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70화
제12장 미련(3)
“싫어요!”
건우의 목소리가 매몰찼다.
평소 무기력해 보이는 건우를 감안하면 예상하기 힘든 반응이었다.
준후는 조금 놀랐지만 찬찬히 건우의 표정을 뜯어보았다.
놀랍게도 건우가 표출한 감정은 거절, 혐오라기보다는 공포였다.
건우는 옷 벗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눈을 내리깐 채 파르르 몸을 떨고 있었다.
“건우야, 혹시 엄마가 옷 벗지 말라고 했니?”
“…….”
“여기 선생님하고 건우 둘밖에 없단다. 솔직하게 말해도 돼.”
“……네.”
건우의 대답은 짧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건우를 때린 것이 혹여나 탄로 날까 봐, 보호자는 건우가 옷을 못 벗도록 명령을 내렸으리라.
악독하고 교활한 인간.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 자기 자식에게 이런 악행을 저지른단 말인가.
준후는 보호자를 미워하는 한편.
건우에게 안타까움을 느꼈다.
‘계속 실랑이를 할 순 없는데.’
준후의 시선이 문득 벽시계를 향했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다.
보호자는 언제라도 돌아올 수 있었다.
보호자가 돌아와서 훼방을 놓기 전에 학대 증거를 확보해 둬야 했다.
“건우야, 정말 옷 안 갈아입을 거야? 꾀죄죄하고 냄새나는데?”
“네. 싫어요.”
“선생님이 만화를 안 봐서 그런데 혹시 선비도 잘 안 씻니?”
준후는 건우가 좋아하는 캐릭터 선비로 화제를 돌렸다.
“선비요?”
“그래. 선비.”
“씻는 건…… 못 봤어요.”
건우가 뭔가를 떠올리듯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럼 선비가 더럽고 냄새나니?”
“아니에요! 선비는 안 그래요!”
“그럼 선비는 만화에서 건우가 안 볼 때, 옷도 잘 갈아입고 잘 씻나 보네?”
준후는 차분하게 건우를 타일렀다.
사실 이런 번잡한 과정을 거칠 필요는 없었다.
혈을 제압해 건우를 기절시키고.
학대당한 신체 부위가 있다면 휴대폰으로 촬영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행동한다면 말이다.
자신과 보호자는 과연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싶었다.
무력이란 나와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또는 악인을 처단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닌가.
만약 건우에게 무력을 사용한다면 말이다.
준후는 본인이 혐오하는 사파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럼 건우도 선비처럼 잘 씻고 옷도 잘 갈아입어야겠지? 선생님 말이 맞지?”
“……네. 맞아요.”
선비를 들먹인 덕분일까.
건우가 준후의 말에 납득했다.
드르르륵!
건우의 환자복을 벗기려는데 병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혹시 보호자가 돌아왔나 싶어서 긴장했는데 옆 침상 환자였다.
“엄마한테는 선생님이 잘 말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준후는 건우의 환자복을 온전히 벗겼다.
학대 정황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허벅지 안쪽에 멍.
엉덩이에 멍.
팔뚝 안쪽에 이빨 자국 등등.
크고 작은 학대 정황들이 건우의 몸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어떤 것은 입원 전부터 있었던 상처로 보였고.
어떤 것은 입원 후에 생긴 상처처럼 보이기도 했다.
준후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억눌러야 했다.
자기 자식을 이렇게 괴롭혀 놓고 간호사들 앞에서는 그렇게 천사표인 척 위선을 떨었단 말이지?
가증스러운 인간 같으니라고.
“선생님. 옷 안 갈아입어요?”
준후가 가만히 있자 건우가 물었다.
“당연히 갈아입어야지. 그전에 건우야 네 몸 사진을 찍어야겠어.”
“사진이요? 왜요?”
“선생님이 악당을 물리쳐야 되는데 건우의 도움이 필요해.”
“악당이 누군데요?”
건우가 순수한 눈동자로 물었다.
본인을 학대한 어머니를 악당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준후는 마음이 더 아팠다.
-네가 맞을 짓을 하니까 엄마가 때렸지. 이건 다 건우 너 때문이야.
건우의 어머니는 분명 그렇게 가스라이팅을 해놓았으리라.
“지금은 말할 수 없어. 악당의 정체가 지금 밝혀지면 안 되거든. 선생님 도와줄 수 있지?”
“……네.”
“그리고 오늘 일은 비밀이다?”
준후는 휴대폰을 꺼내 건우의 신체 이곳저곳을 찍었다.
학대당한 부위는 많았으며 그 부위는 교묘하게 가려져 있었다.
지금 찍는 사진만으로도 충분한 증거가 될 수 있었다.
사진 촬영을 다 끝낸 후에야.
준후는 건우에게 새 환자복을 입혀주었다.
“선생님. 근데요.”
“그래. 말해보렴.”
“나중에 악당이 누구인지 꼭 알려주셔야 해요? 선비는 항상 악당을 혼내주고 벌을 줘요.”
“당연히 알려줘야지. 건우랑 선생님은 정의의 편이니까.”
준후의 말을 듣고서야 건우는 안심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왼쪽 깁스에 그려진 선비를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그런 건우의 모습이 준후는 애잔하기만 했다.
건우에게 선비는 단순히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아니리라.
보호자의 학대에서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었을 테지.
“선생님. 또 근데요.”
“왜?”
“옷 갈아입혀 주셔서 감사합니다.”
건우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왜일까.
이 작은 아이가 표시한 감사에 가슴이 울컥하는 것은.
눈가가 뿌옇게 번져나가는 것은.
“선생님이 더 고맙지. 푹 쉬고 있으렴.”
복받치는 감정을 다스리며 준후는 병실을 나왔다.
* * *
“와! 이 정도면 빼박인데요?”
소아 병동 간호사 소라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소라는 막 준후가 건넨 휴대폰 사진을 보고 있었다. 사진 속에는 건우가 당한 학대 정황이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전 건우 어머니가 그런 분인지 꿈에도 몰랐어요.”
“그럼 이제 꿈에서 깨신 거죠?”
“당연하죠. 서 쌤이 보호자를 의심할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는데 이런 증거가 있다면야…….”
“…….”
“근데 선생님은 이걸 어떻게 아셨어요? 간호사 선생님도, 의국 선생님도, 아무도 몰랐는데.”
“글쎄요. 눈썰미가 좋은 편이라고 해야겠네요.”
무림을 경험한 준후의 관찰력은 탁월했다.
준후는 평소에도 상대의 사소한 행동 하나 놓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악인들과 검을 겨눈 채 목숨을 건 전투를 펼치고, 또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관찰력이 필수였다.
상대방의 눈동자.
상대방의 다리 움직임.
상대방의 팔 움직임 등등.
이 중 하나라도 놓쳤다간 전투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거나 죽음에 내몰려야 했다.
극한의 상황에서 길러온 관찰력.
이는 준후가 가진 또 다른 무기이기도 했다.
수술이 아니라 아동 학대를 밝히는 데 관찰력을 사용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만.
“이쯤 되니까 건우한테 미안해지네요.”
소라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전 건우가 그냥 소심하고 내성적인 아이인 줄 알았어요. 이런 끔찍한 일을 당했을 거라고는…….”
“선생님은 잘못 없어요. 학대 사실을 교묘하게 숨긴 보호자가 죄인이죠.
“그러고 보니 아직도 병동에 복귀 안 했네요. 그 사람은.”
“뭐, 어디서 놀고 있겠죠. 건우에게 애정이 없으니까.”
준후는 차분하게 말을 계속했다.
“일단 이 정보는 스테이션에 있는 선생님들만 공유해 주세요. 의국에는 제가 말할 테니까.”
“당연히 그래야죠.”
“저는 병동 콜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수고하세요.”
준후는 스테이션을 벗어나며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총 세 곳에 연락을 취했다.
* * *
서울로 향하는 봉고차 안.
지숙은 불편한 표정으로 차창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설 도박장에서 고스톱을 치고 병원으로 돌아가는 길인데 오늘은 영 패가 붙지 않았다.
쓰리고에서 고박을 쓰는가 하면.
먹는 족족 쌌고.
반대로 피박을 면치 못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언니, 표정이 안 좋네?”
곁에 앉은 미연이 지숙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삽시간에 30만 원을 꼴아 박았는데 너 같으면 기분이 좋겠니?”
“저번에는 땄잖아. 도박이란 게 원래 딸 때도 있고 잃을 때도 있는 거지.”
“잃는 게 더 많으니까 하는 소리잖아.”
“그래도 나한테 성질내지는 마. 하우스 알려달라고 한 건 언니잖아.”
“다음엔 딴 데로 가자. 여기는 왠지 사기 치는 것 같아.”
“그런 피해 의식 있으면 아무 데도 못 갈 텐데?”
“피해 의식? 너 말조심해라.”
지숙은 미연을 노려보다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딸칵.
차창을 살짝 열고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근데 언니.”
“또 왜?”
“건우 입원한 거 아니었어? 이렇게 몇 시간씩 자리 비워도 돼?”
“다리만 부러진 새끼. 간병할 게 뭐 있다고. 그리고 어차피 의심할 사람도 없어.”
지숙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남편은 고급 레스토랑의 셰프인데 하루 종일 주방일로 바빴다.
집안일은 거의 신경도 못 썼다.
지숙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곤 했다.
애교 좀 떨어주고 저녁만 잘 차려주면 만사형통이기도 했다.
병동 간호사들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
꼬박꼬박 인사 잘하고.
커피 좀 갖다 주고.
건우랑 잘 지내는 척을 했더니 다들 지숙을 좋게 보고 있었다.
한 마디로 지숙의 이중생활은 완벽했다.
“공부를 그렇게 잘하면 뭐 해? 사람 보는 눈은 영 젬병인데.”
지숙은 병원 스태프들을 깔보며 깔깔깔 웃었다.
“그래도 좀 심한 거 아니야? 아이 혼자 병원에 두는 거.”
“심하긴 뭐가 심해? 어차피 내 새끼도 아닌데.”
건우는 지숙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남편과 전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그래서 지숙은 건우가 눈엣가시처럼 미웠다.
건우만 없으면 남편과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아쉬워하면서.
“네가 내 입장이었으면 안 그랬을 것 같아? 위선 떨지 마.”
“응. 난 안 그래. 절대로.”
“재수 없게 착한 척하기는. 말로는 뭔들 못하겠니.”
지숙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창밖으로 던졌다.
잠시 후 도착한 서울 중심가.
봉고차에서 내린 지숙은 가방에서 향수를 꺼내 온몸에 뿌렸다.
간호사에게 공납할 커피도 잔뜩 구입했다.
“선생님들. 오늘도 고생이 많으시네요. 약소하지만 이거라도…….”
지숙은 소아병동에 도착해서 간호사들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그런데 자신을 바라보는 간호사들의 눈빛이 싸늘했다.
평소와는 다른 반응이었다.
전에는 고맙다면서 넙죽넙죽 받아먹던 인간들이 대체 왜 이러지?
슬슬 면역이 생겼나?
“오늘 병동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다들 저기압이신 것 같은데.”
지숙은 간호사들을 위하는 척하며 말했다.
“큰일이 있었죠.”
“무슨 일인데요?”
“곧 알게 되실 거예요.”
소라 간호사가 쌀쌀맞게 대답했다.
어린 게 간호사라고 유세 떨기는.
지숙은 속으로 중얼거리곤 병실로 이동했다.
건우는 휴대폰으로 선비 애니메이션을 시청하고 있었다.
지숙이 돈을 날려서 열 받는 동안.
건우는 희희낙락거리며 애니메이션이나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지숙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휴대폰을 낚아챘다.
“이리 내!”
“어…… 엄마. 지금 중요한 순간인데…….”
“엄마가 너한테 말대답하라고 가르쳤니?”
지숙은 옆에 있는 환자와 보호자들이 듣지 못하도록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지숙의 험악한 표정에 건우는 금방 꼬리를 말았다.
“오늘은 휴대폰 압수니까 그런 줄 알아.”
“……네.”
지숙은 시무룩한 표정의 건우를 보고 나서야 속이 시원해졌다.
“혼자 있는 동안 별일 없었어?”
“네.”
“건우, 네가 맨날 만화나 보고 엄마 속을 썩이니까 이러는 거 알지? 앞으로 잘해.”
“……네.”
간호사들의 태도가 퉁명스러웠던 게 마음에 걸렸지만 지숙은 오늘 하루도 무사히 넘어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드르르륵.
문이 열리고 잘생긴 의사 한 명이 침상 쪽으로 다가왔다.
이름이 서준후라고 했던가.
“선생님. 안녕하세요.”
지숙은 눈웃음을 치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 못 하겠는데요?”
“네?”
“안녕 못 하겠다고요. 당신이 위선 떠는 게 역겨워서.”
이 인간이 뭐를 잘못 먹었나?
갑자기 찾아와서 왜 행패람?
“선생님. 말씀이 많이 심하시네요. 왜 괜한 사람한테 성질을 부리세요?”
“심한 건 당신이고. 건우야, 넌 잠깐 간호사 선생님들한테 가 있을래?”
“왜요?”
건우의 질문에 준후가 싸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까 선생님이 말했던 악당이 나타났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