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71화
제12장 미련(4)
“건우야. 빨리 나가 있으렴.”
준후의 말투가 심상치 않은 걸 느꼈을까.
건우가 겁먹은 표정으로 준후를 쳐다보다가 또 지숙을 쳐다보았다.
“괜찮아. 엄마는 저 선생님하고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건우 넌, 잠깐 간호사 선생님한테 가 있어.”
지숙이 허락이 떨어진 후에야 건우는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
“…….”
교차하는 준후와 지숙의 눈빛.
외나무다리에서 원수를 만난 것처럼 두 사람 사이의 긴장이 극도로 팽팽해졌다.
먼저 운을 뗀 것은 지숙이었다.
“선생님. 그렇게 안 봤는데 입이 험하시네요. 뭘 믿고 그런 식으로 막말을 하세요?”
지숙이 앙칼진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아직도 건우에게 저지른 학대가 완전 범죄라고 착각하는 모양이군.
가증스러운 인간 같으니라고.
“보호자 분이야말로 뭘 믿고 건우를 학대하셨죠? 하늘이 무섭지도 않습니까?”
“하…… 학대라니요! 그런 끔찍한 소리를…… 당장 사과하세요!”
“사과는 가해자가 피해자한테 하는 겁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긴말이 필요 없었기에 준후는 지숙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휴대폰 액정에는 준후가 촬영한 건우의 학대 흔적이 떠올라 있었다.
“……!”
증거 사진의 존재를 까맣게 몰랐던 지숙의 낯이 창백해졌다.
자, 그 요망한 혀를 어디까지 놀릴 수 있는지 한번 보자고.
준후가 지숙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이 사진에 대해 설명해 보시죠. 왜요? 말문이 탁 막힙니까?”
“그……. 그게…….”
“말 더듬지 말고 똑바로!”
준후의 호통에 지숙이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건우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자기 몸을 꼬집는 나쁜 버릇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 상처는 저랑 상관없어요.”
“당신은 아주 입만 열면 거짓말이군요.”
“궁색하게 들릴지 몰라도 진짜라고요! 당신이 건우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래요?”
“그럼 건우의 오른팔에 있던 치흔은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치흔이 뭔데요?”
“치아로 깨문 흔적이죠.”
“흥! 당연히 자기가 자기 이빨로 깨물었겠죠.”
당당하게 대답하는 지숙.
똑같은 수법으로 빠져나갈 생각인데 어림도 없지!
준후는 지숙을 비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성인의 치흔과 어린아이의 치흔은 명백하게 다릅니다. 여기 살점에 난 치흔이 어린아이의 치흔으로 보입니까?”
“…….”
“면적과 깊이를 보면 이건 명백하게 성인의 치흔이에요.”
준후는 법의학적 접근으로 지숙을 옭아맸다.
이는 준후가 의대 시절 해부학 교수 밑에서 배운 지식이었다.
놀랍게도 치아의 흔적을 분석해서 살인자를 체포한 케이스가 있었던 것이다.
“으…….”
준후가 전문지식으로 공격하자 지숙이 당황한 듯 눈만 깜빡거렸다.
본인의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기도 했다.
본인이 벼랑 끝에 몰렸다는 사실을 직감한 모양이었다.
“건우가 스스로를 꼬집었다고 했는데 그것도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는 거 아시죠?”
“그건 왜죠?”
“멍든 곳 중에는 건우 팔이 안 닿는 부분도 있습니다만…….”
“…….”
“자기 팔이 안 닿는 장소는 어떻게 꼬집습니까?”
건우가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그러자 지숙이 분하다는 표정으로 준후를 노려보았다.
사과를 해도 모자란 판국에.
반대로 적의를 불태우다니…….
이 보호자는 역시 정상이 아니었다. 인간의 탈을 쓴 짐승, 아니, 쓰레기였다.
“의사 선생님이라 말은 잘하시네요. 근데 전 모르는 일이에요.”
“끝까지 시치미를 떼시겠다?”
“진짜 모른다고요.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누가 건우를 괴롭혔을지도 모르는 거잖아요?”
“이봐요. 보호자분.”
준후가 혀를 차며 말했다.
“모르쇠로 일관한다고 일이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반드시 죗값을 치러야 해요.”
“당신이 뭔데요? 왜 경찰에 신고라도 할 건가요?”
“어이쿠! 바로 맞췄습니다.”
준후는 비아냥거리며 등 뒤를 슬쩍 쳐다보았다.
내공으로 증폭한 청각을 통해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던 것이다.
드르르륵.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경찰이었다.
준후가 아까 전화한 세 곳 중 한 곳이 바로 경찰서였으니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있었나 보네요. 의사에게는 학대 아동을 신고할 의무가 있다는 걸.”
준후는 팔짱을 낀 채 지숙을 도발했다.
“그 잘난 혀로 경찰도 속일 수 있는지 볼까요?”
* * *
“서준후, 신고 건은 잘 해결됐어?”
준후가 정형외과 당직실에 들어서자 1년 차 현진이 물었다.
“조금 번거롭긴 했지만 어느 정도 해결은 된 것 같아요.”
준후는 현진 옆 의자에 앉으며 대답했다.
“해결이 되면 된 거고 안 되면 안 된 거지. 어느 정도 해결된 건 또 뭐야?”
“아직 뒷일이 남았으니까요.”
준후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건우가 학대당했다는 사실을 밝혔다는 점만 놓고 보면 모든 게 완벽했다.
준후가 증거 사진과 증언을 덧붙이자 경찰은 준후의 말을 100퍼센트 신뢰했다.
경찰이 건우를 따로 불러 이야기도 했는데.
건우는 처음에는 학대 사실을 부인하다가 결국 울면서 사실을 털어놓기도 했다.
보호자는 조사를 받기 위해 경찰서로 끌려갔으며.
직장에서 일하던 건우의 아버지는 소식을 듣고 황급하게 병원으로 오는 중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다음으로 해결할 일들이 만만치 않았다.
건우 어머니에 대한 처벌 수위.
건우가 그동안 입은 마음의 상처 회복.
건우 아버지의 직장 문제 등등.
건우 가족이 해결해야 할 일은 산더미였다.
그래서일까.
준후는 가시밭길을 헤쳐가야 하는 부자가 안쓰러웠다.
“야, 솔직히 넌 할 수 있는 만큼 했지.”
현진이 준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를 포함해서 의국 선생님들이나 간호사 선생님들이 어디 그 보호자를 의심이나 한 번 했어?”
“…….”
“너니까 학대를 알아차리고 신고했지. 아이 아버지도 분명 너한테 고마워할 거야.”
“그렇겠죠? 머리로는 이해를 하는데 가슴은 그래도 불편하네요.”
준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좋은 일을 하고도 마음이 무거운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확실히 현실은 동화와 달랐다.
나쁜 놈이 벌을 받는다고 해서 마냥 해피엔딩이 펼쳐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여간 너도 대단하다. 인턴 일도 바쁠 텐데 학대까지 눈치채고.”
“제가 눈썰미는 좋은 편이죠.”
“그렇게 눈썰미가 좋은데 동석 선배한테는 왜 개겼어?”
현진이 혀를 차며 화제를 돌렸다.
“아까 잠깐 이야기 했는데 너 혼내주겠다고 벼르고 있더라.”
“벼르고 있다는 건 손찌검을 하겠다는 뜻이죠?”
“아마…… 그렇겠지?”
“그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당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동석 선배니까.”
다른 레지던트나 인턴과 달리 준후는 동석이 두렵지 않았다.
동석은 덩치와 힘을 내세워 주변 스태프들을 괴롭히고 있었는데.
동석의 덩치와 힘은 준후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다.
동석이 물리력을 행사하려는 순간.
준후는 그 이상의 앙갚음을 할 작정이었다.
동석이 다시는 자신과 다른 스태프들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말이다.
사실 준후야말로 동석을 손봐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에휴. 난 모르겠다. 네가 알아서 해.”
“네. 근데 우현이는 뭐 하고 있어요?”
준후는 짝턴인 우현을 언급했다.
어쩐지 오는 길에 우현을 못 봤던 것이다.
스크럽은 끝난 걸로 알고 있는데 말이다.
“수술 끝나고 한 20분 전에 올라왔나? 아직 병동 일을 마무리 못 했나 본데?
“우현이 일은 좀 어떻게 해요?”
“나쁘지는 않은데 너랑은 비교가 안 되지.”
현진이 모니터를 보면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어휴. 너 없는 사이에 밀린 오더 봐라. 역시 병동엔 네가 있어야 돼.”
“저 30분 있다가 스크럽 있는 거 아시죠?”
“알아. 다 아니까 그전에 밀린 오더 처리 좀 부탁한다?”
“후딱 해치우고 내려갈게요.”
준후는 그 즉시 당직실을 벗어났다.
* * *
왜 이렇게 얼굴이 안 보이나 했다.
준후는 병동 복도를 지나던 중 우현이 머물고 있는 병실을 발견했다.
우현은 한 환자 앞에서 뻘뻘 땀을 흘리고 있었다.
주사기를 들고 있는 폼을 보아하니 ABGA(동맥혈 채혈)를 못해서 애를 먹고 있는 듯했다.
ABGA는 새내기 인턴에게 자괴감을 선사하는 술기 중 하나였다.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필요하고.
실패가 늘어날수록 환자와 보호자의 눈치가 보이기 때문이다.
드르르륵.
준후는 곧바로 병실로 들어갔다.
“선 선생님. 채혈이 잘 안 되나요?”
환자와 보호자의 앞이었으므로 준후는 공손한 말투를 사용했다.
준후의 등장에 우현이 멋쩍게 웃었다.
“아. 네. 환자분 혈관이 워낙 얇아서…….”
우현의 말을 듣고 보니 환자의 혈관이 얇고 가늘긴 했다.
정교하게 채혈을 하지 않으면 혈관이 망가지기 딱 좋았다.
환자의 팔뚝에는 이미 3개의 멍 자국이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우현을 향한 환자와 보호자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주사기, 저한테 주세요.”
“이 선생님이 하시게요?”
우현이 놀란 부엉이 눈을 하고 물었다.
의대 시절 앙숙으로만 지냈던 준후가 자신을 돕겠다고 하니 당황한 것이다.
“선 선생님이 못하는 일이면 저라도 해야죠.”
“…….”
“환자분, 잠깐 팔 상태 좀 보겠습니다.”
팟! 팟! 팟!
준후는 검지로 환자의 왼쪽 팔뚝에 위치한 노궁혈, 대릉혈, 내관혈을 차례대로 점혈했다.
내공을 담아 혈맥 근처의 신경도 일시적으로 차단했다.
그동안 바늘에 찔린 통증을 줄여주는, 이른바 ‘진통 점혈’을 시도한 것이다.
의대 시절 준후는 동기에게 ABGA를 당한 적이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서로 술기 연습을 하는 시간이었는데 그때 팔이 벌집이 되면 깨달은 것이 있었다.
ABGA를 당하면 팔이 욱씬거릴 정도로 아프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아픈 정도가 참 미묘했다.
누구에게 말하기는 그렇고.
또 마냥 무시할 수는 미묘한 통증이랄까.
그래서 준후는 환자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진통 점혈’부터 펼쳤다.
아픈 사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건 아파본 사람일 테니까.
“어라? 갑자기 팔이 안 아픈데요? 이상하네?”
점혈을 받은 환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사소한 재주가 있거든요. 채혈도 안 아프게 금방 끝내드릴게요.”
“…….”
“선 선생님 뭐 해요? 주사기 안 주시고?”
“아. 네.”
“이 기회에 제가 어떻게 하든지 잘 봐두세요. 일단 바늘 각도를 너무 눕히지 말고 45도로 유지한 상태에서…….”
준후는 우현에게 ABGA 요령을 차근차근 알려주며 채혈을 시도했다.
푸우우욱.
살갗을 뚫고 혈관에 닿는 바늘.
당연하게도 결과는 한 번에 성공이었다.
주사기 밀대를 끌어당기자 붉은 혈액이 주사기 몸통으로 딸려 들어왔다.
무림에서 칼밥(?)을 먹었던 준후에게 ABGA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환자분. 저희가 아직 인턴이라 배우는 중입니다. 너그럽게 이해 부탁드립니다.”
“괜찮습니다. 지금은 하나도 안 아픈데요, 저 선생님도 고생하셨고.”
준후의 활약 덕택에 채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종료되었다.
“서준후.”
병실을 나온 후 쌩하니 앞서서 걷는 준후를 우현이 불렀다.
“왜?”
“방금 왜 나를 도와줬지? 그냥 모른 척했어도 되잖아.”
우현은 방금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준후는 우현을 좋아하지 않았다.
따라서 방금 ABGA를 도와주지 않는 편이 준후에게 이득이었다.
준후가 우현을 모른 척했다면 우현은 환자와 보호자에게 진창 욕을 먹었을 것이다.
결국 1년 차 현진을 불렀을 테고.
ABGA를 대신해달라고 요청한 후, 그 일로 현진에게 또 갈굼을 먹었을 것이다.
만약 상황이 반대였다면 우현은 결코 준후를 돕지 않았으리라.
준후의 처지를 쌤통이라 여기며.
그런데 왜!
도대체 왜!
준후는 자신을 도왔던 것일까.
우현은 그 점이 두고두고 궁금했다.
“왜 그랬을 것 같아? 네 머리로 다시 생각해 봐.”
준후가 역으로 되물었고 우현은 대답을 못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