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76화
제13장 미래(1)
“아으으으.”
동석은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분명 당직실에서 의식을 잃었었는데 주변을 살펴보니 숙직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서준후.
대체 뭐 하는 놈이지?
기절하기 직전의 상황을 떠올리며 동석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무력으로 준후를 제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준후는 동석의 공격을 손쉽게 무력화시켰다.
그것도 모자라 이상한 수법으로 동석을 움직이게 못 하게 만들었고 또 말도 안 되는 고통을 겪게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궁금했지만 묻는다고 준후가 답해줄 리 만무했다.
그래서 더 답답하고.
그래서 더 분통이 터졌다.
뭐야?
아무런 흔적도 없잖아?
동석은 자신의 몸을 더듬어 살펴보고 혀를 찼다.
분명 죽을 만큼 아팠건만 몸에는 어떤 외상의 흔적도 없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하아…….
동석은 한숨 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준후에게 꼴사납게 당해 버렸다.
다시 덤빈다고 해도 이길 자신이 없다는 게 문제였고.
군기반장으로서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더 큰 문제였다.
현진이 다른 레지던트들에게 오늘 일을 말하고 다닌다면 상황은 더욱 처참해지리라.
드르르륵.
때마침 숙직실 문이 열렸다.
모습을 드러낸 치프가 동석에게 다가왔다.
“몸은 좀 괜찮냐?”
“네?”
“얼빠진 얼굴로 얼빠진 대답을 하네? 준후가 그러던데? 네가 너무 피곤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고.”
“…….”
“그래서 자기가 부축해서 당직실에 눕혔다고.”
치프의 말에 동석은 미간을 찌푸렸다.
준후의 되지도 않는 거짓말이 불쾌했다.
그렇다고 준후에게 얻어맞았다고 순순히 고백할 수도 없으니…….
진퇴양난이었다.
“선배는 준후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번에 어시스트 한 번 같이 섰는데 일 똑 부러지게 잘하더라. 명실상부 A턴이지. 그건 왜?”
“그냥요.”
“싱겁기는. 무리하지 말고 푹 쉬어.”
치프가 동석의 어깨를 두드리고 당직실을 떠났다.
동석은 넋이 나간 얼굴로 벽을 쳐다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준후에게 당한 통증은 끔찍했지만 휘발성이었다.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문제는 앞으로의 일인데…….
정신도 차릴 겸 동석은 세수를 하고 복도로 나왔다.
그런데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하는가.
준후가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걷고 있었다.
병실에서 오더를 처리하고 나오는 길인 듯했다.
동석은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준후의 뒤를 밟았다.
이제 손만 뻗으면 닿는 거리.
후우우웅.
동석은 두 주먹으로 깍지를 낀 후 망치로 내려치듯 준후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려 했다.
야비하다는 소리를 듣더라도 당한 건 갚아 주어야 했다.
소싯적에 운동을 좀 한 모양인데 설마 그렇다고 해도 설마 등 뒤에서 습격하는 데는 장사가 없겠지.
흐흐흐.
“어라?”
그런데 동석의 입술 사이로 얼빠진 탄식이 흘러나왔다.
후우우웅.
회심의 일격이 빗나갔다!
맙소사,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단 말인가?
준후가 몸을 틀어서 동석의 해머링을 회피했던 것이다.
쿵!
“아흑!”
발뒤꿈치에 전해지는 통증.
어느새 뒤를 잡은 준후가 발목을 걷어찬 탓에.
동석은 또 형편없이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분명 기척을 죽인 채 뒤를 밟았는데 어째서 이런 상황이!
“동석이 귀엽네.”
준후가 동석을 내려다보며 웃었는데 그 웃음이 꼭 악마 같았다.
공포심에 몸이 굳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질질질.
준후는 쓰러진 동석의 옷자락을 붙잡고 당직실로 이동시켰다.
동석이 인간이 아니라 짐짝이라는 듯.
“한 번 더 기습할 줄 알았어. 난 너 같은 부류를 많이 상대해 봤거든.”
준후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목소리에 계절이 있다면 한파가 몰아닥치는 겨울이리라.
“내…… 내 기습을 어떻게 알아차렸지?”
“질문은 내가 한다. 넌 ‘네’ 아니면 ‘아니요’로만 대답하면 되는 거야.”
준후는 과거 동석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따라 하고 있었다.
며칠 만에 역전되어 버린 처지가 동석은 믿기지 않았다.
“앞으로 후배하고 인턴들 괴롭히지 마. 괴롭힌다는 소식이 들리면 내가 언제라도 정형외과에 와서 널 괴롭힐 거야.”
“…….”
“네가 후배를 괴롭혔던 것처럼. 알아들었어?”
“인턴 주제에…… 네까짓 게 뭐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대답은 ‘네’와 ‘아니요’뿐이라고?”
준후가 다가와 검지로 순식간에 동석의 몸 이곳저곳을 찔렀다.
그러자 동석은 마비라도 된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말 그대로 꿈만 같은 일이었다.
악몽 말이다.
“아까 경험해 봤겠지만 난 외상을 남기지 않고 널 괴롭힐 수 있어. 괴롭히는 정도도 조절할 수 있지.”
“이…… 악마 같은 놈.”
“너 같은 악마를 손봐주는 것도 악마라면 기꺼이 악마가 되어주지.”
준후가 섬뜩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경고의 의미에서 한 번. 대화 규칙을 어긴 게 두 번. 합쳐서 아까보다 더 고통스러울 거야.”
“으으으…….”
“아픈 게 싫으면 남을 괴롭히지 마. 아주 간단한 룰이잖아?”
파바바밧!
준후의 손가락이 이번에도 번개처럼 움직였다.
동석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아까보다 몇 배는 더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을 쳐야 했다.
그래서일까.
동석은 아까보다 몇 배는 더 빨리 게거품을 물고 기절했다.
* * *
‘이 정도면 정신이 번쩍 들겠지?’
준후는 기절한 동석을 침대에 눕히고 탁탁 손을 털었다.
자신의 행동이 다소 잔인해 보일 수 있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후회나 죄책감은 없었다.
진짜 악인들은 사고방식이 달랐다.
개과천선, 회개, 갱생 따위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들을 억제할 수 있는 방법은 목숨을 끊거나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게 짓밟는 것뿐이었다.
즉 악(惡)은 악에 받쳐서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됐다.
놀랍게도 무림의 정파인들은 그걸 잘 몰랐다.
그래서 악인들을 포용하거나 이해하려다가 배신당해 죽는 경우가 빈번했다.
동석도 마찬가지였다.
아까 당한 것도 모자라 등 뒤에서 기습하지 않았던가.
정상인이라면 결코 할 수 없는 악독한 행동이었다.
그러니 분근착골술 정도는 써 둬야 준후가 없더라도 후배를 괴롭히지 못하리라.
“이 정도면 차라리 쉬운 편이지.”
준후는 동석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동석이야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었다만 권력을 가진 악인들은 훨씬 상대하기 까다로울 것이다.
의대 재학 시절.
아는 선배의 아버지를 의료사고 사망하게 만든 병원장처럼.
당시 준후는 역용술을 펼치고 변호사로 위장하고 대화를 녹음하고 등등.
증거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해야 했다.
의사가 됐든.
간호사가 됐든.
환자가 됐든, 보호자가 됐든 악행을 저지른다면 반드시 죗값을 치르게 만들리라.
준후는 모처럼 새로운 각오를 다졌다.
올바른 의료 정의를 세우는 것도 의료계에 꼭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준후야. 진짜 미안한데 응급실 한 번 갔다 와줄 수 있어? 케이스 스터디 준비 중인데 손이 좀 바빠서…….”
당직실에 복귀하자 현진이 미안해하며 부탁했다.
“물론이죠. 환자 번호부터 알려주세요.”
“땡큐. 땡큐. 148706번 황규현 환자라고 응급은 아닌 것 같거든? 아마 진통제만 처방하면 될 거야. 혹시라도 문제 생기면 연락 주고.”
“네. 선배.”
준후는 환자의 차트를 읽어보고 응급실로 향했다.
* * *
“준후야, 네가 응급실은 웬일이야?”
응급실에 도착한 준후는 스테이션에서 아영을 맞닥뜨렸다.
준후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아영은 놀란 눈치였다.
“1년 차 선배, 땜빵.”
“아…… 어쩐지. 응급은 아닌 것처럼 보이니까 별일 없을 거야.”
“정형외과에 노티한 사람이 너였어?”
“맞아.”
아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정형외과 노티는 근무하면서 이번이 처음이야.”
“나도 진료 보러 내려오는 건 처음인데.”
준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정형외과는 타 과에 비해 응급실 진료 많지 않은 과에 속했다.
야간에 골절상을 당하는 환자는 적은 편이며.
염좌와 좌상 정도는 응급의학과에서 처치를 해주었다.
정형외과의가 응급실에 내려온다면 보통은 T.A(교통사고) 환자일 확률이 높았다.
그마저도 흉부외과나 신경외과의 진료가 끝난 후인 경우가 많았고.
“진료하는 거 옆에서 구경해도 돼?”
“아영이 너만 안 바쁘면.”
“그럼 접수.”
준후는 아영과 제5구역으로 이동했다.
침상에 걸터앉은 환자의 이름은 황규현.
나이는 23세로 왼쪽 다리에 통 깁스를 하고 있었다.
오늘 낮, 대학 축구 동호회에서 축구를 하던 도중 정강이에 골절상을 당했다고 했다.
환자의 곁에는 어머니로 보이는 보호자가 서 있었다.
응급이 아니라서 그럴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심각해 보이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환자분, 보호자분.”
“안녕하세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준후의 인사를 환자와 보호자가 받았다.
“어디가 제일 불편하세요?”
“정강이 쪽이 욱신거리고요. 다리가 땡땡하게 부은 느낌이에요.”
“다른 증상은 없으신가요? 뭔가 다리가 마비된 느낌이라던가, 다리를 움직이기 심하게 불편하다든가.”
“마비는 없는 것 같고. 움직이는 건 불편하네요. 이것 때문에.”
환자가 통 깁스를 가리키며 어색하게 웃었다.
문답하는 환자의 상태도 그렇고.
문진 중인 내용도 그렇고.
환자는 골절 후에 자연히 따라오는 통증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이래서 현진이 부담 없이 준후를 내려보낸 듯했다.
이래서 진통제만 주면 될 거라고 말했던 듯했다.
“정확히 언제쯤 다치셨죠?”
“한 4시쯤 다쳤던 것 같아요.”
“다친 지는 6시간 정도 되셨고. 통 깁스를 했던 정형외과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약 먹고 푹 쉬면 나아질 거라고 하더라고요. 일주일 정도 있다가 다시 오라고도 했고요.”
“약은 드셨죠?”
“네.”
먼저 진료를 본 정형외과에서 진통제를 먹었는데도 통증이 심해서 응급실을 찾았다라…….
환자가 단순히 통증에 민감한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준후의 숙제는 이 두 가지를 구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분류하는 능력이야말로 참 의사가 가져야 할 덕목이기도 했다.
“잠시만요.”
준후는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응급실에서 촬영한 환자의 엑스레이 사진을 살폈다.
환자의 왼쪽 정강이뼈에 세로로 골절이 있었다.
단순 골절.
뼈가 피부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은, 골절된 뼈의 파편이 3개 미만인 골절이었다.
정형외과에서 가장 흔하게 접하는, 또한 일상적으로 자주 발생하는 골절이기도 했다.
엑스레이상에서도 별문제는 없어 보이는데…….
“심플 프락쳐(단순 골절) 같은데 진통제 처방해서 보내면 되지 않을까?”
곁에 있던 아영이 속삭이듯 말했다.
아영 역시 현진과 마찬가지로 환자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하지만 준후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최악의 최악을 가정하라.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
준후가 무림에서 뼈에 새긴 교훈이었다.
상황을 부정적으로 보는 일은 괴롭고 힘들지만 만약에 발생할 위험을 막아주는 효과가 있었다.
하물며 막아야 할 것이 환자의 고통과 응급 상황이라면 말이다.
최악에 최악의 최악을 가정하고.
의심에 의심의 의심을 하는 것이 옳았다.
“깁스 좀 살펴볼게요.”
준후는 환자의 왼쪽 통 깁스를 꼼꼼하게 살폈다.
“발가락 한 번 움직여보실래요?”
“네.”
준후의 지시에 환자가 발가락을 움직였는데 발가락의 운동범위가 지나치게 좁았다.
“그게 다인가요? 더 움직여보세요.”
“발이 꽉 조여서 이상은 안 돼요.”
“혹시 다리의 압박감이 심하지 않나요? 발가락을 그 정도 밖에 못 움직이면 문제가 있는 건데?”
“많이 답답하기야 하죠. 근데 깁스가 원래 이런 거 아닌가요?”
환자가 멋쩍게 웃었지만 준후는 웃지 못했다.
뿌연 안개 속에 도사리고 있는, 불길한 무언가를 감지했던 것이다.
“아영아.”
“응.”
“미안한데 정형외과용 그라인더(절단기, 고속 회전하는 원형 톱) 좀 가져다줄래?”
“그라인더는 왜?”
아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캐스트 해체하고 안을 봐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