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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69화 (69/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69화

제12장 미련(2)

수술이 막바지로 접어들면서 집도의가 바뀌었다.

추간판 절제술을 집도하던(교육을 받던)원석이 제1보조가 되었고.

제1보조를 맡던 펠로우 병구가 심정지를 일으킨 출혈 부위를 봉합하는 중이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위기가 한 차례 왔지만.

수술의 해피엔딩이 코앞이었다.

확실히 인체는 신비하단 말이지.

준후는 봉합 중인 수술 부위를 내려다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뜻밖의 출혈 부위는 바로 총장골동맥 부근이었다.

총장골동맥.

이는 제4번 요추의 앞에서 좌우로 갈라지는 거대한 동맥인데 수술을 펼치던 부위와는 거리가 꽤 멀었다.

허리에 낸 절개창으로 결코 볼 수 없는 위치에 존재했다.

그러니 다들 출혈 사실에 의아해하고 당황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논문을 읽은 적이 있다. 추간판 절제술을 하는 도중 총장골동맥에서 종종 블리딩(출혈)이 발생한다는 논문을.

-…….

-육안상으로 블리딩이 안 보이니까 이번 케이스가 딱 그 케이스 일 거야. 심한 출혈 때문에 심정지가 발생했을 거고.

-…….

-혹시 모르니까 준후하고 원석이하고 같이 CT 찍고 와.

-네. 선생님.

병구의 오더대로 CT를 촬영하고 복귀하자 과연 총장골동맥에 출혈이 존재했다.

다행히도 급성 심장마비에 원인을 정확하게 발견한 것이다.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병구가 집도의가 되어 총장골동맥이 위치한 부위를 절개하고 터진 혈관을 봉합하기 시작했다.

-선생님. 저 질문이 있습니다.

-말해봐.

-수술 중이던 요추 부위와 총장골 동맥 사이에 꽤 거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멀리 떨어진 혈관에서 출혈이 발생했죠?

-자세한 건 나도 몰라. 추간판 절제술에서 발생한 모종의 자극이 혈관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추측만하는 거지.

준후의 질문에 대한 병구의 대답은 명쾌하지 않았다.

하지만 병구의 의학지식이 모자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학계에서도 그 이유를 딱 꼬집어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인체의 모든 조직, 세포, 혈관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하게 서로 영향을 주고 영향을 끼친다.]

이 사실을 준후는 오늘 수술을 통해 깨달았다.

그렇다면 말이다.

무림의 주화입마도 같은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주화입마란 심법을 운영하는 도중.

기혈과 기맥이 뒤틀려 신체가 망가지는 질환이었다.

주화입마에 걸린 무인은 피를 토하며 극심한 고통에 시달린다.

뿐만 아니라 단전이 파괴되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존재했다.

그런데 말이다.

주화입마에 들어서는 순간.

내공을 운영 중이던 혈맥의 위치를 알 수 있다면.

그 혈맥과 주변 혈맥까지 통제해서 주화입마를 수습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 수술을 보면 충분히 그것도 가능해 보였다.

예컨대 A1라는 지점이 아프다고 해서 꼭 A1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A1에서 발생한 문제가 정작 A3으로 가서 더 큰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다.

허리 수술 도중.

정작 허리 아래에 위치한 총장골동맥에 출혈이 생긴 것처럼 말이다.

무림의 지식을 현대에 적용하던 준후는 처음으로 현대 지식을 무림에 적용해 보았다.

그리고 그 응용은 꽤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무림 귀환이 불가능해서 이 가설을 시험해 볼 수 없다는 점이랄까.

가설을 시험하기 위해.

일부러 주화입마에 걸릴 수도 없고 말이다.

기회만 되면 주화입마도 꼭 치료해 보고 싶은데.

주화입마로 폐인이 되거나 사망하는 수많은 무인을 구하고 싶은데.

현대 의학을 배우면서 준후는 자주 아쉬움을 느꼈다.

이 값진 지식을 무림에서도 활용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수술 끝났습니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선생님.”

준후가 잡념에 빠진 사이, 수술은 별 탈 없이 종료되었다.

준후는 오늘 또 무언가를 배웠고.

무언가를 또 익히며 한 단계 성장했다.

* * *

휴게실.

준후는 병구, 원석과 함께 소파에 앉아 캔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수술이 끝난 후.

정확히 말하면 환자를 살린 후 마시는 커피는 꿀맛이었다.

“근데 준후야.”

“네. 선배.”

“너 혹시 어렸을 때 웅변대회라도 나갔냐? 환자 바이탈 떨어졌을 때, 목소리가 장난 아니던데?”

원석이 준후의 목소리를 화제로 삼았다.

사자후의 수법을 썼던 게 인상 깊었던 모양이었다.

사자후는 목소리에 내공을 담는 수법으로 주로 적의 기선을 제압할 때 사용했다.

준후도 설마 수술방에서 사자후를 쓸 줄은 몰랐다.

“맞아. 맞아. 나도 귀청 떨어나가는 줄 알았지.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긴 했지만.”

병구가 맞장구를 쳤다.

“웅변을 배운 건 아니고 어렸을 때부터 목소리 크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

“흥분하면 목소리가 올라가더라고요.”

준후는 대충 둘러내며 화제를 돌렸다.

“근데 펠로우 선생님은 어느 과목 전공 중이세요?”

펠로우란 전문의 자격증을 취득한 후 세부 전공을 배우는 의사를 일컫는 말이었다.

“수부외과.”

“힘든 전공을 택하셨네요?”

“힘든 만큼 보람도 있으니까. 친척 중에 공장에서 일하다가 손이 절단된 어르신이 계시거든.”

병구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순간 휴게실의 분위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수부외과라…….

준후는 수부외과에 살짝 마음이 끌렸다.

수부외과는 절단된 신체 부위를 접합하는 정형외과의 세부 전공이었다.

수지접합 수술의 수술 시간은 최소 6시간에서 최대 이틀까지.

미세 신경과 근육과 혈관을 일일이 봉합해야 하므로 필연적으로 수술 시간이 길었다.

준후가 수부외과에 이끌린 이유는 무림에서의 경험이 한몫했다.

사파 무리와 결투를 벌이다 보면.

팔, 다리, 어깨 등이 잘려 나가는 일이 대수롭지 않게 벌어졌으니까.

한팔을 잃은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무사를 준후는 아직도 가슴에 담아두고 있었다.

무당파의 후기지수 장태수.

장태수가 현대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팔도 복구하고.

목숨도 잃지 않았을 텐데.

“왜 정형외과에 관심 있어? 우리야 대환영이지.”

병구가 준후에게 물었다.

“관심이 생기고 있는 중입니다. 여러모로 매력적인 과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준후, 너는 싹수가 보이던데? Prone CPR 할 때도 그렇고.”

“…….”

“외과 중에선 정형외과가 가장 전망이 좋으니까 깊게 고민해 봐. 너라면 다들 좋아할 거고.”

“말씀 감사합니다. 진지하게 생각해 볼게요.”

준후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어머니가 지주막하 출혈로 응급 수술을 받은 이후.

준후는 신경외과 전공을 1순위로 두고 있었는데 정형외과 근무를 하면서 그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성형외과.

흉부외과.

소화기 외과 등등.

다른 외과들을 경험하면 생각들은 또 바뀔 수도 있겠지.

세상에는 수술이 필요한 아픈 사람들이 많았고 준후는 그 모든 사람을 보듬고 싶었는데.

그러려면 몸이 여섯 개는 있어야 할 듯싶었다.

“그나저나 준후, 너 꽤 예의바르다? 난 네가 엄청 싸가지 없는 줄 알았어.”

원석의 말에 준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람?

“제가요? 전 딱히 선배들께 예의 없이 군 적이 없습니다만…….”

“그래? 동석이 말로는 아니라던데? 동석이가 네 욕 엄청하고 다녔어.”

“아…… 그럼 이해가 가네요.”

동석이라면 준후의 험담을 하고 다녀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준후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으니까.

그래도 후배 험담까지 하고 다니다니…….

동석운 준후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질이 나빴다.

빨리 건수를 잡아서 혼내줄 필요가 있었다.

“너 동석이한테 찍혔냐?”

“네. 그런 것 같습니다.”

“동석이 새끼, 성질이 X랄맞아서 감당하기 힘들 텐데. 미안하지만 걔는 나도 못 말려.”

“…….”

“그 덩치 큰 놈이 눈을 부라리면 나까지 오싹하다니까.”

“괜찮습니다. 제가 해결할 수 있어요.”

“네가 무슨 수로?”

“다 방법이 있죠. 대신…….”

준후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원석 선배는 저랑 동석 선배가 둘이 있을 때 자리만 피해주시면 돼요. 그럼 문제없습니다.”

“난 단 둘이 있는 게 제일 걱정되는데. 일단 접수해둘게.”

“네. 선배. 감사합니다.”

대화가 끝난 후.

다음 수술이 있는 원석과 병구가 휴게실을 떠났다.

준후 혼자 휴게실에 남았다.

병동 콜이 없는 걸 보면 좀 더 쉬어도 될 것 같았다.

쉬는 동안 준후는 영양제를 먹고 10분 정도 운기조식을 했다.

체력을 빵빵하게 회복하고 짤막하게 양수호박 기술을 익혔다.

양손으로 하는 가위바위보 말이다.

얼핏 바보 같아 보이는 수련법이지만 준후는 양수호박 기술을 진심으로 믿었다.

양수호박의 창시자 강백통.

강백통의 성격은 무림에 다시없을 괴짜였지만 그의 무공 실력 또한 무림에 다시없을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양손을 동시에 조종하면서.

좌뇌와 우뇌를 동시에 활성화한다는, 나름 현대적인 수련 근거(?)도 있었고 말이다.

이게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 더 힘들구나.

뇌가 꼬이고 손도 꼬이네.

수련을 하는 내내 준후의 이맛살은 펴질 줄을 몰랐다.

갈 길은 아직 까마득했다.

* * *

타다다닥.

준후는 분주한 발걸음으로 소아 병동을 향하고 있었다.

방금 막 소아 병동 스테이션에서 전화가 왔다. 건우의 어머니가 자리를 비웠다는 것이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건우의 어머니가 없어야 건우가 학대당한 사실을 밝혀낼 수 있을 테니까.

“와, 번개처럼 도착하셨네요? 혹시 뛰어오셨어요?”

콜을 했던 소라가 준후를 발견하고 눈을 깜빡거렸다.

“네. 급한 일이니까요. 보호자는 외출한 거죠?”

“네. 외투도 걸치고 백도 멨어요. 지나가는 길에 물어보니까 친구가 또 찾아왔다고 하더라고요.”

“같은 패턴이네요.”

준후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마음 같아서야 건우 어머니를 미행도 해보고 싶었지만 그보단 다른 일이 시급했다.

“선생님. 제가 부탁드린 거 있잖아요.”

“아…… 건우 병실 관찰해 달라고 하시던 거요?”

“네. 선생님이 보시기에 둘 사이가 어때 보였나요?”

“의심하면서 보니까 조금 수상하긴 하더라고요.”

소라가 볼을 긁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모자 사이라고 보기엔 둘 사이가 지나치게 데면데면하다.

대화도 없고.

같이 붙어 있지도 않고.

스태프들이 지나갈 때만 보호자가 건우를 챙겨주는 것 같다 등등.

“그렇다고 설마 학대까지 했을까 싶기는 한데…….”

“그거야 두고 볼 일이죠. 건우 아버지의 연락처는 받아주셨나요?”

“네. 여기요.”

소라가 포스트잇을 내밀었다.

준후는 포스트잇을 가운 주머니 안쪽에 단단히 붙여 두었다.

그리고 다른 가운 주머니에서 음료수를 꺼냈다. 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구입한 커피였다.

“받으세요.”

“와, 이거 저 주시는 거예요?”

“일종의 의뢰비죠. 저 때문에 고생하셨는데.”

“역시 준후 쌤 센스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잘 먹을게요.”

소라와 대화를 마치고 준후는 창고로 이동해 소아 환자복을 한 벌 챙겼다.

건우의 병실을 향해 거침없이 직진했다.

드르르륵.

창가 옆 자리에 위치한 침상에서.

건우는 쓸쓸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쩜 저 나이에 저런 표정이 나올 수 있을까.

준후는 벌써부터 마음이 미어졌다.

진실이 밝혀지면 당분간은 더 고통스럽겠지만 그 고통도 곧 물러갈 거란다.

이제 지옥에서 벗어나 부디 새로운 삶을 살길 바라마.

“건우야.”

준후의 부름에 건우가 준후를 응시했다.

텅 빈 눈동자는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는 듯했다.

“옷이 지저분한 것 같다. 선생님이랑 옷 갈아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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