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74화
제12장 미련(7)
소아 병동 복도.
기석은 허리를 굽신거리며 통화를 하고 있었다.
“네.”
-…….
“네. 알겠습니다. 그럼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끊고서야 기석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막 경찰에게 전화가 왔다.
아내 지숙에 대한 조사가 끝났는데 아내의 학대 혐의가 확실하므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접근금지 명령도 떨어졌으니 아이를 어머니와 만나게 하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기석은 창밖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천사인 줄 알았던 지숙이 건우를 폭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청천벽력이었다.
지숙은 집안일을 잘했고.
건우도 잘 돌보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다 연기였다니…….
거짓이었다니…….
지숙에게 속아 왔다는 생각을 할 때면 무릎에 힘이 쏙 빠졌다.
한편으로는 지숙을 향한 맹렬한 분노가 끓어올랐고.
한편으로는 지숙의 위선을 꿰뚫어 보지 못한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건우에게 조금만 관심을 가졌다면 일이 이토록 커지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건우가 안정되어 보인다고 해서 너무 안심하면 안 됩니다.
-왜죠?
-당장은 신경 안정제 효과 덕분일 확률이 높거든요. 그래서 내일 중으로 정신건강의학과 협진 예정입니다.
-…….
-정신과 상담은 퇴원한 후에도 꾸준히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기석은 문득 준후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잘생기고 일 처리가 확실한 의사.
병동에서 유일하게 건우의 학대 사실을 알아챈 의사.
준후는 하늘이 자신과 건우에게 내려준 천사나 다름없었다.
준후의 도움이 없었다면 집안의 상처는 더 곯아서 손 쓸 수 없을 지경에 다다랐으리라.
준후가 선물로 준 인형을 들고.
기석은 다시 병실로 돌아갔다.
발목에 쇠고랑이도 달린 것처럼 걸음이 무거웠다.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해왔던 탓에 건우를 볼 낯이 없었다.
일이 바빴다는 건 결국 다 핑계 아닌가.
침상에 도착하니 건우는 어느새 깨어 있었다. 넋이 나간 얼굴로 창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건우야.”
“네.”
“이거 받아.”
“이게 뭔데요?”
건우가 기석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이게 뭐냐 하면은…….”
기석은 즉시 대답을 못 하고 뜸을 들였다.
-그리고 이건 건우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제 이야기는 하지 말고 아버님이 사 왔다고 말씀하시면서 주세요.
준후가 상냥한 말을 해주었다만.
자신이 사 온 물건도 아닌데 염치없이 자신이 사 왔다고 해도 되는 걸까.
갈등이 되었던 것이다.
“……아빠가 건우에게 주는 선물이야. 직접 뜯어볼래?”
기석은 결국 준후에게 받은 선물을 자신이 사 온 것처럼 연기했다.
선생님.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당신의 뜻을 따르겠어요.
저는 지금부터 뻔뻔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좋을 만큼 건우를 위해 살 거니까요.
바스락. 바스락.
“와, 선비 인형이다!”
포장지를 제거하자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 하루 종일 울상이었던 건우가 처음으로 반색한 것이다.
건우의 해맑은 미소에 기석도 시름이 싹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아빠. 고맙습니다.”
“고맙기는. 아빠가 미안해. 그동안 우리 건우 신경 못 써줘서.”
기석은 울컥하는 마음을 억누르며 말을 계속했다.
“엄마는 이제 안 봐도 되니까 아빠랑 행복하게 살자. 아빠가 노력할게. 건우가 다시는 안 아프게 해줄게.”
“네.”
건우는 짧게 대답하고 인형만 만지작거렸다.
당장은 선물로 받은 인형이 더 좋은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건우가 기쁘면 기석도 기뻤다.
* * *
밤 11시.
복도와 병실의 불은 다 꺼져 있었다. 취침 등만이 달빛처럼 은은하게 사방을 비추고 있었다.
고요가 내려앉은 병실.
건우는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엄마가 자신을 괴롭혀서 벌을 받게 된다는 사실도.
아빠가 앞으로 자신과 함께해 줄 거라는 사실도 알았다.
그런데도 좀처럼 불안을 떨쳐내기 힘들었다.
평화롭게 지낸 날보다 맞을까 봐 긴장하며 지낸 날이 아직은 더 많았으니까.
건우는 엄마에게 맞는 게 싫었지만 그동안 꾹 참아왔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빠가 엄마와 있을 때 행복해 보여서였다.
자신이 엄마에게 매 맞는다는 사실을 고백하면 아빠가 불행해지지 않을까.
어린 건우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입을 다물었다.
자신만 모른 척하면 아빠가 행복해질 수 있을 테니까.
건우는 잠들기 위해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엄마가 거대한 괴물로 나타났다.
쿵. 쿵. 쿵.
발소리를 내며 건우를 잡아먹을 것처럼 달려들었다.
너무 무서워서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건우는 참았다.
머리맡에 두었던 선비 인형을 품 안에 두고 꼭 끌어안았다.
엄마에게 학대를 당할 때.
건우를 지켜주었던 것은 언제나 선비였다.
선비는 작고 귀여웠지만 정의로웠다.
나쁜 요괴들을 멋지게 물리쳤다.
비록 선비가 엄마까지 물리쳐주지는 못했지만, 선비와 함께할 때는 두려움이 가셨다.
-약속할게. 우리 언제나 함께할 세상. 빛나는 희망을 전부 선물할 거야. 무서움에 떨지 않는 내가 되어줄게.
건우는 가장 좋아하는 노랫말을 중얼거렸다.
인형을 쥔 팔에 힘을 더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선비가 엄마만큼 거대해져서 엄마로부터 건우를 지켜주었다.
고마워. 선비야.
건우는 그제야 곤히 잠들었다.
* * *
그 날 저녁.
준후는 당직실에서 현진과 당직 근무를 서고 있었다.
응급실 콜은 없었고.
밀린 오더는 다 처리했으며.
차트 입력으로 바쁜 현진의 일까지 거들어주었다.
덕분에 지루할 정도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역시 서준후. A턴도 아니라 S턴이네. 당직 때 쉬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현진이 준후를 칭찬했다.
준후의 업무 처리 속도와 정확도가 그만큼 경이로웠던 것이다.
자존심이 조금 상하긴 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준후가 자신보다 일을 훨씬 야무지게 잘한다는 사실을.
“그냥 요령이 좋은 거죠.”
“그 요령 나도 좀 가르쳐줘라. 그나저나 뉴튜브 촬영은 좀 잘 되시나?”
“촬영은 잘하고 있는데 조회수랑 구독자가 안 늘어서 탈이죠. 이 바닥이 만만치가 않네요.”
현재 준후는 의학 서적 공부하는 모습을 휴대폰으로 촬영 중이었다.
브이로그 중에서도 공부 브이로그 영상이었다.
“뉴튜브야 워낙 레드오션이니까. 적당히 해보고 접어. 네가 어디 부족한 게 있다고 뉴튜브에 목을 매다냐?”
“목매달아야죠. 뉴튜브 띄워서 하고 싶은 일이 있으니까.”
“왜? 돈에 굶주렸어?”
“많이 굶주렸죠.”
준후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엄밀히 말하면 준후에게 돈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앞으로 의사 생활을 하면서 마주칠 환자들.
그중에서도 경제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을 뉴튜브 채널 수익으로 지원하고 싶을 뿐이었다.
“근데 촬영한다면서 왜 말은 한마디도 안 하냐?”
“오늘은 말 없는 영상이에요. 제 얼굴을 강조해서 촬영 중이고요. 제 외모를 칭찬하는 댓글이 많아서 이쪽으로 컨셉을 잡는 중이에요.”
“암. 우리 준후가 탁 까놓고 말해서 잘 생기긴 했지.”
현진이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준후는 실력만큼이나 외모도 정평이 났다.
오죽하면 타 병동 간호사들이 준후를 보겠다고 정형외과 병동을 기웃거릴까.
훤칠하면서도 호리호리한 몸매.
큰 눈과 서글서글한 눈매.
오뚝한 코와 웃는 인상의 입꼬리.
거기다가 준후는 피부마저 잡티 없이 멀끔했다.
그래서일까.
의사가 아니라 의사 역할을 맡은 배우 같기도 했다.
“나 네 채널 구독했다.”
“영상은 보셨어요?”
“어…… 영상은 아직 안 봤지.”
“그럼 영상도 봐주시고 좋아요도 눌러 주세요.”
“짜식 벌써 진성 뉴튜버 다 됐네.”
현진이 깔깔깔 웃었다.
한편 준후는 뉴튜브 촬영을 하는 것과 동시에 정형외과 공부도 하고 있었다.
정형외과 전문의 서적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수술 스크럽을 서면서.
정형외과를 향한 준후의 관심은 나날이 커지고 있었다.
망치, 못, 끌, 나사, 드릴 등등.
정형외과에는 인간의 몸을 고치는 목수 같은 우직한 수술이 있는가 하면.
수부외과 수술처럼 섬세한 수술도 존재했다.
이처럼 양면의 매력을 가진 외과는 아마 정형외과뿐이리라.
준후를 공부를 하다 말고 거치대에 얹어 놓은 휴대폰을 응시했다.
촬영은 무난하게 진행 중이었고.
배터리도 아직 여유가 있었다.
뉴튜브 알고리즘의 간택을 받을 때까지 속된 말로 존버한다.
그것이 준후의 현재 목표였다.
드르르륵.
당직실 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동석이었다.
3년 차 레지던트.
군기반장이라며 후배와 인턴들을 상습적으로 폭행하고 준후와 앙숙이 된 선배.
동석의 등장으로 당직실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현진은 동석의 눈치를 보고 급하게 일하는 척하기도 했다.
“야. 서준후. 너 뭐하냐?”
“공부하면서 뉴튜브 촬영도 하고 있습니다.”
“X발. 인턴 팔자가 상팔자네. 인턴 나부랭이가 당직 시간에 딴 짓이나 하고.”
동석이 혀를 차며 준후에게서 현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 새끼 저대로 놔둘 거야? 네 할 일 있으면 좀 떠넘겨.”
“그게…… 차트 입력도 끝났고 병동에 문제 환자도 없어서요.”
“확인해서 나오면 넌 뒈진다.”
동석은 현진을 자리에서 쫓아내고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았다.
병동 환자들의 차트를 차근차근 살폈다.
그런데 웬걸?
필요한 업무는 정말 끝나 있었다.
원래라면 새벽까지 차트 입력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야 하는데 말이다.
“하…… 진짜 없네. 네 손이 그렇게 빨랐냐?”
“그게…… 준후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 X랄을 떨고 있었구만.”
동석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서준후, 좋게 말할 때 뉴튜브 촬영인지 뭔지 그만해라.”
“왜죠?”
“선배가 하지 말라면 하지 말지. 감히 토를 달아?”
동석이 잔뜩 인상 쓰며 말했다.
이에 준후 역시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동석을 쳐다보았다.
저 인간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야간이라 교수들도 없으니.
마음 놓고 자신을 잡으려고 하는구나.
……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하지만 준후는 동석에게 굽실거릴 이유도 없었고 굽실거리고 싶지도 않았다.
“업무에 지장이 가지 않는 범위라면 뉴튜브 촬영을 해도 좋다고 이동훈 교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선배도 곁에서 같이 듣지 않았나요?”
“새끼, 또 말대답이네. 내가 꼴 보기 싫으니까 하지 말라고. 인턴 새끼가 빠져서 뉴튜브나 하고 말이야.”
“저는 교수님의 지시를 따르고 있으니까 불만 있으면 교수님한테 말하세요.”
준후의 대답으로 동석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감히 인턴 따위가 자신에게 하극상을 일으킨다니.
정형외과의 규율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단 말인가.
동석의 가슴에서 열불이 치솟기 시작했다.
“야, 강현진. 일단 너부터 맞고 시작하자.”
“저…… 저요?”
“네가 인턴 교육을 개판으로 하니까 나한테까지 기어오르는 거 아니야. 네 책임이 제일 커.”
동석은 현진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갔다. 솥뚜껑만 한 손바닥으로 현진의 뺨을 후려쳤다.
짝!
본래라면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손바닥이 현진에게 닿기 직전.
준후가 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와 동석의 팔을 낚아챘던 것이다.
“적당히 해. 참고 있었던 건 네가 아니라 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