 7-10번 사이에 올려놓았다.
수직선상으로 따지면 이 자리가 바로 심장 위였다.
처음이라고 긴장할 필요 없어.
원리 자체는 일반 흉부 압박과 다를 바 없어.
무림에서 갈고 닦은 피지컬을 아낌없이 쏟아붓는 거야.
환자를 살리고.
나를 믿어준 사람들에게 보답하자.
또다시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모습을 지켜봐서는 안 되잖아?
그러려고 의사가 된 건 아니잖아?
각오를 다진 준후의 눈빛이 총명함으로 빛났다.
퍽! 퍽! 퍽!
준후의 손바닥이 환자의 우측 견갑골 부근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환자의 몸이 펄떡펄떡 뛰어올랐다.
평소보다 강하게!
좀 더 강하게!
준후는 두 손에 힘을 주어 압박의 강도를 높였다.
[일반 흉부압박은 늑골늑연골관절 부의 손상을 쉽게 가져오기 때문에 압박의 강도를 높이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Prone CPR처럼 흉곽의 후면에서 압박하면 더 강한 힘으로 압박하여도 흉곽의 손상 가능성이 낮아서 압박력을 증가시킬 수 있다.]
기왕 Prone CPR을 하기로 했으면 그 장점을 최대한으로 살려야 하는 것 아닌가.
준후는 평소보다 강도 높은 흉부압박을 실시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준후는 흉부압박을 하면서 내공까지 함께 실어 보냈다.
쉽게 말해서 흉부압박과 제세동기의 역할을 동시에 실시했던 것이다.
이는 무림을 경험한 준후만이 해낼 수 있는 하이브리드 CPR이었다.
퍽! 퍽! 퍽!
준후는 초당 2회의 흉부압박을 시도하면서 실체화한 내공을 환자의 심장에 흘려보내 충격을 주었다.
두 가지 처치를 동시에 하는 건 준후에게도 벅찼다.
하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주저앉고 싶지도 않았다.
무림에서야 방법을 몰라서 사람을 구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현대 의학 지식으로 무장한 준후는 사람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안다면 행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고된 길이라도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서준후, 나와! 환자 살짝만 옆으로 돌려서 고정대로 고정해.”
“네. 선배.”
준후가 환자를 비스듬히 눕히고 고정시키자 원석이 제세동을 준비했다.
스으으윽.
스으으윽.
원석은 젤을 바른 제세동기의 패들을 각각 환자의 오른쪽 빗장뼈 아래와 좌측 가슴 아래에 대고 제세동을 실시했다.
“100J 클리어!”
전기 충격이 발생하자 환자의 몸이 바르르 떨리며 들썩거렸다.
“미안하다. 준후야. 교대해 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Prone CPR은 자신이 없어서.”
원석이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이 하는 게 낫죠.”
“그렇게 말해주면 고맙고. 100J 차지 중.”
준후는 환자를 다시 엎드려 눕히고 Prone CPR을 이어나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준후는 금방 Prone CPR에 익숙해졌다.
흉부압박을 하며 내공을 발산하는 일도 자연스러워졌다.
위기를 극복하면서 한층 더 강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림에서 악인을 베어낼 때마다 강해졌던 것과 비교하면 정반대의 상황.
현대의 준후는 사람을 살릴 때마다 강해지고 있었다.
확실히 효과가 있어.
회복의 희망이 있어.
준후는 흉부 압박을 하면서 환자 감시 장치를 살피는 여유까지 보였다.
혈압과 맥박이 차차 정상 범위를 향해 상승하고 있었다.
바닥에 누웠던 심전도 또한 조금씩 기운을 차렸다. 위·아래로 움직이며 리듬감을 되찾고 있었다.
그렇게 CPR을 실시한 지 7분째.
저승에 가까웠던 환자가 이승으로 돌아왔다.
환자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바이탈 사인도 문제가 없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던 수술실 분위기가 조금이나마 느슨해졌다.
환자를 회복시켰다는 뿌듯함에 준후는 날아갈 듯이 기뻤다.
다른 보상은 필요 없었다.
돈도, 명예도, 권력도.
죽어가는 환자를 무기력하게 지켜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
무언가를 할 수 있었다는 것.
자신의 손으로 환자를 살렸다는 것.
그 자체가 준후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상이었다.
준후는 그저 이 순간이 행복했다.
“휴우. 죽다 살았네. 진짜.”
병구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서준후.”
“네. 선생님.”
“이번 심폐소생술은 네 공이 크다. Prone CPR을 안 했으면 CPR이 훨씬 늦어졌을 거야. 환자의 회복도 장담 못 했겠지.”
병구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설령 CPR을 했더라도 오염이나 추가 부상이 있었을 확률이 컸고.”
“아닙니다. 저는 그저 제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그 일이 평범한 인턴은 할 수 없었던 일이라는 게 핵심이지.”
“펠로우 선생님 말이 맞아. 준후 네가 진짜 고생했다. 흉부압박도 교대 없이 혼자서 몇 분 동안 하고.”
“고생했어요. 서 선생님.”
주변에서 쏟아지는 칭찬에 준후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칭찬은 자주 들어도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준후는 동료들의 시선을 피하다가 문득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르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어쩌면 본 게임은 지금부터였다.
“선생님. 이제 C.A(Cardiac Arrest, 심정지)가 발생한 이유를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
“CPR은 응급처치일 뿐 근본적인 치료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거라면 걱정 붙들어 매. 지금부터 제대로 설명해 줄 테니까.”
병구가 씽긋 눈으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