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80화
제13장 미래(5)
감압에 필요한 충분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환자의 구획압은 제자리였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음에도 환자의 구획압은 제자리였다.
그 의미인즉 환자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훈훈했던 수술방 분위기는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실수한 게 없는데. 대체 왜 이러지?”
명호가 수술 부위인 정강이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나 어시스트가 실수를 했다면 최소한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잘못을 탓하면 되니까.
그런데 왜 수술이 성공했는데도 구획압이 35mmHg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단 말인가.
하늘에 따져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죠. 치프.”
“언제까지 기다릴 수만은 없어.”
“그래도 아직 여유 있잖아요. 이 환자가 특이 케이스일 수도 있어요.”
태웅은 감압할 시간을 더 두자는 의견을 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회복 속도라는 것도 원래 개인차가 있는 법이니까.
“근데 특이 케이스라고 해도 이쯤이면 구획압이 떨어져 있어야 해.”
“그럼 특이 케이스 중의 특이 케이스 아닐까요?”
“태웅아. 감압이 잘 됐다고 너무 편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냐?”
명호가 실소를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문제가 생겼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지?”
“그걸 어떻게 인정하겠어요. 수술은 잘 마쳤는데.”
태웅은 억울하다는 목소리로 대답한 뒤 다시 한번 구획압 측정기를 손으로 툭툭 건드렸다.
구획압 수치는 변함이 없었다.
고장 난 TV를 때리면 가끔 화면이 잘 나오는 경우가 있다만…….
의료 기기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일단 수술한 부위부터 다시 살펴보자. 그 안에 답이 있겠지.”
“교수님께 연락드리는 건 어때요?”
태웅이 새로운 제안을 했다.
지금 병원으로 오고 있는 교수에게 SOS를 치자는 것이었다.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긴 했지만 명호를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수술 완주까지 단 한 걸음이 남았다.
그 한 걸음을 교수에게 기대고 싶지 않았다.
-감독 없이 혼자서 근막 절개술에 성공하다니. 명호 너도 실력이 많이 늘었구나.
명호는 교수에게 칭찬을 받고 싶었다.
그러므로 교수에게 노티하는 건 최후의 수단이었다.
응급한 순간은 이미 지났으므로.
30분 정도 시간을 내서 원인을 찾는 것도 별문제는 없을 듯 보였다.
한편 명호와 태웅이 툭탁거리는 동안.
준후는 수술 부위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수술이 성공적이었음에도 왜 구획압은 35mmHg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가.
이 의문에 대해 짚이는 바가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나섰다.
우우우웅.
단전에서 끌어올린 내공이 손바닥을 통해 수술 부위로 퍼져나갔다.
준후는 내공 혈관 조영술을 펼치고 있었다.
대퇴정맥. 복재정맥, 관통정맥, 망상정맥.
대퇴동맥, 슬와 동맥, 경골동맥.
의대 시절 배운 해부학 지식을 토대로 준후는 환자의 하지 혈관 곳곳에 내공을 투입시켰다.
작업을 하면서 준후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주요 혈관에서 미세 혈관까지.
내공을 흘려보내는 일은 절대 쉽지 않았다.
힘 조절에 실패했다간 내공으로 오히려 혈관이 터질 수도 있었다.
집중력이 흐트러졌다간 문제가 있는 혈관에만 내공을 보내지 못하는 불상사가 벌어질 수 있었다.
내공은 분명 사기적인 힘이었지만 통제의 어려움.
그리고 잘못 사용했을 때의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해내야 해.
환자와 약속했잖아?
무사히 수술을 마치겠다고.
20대 초반에 다리에 후유증이 남는다면 남은 세월이 얼마나 괴롭겠어.
준후는 주변이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내공 조영술에 혼신을 힘을 쏟았다.
환자의 회복만을 기원하는 일념으로.
그렇게 30분 같은 3분이 지났다.
준후는 가만히 수술 부위에서 손을 뗐다.
입가에 피어나는 미소.
환자의 구획압이 감소하지 않은 이유를 찾아낸 것이다.
환자의 정강이 동맥에서 뻗어 나가는 모세혈관들이 출혈을 일으켰다.
해당 부위는 총 4곳.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출혈은 혈전(피딱지, 피떡)으로 굳어 있었고.
이 혈전들로 인한 압력이 수술 부위에 아직 영향을 주고 있었다.
상황을 쉽게 정리하자면 이랬다.
1) 골든타임 언저리에 수술이 시작됐기에 모세혈관들은 이미 출혈을 일으켰다.
2) 수술을 통해 주요 동맥과 신경들의 괴사는 막았지만 먼저 발생한 출혈이 응고되면서 일정한 구획압을 유지 중이다.
이번에도 내공의 도움을 받는군.
이래서 무림에서의 경험을 무시할 수가 없단 말이지.
무림에서 하도 다양하고 급박하고 목숨이 걸린 일을 경험했던 덕분일까.
준후는 명호나 태웅과 달리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당황한 것도 잠시뿐이었다.
금방 마음을 추스른 준후는 혈관을 의심했는데 혈관 말고는 딱히 의심할 곳이 없었던 것이다.
근막 절개술은 완벽했으니까.
그래서 확인 차 내공 혈관 조영술을 한 결과.
정강이 동맥 모세혈관에 위치한 혈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다음부터인데…….
치프를 어떻게 설득하면 좋을까.
“치프, 초음파 검사를 해보는 건 어떨까요?”
준후는 넌지시 검사 제안을 했다.
“초음파 검사? 뜬금없이?”
“초음파 한다고 뭐 나올 게 있겠어? 애초에 급성 구획증후군은 CT나 MRI로도 진단이 힘든데.”
예상대로 명호와 태웅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급성 구획증후군에 초음파 검사를 하는 케이스가 거의 없으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두 사람은 혈전의 존재를 몰랐다.
초음파 검사의 의의가 급성 구획증후군이 아닌 혈전의 크기 및 위치를 발견하기 위함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준후만큼은 현 사태의 내막을 알았다.
그래서 물러설 수 없었다.
“초음파로 구획의 구조를 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
“경골과 비골, 근막과 혈관을 확인하면 놓치고 있었던 걸 발견할지도 몰라요.”
“구조적인 문제는 없어. 그건 집도한 내가 제일 잘 알아.”
“문제가 없다면 구획압이 더 떨어졌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분명 어딘가 놓친 부분이 있을 거예요.”
“…….”
“그걸 메워줄 게 초음파 검사입니다.”
준후는 열변을 토했다.
환자의 상태가 양호해졌다고는 해도 언제까지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문득 구획압 측정기를 응시하니 구획압이 37mmHg로 살짝 상승한 수치를 보이기도 했고.
“야, 서준후 오늘따라 세게 나온다?”
태웅이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일 잘하는 건 알겠는데 너무 나대는 건 아니지.”
“저는 그저 할 수 있는 건 다해봤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그래도 초음파는 쌩 오바인데. 치프, 어떻게 하실래요?”
태웅이 명호의 의견을 물으며 명호를 쳐다보았다.
준후의 시선도 명호에게 머물렀다.
최종 결정권자는 누가 뭐래도 집도의인 명호였다.
* * *
“치프, 준후한테 너무 오냐오냐하는 거 아닙니까?”
태웅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결국 초음파 검사를 해보자는 준후의 의견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준후가 초음파 검사기기를 가지러 가면서 이제 수술방에는 태웅과 명호가 남았다.
“인턴이 벌써부터 너무 기어오르는 것 같은데.”
“말은 또 왜 그렇게 해?”
“사실이 그렇잖아요. 인턴이 뭘 안다고 훈수를 둡니까. 훈수를. 저희가 인턴 때는 수술방에서 숨도 못 쉬었는데.”
“그럼 네가 발전적인 제안을 내놓든가. 덮어놓고 기다리자고 했던 주제에.”
명호가 태웅에게 핀잔을 주었다.
솔직히 초음파 검사가 못마땅한 건 명호도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명호의 경험에 따르면.
급성 구획 증후군 수술 도중, 초음파 검사를 하는 건 손에 꼽힐 정도였다
하지만 별수 없지 않은가.
마냥 손 놓고 기다릴 수는 없고.
다시 한번 살펴본 수술 부위는 흠잡을 곳이 없었으니까.
그래서인지 몰라도.
뭐라도 하는 게 좋지 않으냐.
준후의 그 한 마디가 명호의 마음을 움직였다.
확실히 지금은 뭐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초음파에서 아무 이상 없으면 제가 준후 좀 갈궈도 됩니까?”
“이상이 없으면 없는 거지. 그걸로 갈구긴 왜 갈궈?”
“주제를 모르고 나대는 것 같아서요.”
“적당히 해. 너까지 동석이한테 물들지 말고.”
잡담을 나누는 사이.
준후가 초음파 기기를 가지고 수술방에 복귀했다.
“그럼 어디 한 번 확인해 볼까?”
명호의 손에 초음파 스틱이 들렸다.
명호는 수술 부위와 모니터를 번갈아 살피며 검사를 시작했다.
물론 초음파 검사 결과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던 명호였다.
궁여지책에 너무 많은 걸 기대하면 안 되는 법이니까.
초음파 검사에서 이상이 없을 경우 바로 교수에게 연락을 취할 작정이기도 했고.
“어…….”
명호의 입에서 별안간 탄식이 터졌다.
종아리 동맥 인근에서 하얀 음영들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치프. 방금 음영 있었는데요? 제가 잘못 본 거 아니죠?”
“제대로 봤어. 나도 봤고.”
명호는 방금 스쳐 지나갔던 혈맥에 황급히 초음파 스틱을 고정시켰다.
그러자 음영들의 모습이 더욱 또렷해졌다.
손톱만 한 크기의 하얀 음영들.
위치와 크기를 생각하면 혈전임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혈전이 구획을 막고 있어서 구획압이 안 떨어졌구나.”
“그러게. 진짜 준후 판단이 맞았어.”
명호의 시선이 준후를 향했다.
마스크를 써서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준후의 눈빛은 담담했다.
마치 이런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확실히 평범한 인턴은 아니란 말이지.
“야, 서준후 한 건 했다? 사실 나도 초음파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는데.”
명호가 갑자기 태세전환을 했다.
“웃기는 소리 하네. 방금까지 준후를 욕했으면서.”
“제가 언제요? 전 그런 적 없는데요?”
명호의 지적에 태웅이 오리발을 내밀었다.
어쨌거나 이걸로 구획압이 떨어지지 않았던 이유는 밝혀졌다.
이유를 알았으므로 치료도 가능했다.
혈전이 있는 부위에 절개창을 내서 혈전을 제거해 주면 되리라.
명호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10번 블레이드.”
소독 간호사에게 받은 메스로 명호는 종아리 동맥 인근에 4센티미터 길이의 절개창을 냈다.
절개창 안쪽으로 쑥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신경과 동맥을 피해가며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더듬거렸다.
잠시 후 손가락 끝에 닿은 말캉한 감촉의 혈전.
명호가 절개창에서 손가락을 빼자 새끼손톱만 한 혈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녀석이 바로 구획압 감소를 막았던 원흉이었다.
텅!
명호는 혈전을 곡반 위에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초음파로 확인한 인근 부위의 혈전까지 말끔하게 제거했다.
“구획압 다시 측정할게요.”
처치를 지켜보던 준후가 측정기의 바늘을 다시 수술 부위에 찔러 넣었다.
스태프들의 시선이 일제히 측정기 눈금에 집중되었다.
환자의 기존 구획압이 35mmHg.
현 구획압이 단번에 15mmHg.
원인을 제거했더니 수치가 드라마틱하게 감소했던 것이다.
5분 정도 후 재측정하자 환자의 구획압은 7mmHg까지 떨어졌다.
정상 범위였다.
미생이었던 수술이 완생으로 거듭난 셈이다.
스태프들이 들뜬 모습으로 기뻐하는 동안.
준후는 묵묵하게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사실 준후는 수술에 성공했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 수술이 성공해서 환자의 다리가 무사하다는 사실이 더 기뻤다.
준후에게 수술이란 자신의 재능을 뽐내는 장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보듬는 것이었다.
무림에서의 준후는 다치고 죽어가는 동료들 앞에서 한없이 무력했고 한없이 무력해서 괴로웠으니까.
하지만 현대의 준후는 더 이상 무력하지 않았다.
무공과 내공.
현대 의학으로 단단히 무장을 했기에.
나는 약속 지켰어요.
이젠 당신이 약속을 지킬 차례예요. 앞으로 건강한 다리로 행복하게 사세요.
준후의 입가에 뒤늦게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