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78화
제13장 미래(3)
“환자분이 앓고 있는 질환은…… 급성 구획증후군입니다.”
준후는 차분하게 설명에 나섰다.
급성 구획증후군.
이는 정형외과에서 시간을 다투는 몇 안 되는 응급 질환 중 하나였다.
다리에는 구획이라는 영역이 존재한다.
구획은 근육층을 나누는 일종의 빈 공간인데.
부종(부기) 등으로 인해 구획 내 압력이 증가하면 동맥까지 압박을 받아 혈액순환이 저해된다.
제때 수술을 못 할 경우.
근육과 인근 조직에 괴사, 신경 손상이 발생하여 해당 부위를 절단해야 할 수도 있었다.
심각한 경우 환자가 사망에 이를 수도 있고.
준후의 설명에 환자와 보호자의 낯빛이 한층 창백해졌다.
단순한 골절통을 예상했거늘.
뜻밖의 심각한 질환을 진단받으니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서…… 선생님. 저희 아들이 왜 그런 질병을 앓아야 하죠?”
보호자가 억울하다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골절을 당해도 멀쩡하던데 왜 우리 아이만…….”
“제 생각에는…… 캐스트, 그러니까 통깁스가 지나치게 아드님의 다리를 옥죄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
“아까 통깁스를 한 상태에서 아드님이 발을 잘 못 움직이시더라고요.”
“…….”
“움직일 때 통증도 느끼셨고요.”
“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환자가 겁먹은 표정으로 대화에 껴들었다.
“응급 수술을 받으셔야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동의서 서명을 받으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
“그 전에 잠시만.”
준후는 땅땅하게 부은 환자의 왼쪽 정강이에 손을 올렸다.
해당 부위의 해부학적 위치를 머릿속으로 그리며 내공을 불어넣었다.
내공이 향한 장소는 바로 하지 구획의 테두리.
구획 내 압력이 바깥으로 팽창하는 것을 내공으로 임시적으로 막아낸 것이다.
일종의 보호막이랄까.
내공이 버텨준다면 동맥에 전해지는 압력은 조금이나마 감소할 것이다.
근본적인 치료법은 아니지만, 현재로써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응급 수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인데.
환자의 증상이 악화되는 시간을 내공으로 벌 수 있으니까.
“선생님이 손을 대니까 이상하게 발이 조금 편해졌어요.”
“우연이라면 정말 좋은 우연이네요.”
“죄송합니다. 선생님.”
환자의 갑작스러운 사과에 준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사과는 왜…….”
“솔직히 말씀드리면요. 선생님이 CT나 MRI를 찍으려고 제가 아픈 걸 일부러 부풀리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 생각, 하실 수도 있습니다. 환자를 돈줄로 보는 의사도 꽤 있으니까요.”
준후는 씁쓸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환자는 동네 의원에서 과잉 진료를 받아본 경험이 있는 듯했다.
하긴 환자가 조금만 허리 통증을 호소해도.
10만 원짜리 신경주사를 권하는 정형외과나 신경외과 의원들이 널렸으니까 말이다.
대화를 마친 준후는 곧장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근막 절개술에 관한 동의서를 출력했다.
꼼꼼한 진찰로 환자의 급성 구획 증후군을 진단했다만 전쟁은 지금부터였다.
환자의 높은 구획압을 감소시키기 위해서는 수술이 필수였다.
천운아.
비록 너는 구하지 못했지만.
다른 세상에서 너와 같은 비극을 겪는 사람을 만들지 않기 위해 이렇게 노력하고 있어.
이걸로 나를 용서해 주렴.
* * *
“하…… 미치겠네.”
응급실 콜을 받은 현진은 두 손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준후가 진료 중이던 환자가 급성 구획증후군이라고 노티를 받은 것이다.
반신반의하면서 EMR(전자의무기록)을 확인한 결과.
환자는 급성 구획 증후군이 맞았다.
구획압 측정기에서 나온 수치가 무려 50mmHg에 달했으니까.
보통은 30mmHg만 넘어도 급성 구획 증후군을 의심하는데 환자 수준이면 당장 수술이 필요했다.
준후 녀석도 참 대단하단 말이지.
나였으면 진통제만 줘서 환자를 보내버렸을 텐데.
캐스트까지 해체하면서 진찰을 하고 말이야.
하지만 준후를 향한 감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졌기에.
현진은 마취과에 연락해 응급으로 마취의를 콜했고 수술실에 연락해 수술방도 잡았다.
문제는 집도의에게 연락할 때 터졌다.
“하…… 대체 뭐 하는 거야?”
현진은 초조한 마음에 발을 동동 굴렀다.
콜폰으로도 연락을 하고.
개인 휴대폰으로도 연락을 했건만 당직 펠로우가 받지를 않았다.
어디에 처박혀서 자고 있나?
아니면 잠깐 외출을 했나?
아무리 정형외과가 야간에 응급 환자가 적다고 해도 이건 아니잖아!
현진은 당직 펠로우를 원망하며 정형외과 병동 인근을 샅샅이 뒤졌다.
재수 없게도 당직 펠로우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사이에 연락이 온 것도 아니었고.
“교수님, 쉬고 계시는데 죄송합니다. 급하게 응급 환자가 생겨서요.”
현진은 하는 수 없이 성재윤 교수에게 연락을 했다.
급성 구획 증후군 환자에 대해서 노티했다.
평소 온화한 성품의 재윤이라면 당장 병원에 와줄 거라 기대하면서.
하지만 기대가 박살 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허…… 이거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구나. 경우, 지금 나랑 같이 있는데 말이야.
“네? 당직 펠로우 선생님이랑요?”
-그래. 경우가 펠로우 그만두고 싶다고 하길래 잠깐 우리 집에 와서 이야기 좀 하고 있었지.
그야말로 날 벼락같은 소식이었다.
일이 꼬여도 이렇게 꼬일 줄이야.
두 사람이 함께 묶여 버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럼 환자는…… 어떻게 할까요? 다른 병원으로 보낼까요?”
-환자가 캐스트를 한 시점이 언제쯤 되니?
“대략 5시간 정도 됐습니다.”
현진이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근막절개술의 골든타임은 6시간으로 6시간이 지나면 수술이 성공하더라도 환자에게 영구 장애가 생길 확률이 높았다.
-지금 수술해도 아슬아슬하구나. 이송은 절대 안 되겠어.
“…….”
-일단 명호에게 집도를 부탁해 봐. 근막 절개술 어시스트도 해봤고 저번 주에는 집도도 해봤으니까.
“…….”
-우리가 지금 출발하면 40분 정도 걸릴 거란다. 술은 안 마셨으니까 핵심 처치는 우리가 할 수 있을 거고.
“알겠습니다. 교수님.”
통화를 끊고 현진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뭔가 안 풀리는 날인 게 분명했다.
어쩜 일이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 있을까.
거의 꽈배기 수준이었다.
치프인 명호가 근막 절개술을 집도할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랄까.
설령 도중에 무슨 일이 터지더라도 교수와 펠로우가 합류한다면 큰 문제는 없으리라.
“치프. 저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급한 건입니다.”
현진은 컨퍼런스 룸을 찾아 공부 중이 명호에게 사정을 노티했다.
명호는 귀찮아하면서도 체념한 기색을 내비쳤다.
“별수 있나. 그럼 내가 집도해야지. 스크럽은 누가 설 건데?”
“치프가 결정해 주세요.”
“동석이는 아직도 상태 메롱이니?”
“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는데 숙직실에서 계속 뻗어 있더라고요.”
“으음…… 그럼 퍼스트는 태웅이로 하고…… 세컨드는 준후로 하자. 급성 구획 증후군을 진단한 것도 준후라고 했으니까.”
“네. 지금 연락하겠습니다.”
현진은 가운에서 콜폰을 꺼내 쏜살같이 준후에게 전화했다.
“준후야. 진짜 미안한데 고생하는 김에 좀 더 고생해 줘야겠다.”
* * *
드르르륵.
드르르륵.
준후는 환자가 누운 침상을 끌고 2층 수술방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수술 스케줄이 잡혔고.
준후는 세컨드(제2보조)로 수술에 참여하게 되었다.
다른 인턴이라면 일이 늘었다며 질색을 했겠지만 준후는 아니었다.
외과의를 꿈꾸는 준후는 수술을 사랑했다.
수술방에서만 느낄 수 있는 비장함과 긴장.
어려운 처치와 수술을 마치고 느끼는 쾌감.
환자를 살려냈다는 보람을 사랑했다.
자신이 진단한 환자의 수술에 직접 참여한다면 유종의 미도 거둘 수 있을 테고 말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착한 수술실.
문 앞에서는 현진이 대기 중이었다.
“야, 진짜 미안하다. 나 때문에 응급실도 내려가고 졸지에 스크럽도 서고.”
“제가 가겠다고 한 건데요. 뭐. 치프랑 태웅 선배는 아직 안 내려왔어요?”
“지금 오는 중이야. 차트도 확인하고 간단하게 브리핑도 하느라 늦나 봐. 동의서는 출력해 뒀지?”
“네. 여기요.”
준후는 환자의 머리맡에 있던 동의서를 현진에게 내밀었다.
검사 동의서는 인턴이 받지만.
수술 동의서는 레지던트가 받도록 되어 있었다.
“보호자 분은 잠깐 저랑 이야기 좀 하실까요?”
현진이 대기실에서 보호자와 대화를 나눴고 준후는 두 사람을 지나쳐 수술실로 진입했다.
환자 회복을 위한 제2막에 들어선 것이다.
“선생님. 저 혹시 수술받다가 죽는 건 아니죠?”
문득 보호자가 불안한 눈동자로 준후를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제대로 된 수술은 처음 받아서 두렵고 긴장되는 모양이었다.
사실 근막 절개술은 위험한 수술이 아니었다.
수술 시간은 일반적으로 1-2시간 사이.
하지만 모든 수술이 그렇듯 환자가 사망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는 없었다.
수술방에서는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으니까.
기적도, 불행도.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안심하세요. 스태프들이 환자분을 위해 최선을 다할 거니까.”
준후는 상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신 마취하면 완전히 의식을 잃잖아요. 근데 그렇게 눈을 감았다가 영영 눈을 못 뜰까 봐 걱정돼서요.”
“…….”
“저 바보 같죠?”
“아니요. 처음 수술받는 분들은 다 그런 걸요. 환자분이 이상한 건 절대 아니에요.”
환자가 심하게 긴장한 것 같아서 준후는 침상을 세웠다.
환자의 오른손 중지 아래에 위치한 혈을 엄지로 둥글게 문질렀다.
내공을 적당히 실어서.
해당 위치에는 심중혈이 존재했다.
긴장, 불안, 초조할 때 심중혈을 자극해 주면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지금은 좀 어때요?”
“으음…… 뭔가 마음이 편해진 느낌인데요? 아까 응급실에서도 그렇고 선생님, 혹시 약손이세요?”
“그런 것 같네요. 여기서 잠시 대기해 주세요. 수술방에서 뵙죠.”
환자를 마취 대기실에 두고 준후는 경의실을 찾았다.
수술 가운을 걸치고 스크럽(수술 전 소독)을 하고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장갑과 마스크도 착용했다.
지이이잉.
슈슈슈슝.
천장에서 쏟아지는 소독 연기를 맞으며 준후는 수술방으로 들어갔다.
오늘 어시스트의 목표는 속도였다.
근막 절개술의 골든타임은 6시간.
스태프들에게 남은 시간은 대략 30분.
그 30분 안에 최초의 절개가 이루어져야 했다.
일단 피부와 근막만 절개해 놓아도 구획 내 압력이 크게 감소하기 때문이다.
첫째로 수술 세팅을 빠르고 완벽하게 끝낸다.
둘째로 집도의와 퍼스트가 쾌적하게 수술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돕는다.
우선순위를 정한 준후는 첫 번째 목표부터 미친 속도로 소화하기 시작했다.
물품장 상단에 봉합사.
물품장 아래 서랍에 거즈, 커튼 볼, 붕대 등의 소모품.
바스켓 장 중간에 포셉, 니들홀더, 클램프, 켈리 등등의 수술 도구 등등.
준후는 수술방 어시스트를 몇 번 하면서 주요 물품들의 위치를 모두 암기해두었다.
무림에서 생활하던 당시.
무림맹의 병장기 창고를 관리하던 짬에서 나오는 암기력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미리 암기한 물품들의 위치를 바탕으로 준후는 필요한 물품들만 쏙쏙 빼내어 드레싱 카트 위에 올려놓았다.
무림에서 준후는 무기만 보면 그 무기의 용도와 쓰임새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예를 들어 검이라도 다 같은 검이 아니었다.
어떤 검은 찌르기에 특화되었고.
어떤 검은 베기에 특화가 되었다.
어떤 검은 길이가 길어 사정거리가 긴 대신 몸의 중심을 잡기 힘들다는 단점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무기의 쓰임새를 알아보는 능력은 수술 도구를 챙기는 데도 유용하게 적용됐다.
포셉만 해도 종류가 수십 개인데.
준후는 수술에 필요한 포셉을 어렵지 않게 골라냈다.
포셉의 모양새를 보면 그 용도를 즉시 알 수 있었으니까.
준후는 그야말로 사재기 장터에 온 사람처럼 필요한 처치 물품들을 쓸어 담았다.
손은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고.
적의 팔을 낚아채는 금나수의 수법을 섞었기에 물품을 놓치거나 헛짚는 경우도 없었다.
“선생님. 응급 수술이라고 세팅 빨리해달라고 하던데. 같이 힘내 봐요.”
뒤늦게 합류한 순환 간호사가 물품실로 들어와 준후에게 말을 걸었다.
“물품 세팅, 벌써 끝났는데요?”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선생님도 방금 들어오지 않았어요?”
순환 간호사가 두 눈을 깜빡거리며 되물었다.
그녀는 준후가 수술방에 입장했던 시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금 들어온 거 맞고 방금 끝낸 것도 맞아요.”
“같이 준비해도 20분은 걸리는데 그걸 혼자서 3분 만에 끝냈다고요?”
“네. 못 믿겠으면 직접 확인해 보세요.”
준후는 시크하게 대답하고 수술방으로 돌아갔다.
점혈로 긴장이 풀린 환자에게 환자 감시 장치를 연결하고, 무영등을 켜고, 수술대의 높낮이도 조정했다.
그야말로 빛의 속도로 세팅을 마친 것이다.
첫 번째 목표를 마치고 나서야 준후는 편안함을 느꼈다.
이로써 근막절개술에 필요한 15분을 벌었다.
환자의 회복이 한층 가까워졌다.
“선생님. 진짜 혼자 준비 끝냈네요? 잘못 올라간 것도 없고?”
“제가 손이 좀 빠르죠?”
“손이 빠른 것도 정도가 있지. 이 정도면 초능력자 수준인 것 같은데…….”
지이이잉.
순환 간호사가 준후에게 감탄하는 사이 수술방 문이 열렸다.
집도의인 치프 명호.
퍼스트(제1보조)인 태웅이 급하게 준후 곁으로 다가왔다.
“세팅하느라 바쁘지? 우리도 도와줄게.”
“아니요. 그냥 바로 집도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뭔 소리야? 너도 막 응급실에서 올라왔을 텐데. 우렁각시가 세팅이라도 대신해 줬어?”
명호가 혀를 차며 물었다.
준후의 입장 시간을 감안하면 벌써 수술 세팅을 마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쓱 둘러 본 수술방이 빈틈없이 정돈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 우렁각시, 아무래도 저인 것 같네요.”
준후가 빙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