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81화
제14장 구원(1)
정형외과 컨퍼런스 룸.
조 교수 정윤이 레지던트들에게 근막 절개술에 대한 노티를 듣고 있었다.
차를 몰고 올 병원에 올 때와 달리 재윤의 표정은 한결 밝았다.
‘그때만 생각하면 아찔했지.’
1시간 20분 전, 급성 구획 증후군 환자가 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재윤은 아차 싶었다.
집도해야 하는 당직 펠로우를 자신의 집 근처로 호출했던 것이다.
원래라면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다.
원래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하지만 당직 펠로우가 수련을 그만두고 싶다고 하며 우울증을 호소하니 별도리가 없었다.
당직 중이라도 불러서 위로를 할 수밖에…….
부디 응급 환자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다행히 재윤의 위로로 당직 펠로우가 마음을 고쳐먹었는데 그때쯤 병원에서 응급 콜이 와버렸다.
재윤은 그 즉시 전화를 끊었다.
자동차를 몰고 허겁지겁 병원으로 이동했다.
교통사고 현장에 발이 묶였던 건 덤이었고.
하지만 하늘이 도왔을까.
뒤늦게 병원에 도착하자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했다.
“괜히 나 때문에 다들 고생이 많았구나.”
“교수님 잘못이 아닙니다. 제가 앓는 소리를 해서 그런 건데요.”
재윤의 말에 당직 펠로우가 한 마디를 보탰다.
“넌 잘못이 없어. 수련이 힘든 건 죄가 아니란다.”
재윤은 곁에 앉은 당직 펠로우를 부드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어깨도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재윤 역시 펠로우(임상강사) 시절을 겪어봐서 잘 알았다.
펠로우란 이름만 거창하고 손에 쥐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직급이었다.
수술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교수들 논문 뒤치다꺼리를 하고.
당직 근무도 서고 등등.
문제는 그렇게 개고생을 한다고 해서 교수 자리가 보장된 것도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건 그렇고 환자를 진단했던 사람이 준후라고?”
재윤의 시선이 준후에게 옮겨졌다.
“네. 교수님. 준후가 아니었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습니다. 아예 수술조차 못 했을 테니까요.”
“그거야 그렇지.”
재윤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급성 구획증후군은 놓치기 쉬운 질환인데 어떤 방식으로 진단했니?”
재윤의 질문에 스태프들의 시선이 일제히 준후에게 쏠렸다.
다들 준후가 급성 구획증후군을 진단했다는 사실만 알았지, 구체적인 진단 과정은 알지 못해서 궁금했던 것이다.
“그게…… 일단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습니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다라…….”
“네. 타 정형외과에서 진료를 받고 깁스를 한 환자에게서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질환은 급성 구획 증후군이라 생각했습니다.”
“…….”
“일단 그 의심을 깔고 진찰을 이어나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환자에게 발가락을 움직여보도록 시켰더니 가동 범위가 좁았고 통증도 호소했습니다.”
“캐스트를 한 환자면 그 정도 증상은 넘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재윤이 다시 물었다.
준후의 설명에는 아직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딱 꼬집어 설명드릴 수는 없지만 캐스트가 지나치게 타이트하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그다음에는?”
“번거롭더라도 캐스트를 제거하는 편이 좋겠다 싶어서 캐스트를 해체하고 구획압을 측정했습니다.”
준후의 설명은 차분하고 논리 정연했다.
인턴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아마 보통의 인턴이었다면 진통제 정도를 처방해서 환자를 집에 보냈으리라.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다.]
아무래도 준후의 남다른 점 중 하나는 이 사고방식인 듯했다.
이런 사고방식이라면 자연스럽게 진찰이 꼼꼼해지고 환자의 증상 하나 놓치는 법이 없어질 테니까.
‘그럼 이 친구가 바로 이동훈 교수님이 눈여겨 보고 계신다는 그 친구구나.’
재윤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한민국 3대 정형외과 명의인 이동훈 부 교수.
이동훈은 얼마 전 재미있는 인턴을 발견했다고 한다.
한 인턴이 스크럽을 들어왔는데.
초롱초롱한 눈으로 수술을 지켜보더라.
수술용 망치를 줘 봤더니 수술용 나사를 망치질 한 번에 박아버리더라.
그래서 그 인턴이 정형외과 전공을 선택하면 제대로 키워보고 싶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름은 못 들었지만 그 인턴이 준후임은 쉽게 추측이 가능했다.
낭중지추.
날카로운 송곳은 결국 튀어나와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법이었다.
“수술 막바지에 초음파 검사를 제안한 것도 준후입니다.”
“초음파 검사를?”
“네. 구획압이 안 떨어져서 교수님께 전화를 드려야 하나 싶었을 때였습니다.”
명호가 말을 이었다.
“준후가 초음파 검사를 제안했고 검사를 통해 혈종을 발견했습니다.”
“허…… 놀랍구나.”
할 말은 많았지만 명호는 거기서 멈췄다.
준후를 너무 띄워주는 것은 오히려 준후에게 좋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준후가 잘해줬다만…… 명호와 태웅이 너희들의 공도 컸다. 명호는 나를 대신해서 집도를 했고 태웅이는 그런 명호를 잘 도왔으니.”
“아닙니다. 교수님.”
“저는 딱히 한 일도 없는데요.”
겸손해하는 두 사람을 지켜보며 명호가 말을 계속했다.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니 오늘 야식은 내가 사마. 족발 어떠니?”
* * *
정형외과 당직실.
의국 스태프들은 족발을 먹으며 근막 절개술에 대한 회포를 풀고 있었다.
화제의 중심은 단연 준후였다.
수술의 처음을 연 사람도.
마지막을 장식한 사람도 준후였으니까.
“준후 같은 애는 처음 봐요. 제가 캐스트랑 스플린트 하는 거 보자마자 똑같이 따라 했거든요.”
“…….”
“그뿐만이 아니에요. 소아 병동에 건우라는 소아 환자가 있는데. 그 아이가 학대당하는 것까지 잡아냈다니까요.”
“전적이 화려하네. 좋은 쪽으로.”
현진의 말에 명호가 준후를 빤히 쳐다보았다.
준후는 머쓱해서 시선을 피했다.
딱히 보상이나 주변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 한 행동은 아니었다.
준후는 그저 괴로워하는 사람을 모른 척할 수 없는 성격의 소유자였을 뿐이었다.
그래서 타인을 돕는 것이었다.
준후의 개입으로 환자가 건강해진다면 준후는 그 사실만으로도 행복하곤 했다.
“그런 준후한테도 유일한 단점이 있어요.”
“뭔데?”
“가끔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 같아요. 혼자서 가위바위보를 한다니까요?”
“엥? 가위바위보?”
“네. 준후 네가 직접 말해 봐.”
현진의 추궁에 준후는 난감해졌다.
왼손을 잘 쓰기 위해 양수 호박 기술을 익히는 중이었는데 그게 주변 사람에게는 괴짜처럼 보였으니까.
“그게…… 나 자신과의 싸움이랄까요?”
“나 자신과의 싸움?”
“네. 양손으로 가위바위보를 했을 때, 어느 쪽이 더 많이 이길지 궁금하신 적 없어요?”
준후는 어색하게 웃으며 본인을 변호했다.
심각하게 궁색한 말이지만 딱히 양수 호박 기술을 설명할 길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난 없는데?”
“나도.”
명호와 현진이 전혀 공감을 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준후는 더 난감해졌다.
강백통.
그 괴짜는 왜 이런 식으로 무공을 만들어서 사람을 곤란하게 만든 담.
“하하하. 저는 그게 궁금하더라고요. 그래서 가끔씩 시험을 해보곤 해요.”
“으음…… 난 준후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의외로 명호가 준후의 편을 들었다.
“치프, 진심이세요?”
“원래 천재는 괴짜라고 하잖아. 그런 맥락에서 보면 이상할 게 없지.”
“그래도 이건 괴짜 수준을 넘어선 것 같은데요.”
“그런 건 일반인의 시점에서 판단하면 안 돼.”
두 사람이 갑론을박하는 동안.
준후는 대놓고 양수 호박 기술을 연마했다.
에라, 모르겠다는 식으로.
이상한 놈 취급받았으니 눈치 보지 말고 수련이나 하자 싶었던 것이다.
해석에 따라서는 이렇게 공론화된 게 나은 걸지도 몰랐다.
“이야, 이젠 우리 앞에서 대놓고 가위바위보를 하네?”
현진이 준후를 발견하고 혀를 찼다.
“어느 손이 이길지 또 궁금해져서요.”
“가위바위보 승률은 어떤 데?”
“왼손 승률이 1-2할 정도 됩니다. 오른손까지 더하면 100퍼센트죠.”
“따지고 보면 질 수가 없는 게임이구먼.”
준후의 농담에 명호가 키득키득 웃었다.
잠시 후 명호와 현진이 준후처럼 양손으로 가위바위보를 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물론 두 사람은 제대로 가위바위보를 하지 못했다.
직접 해보면 알 것이다.
자신의 양손으로 가위바위보를 하면 손이 얼마나 꼬이는지.
양손이 얼마나 버벅거리는지.
천천히 하면 그나마 장단을 맞추겠지만 조금만 더 속도를 올려보시라.
머리도, 손도 바보가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드르르륵.
당직실 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이는 동석이었다.
준후에게 두 번째 분근착골술을 당하고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했다.
“…….”
준후를 발견한 동석의 낯이 창백하게 질렸다.
“안 그래도 잘 오셨네요. 선배랑 할 이야기가 있었는데.”
준후는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잠깐 둘이서 이야기 좀 하죠?”
* * *
컨퍼런스 룸에서 준후는 동석을 마주 보고 있었다.
둘 사이의 분위기는 냉랭하면서도 팽팽했다. 그동안 꼬였던 악연들이 빚어낸 것이었다.
“어때요? 직접 당하고 나니까 정신이 번쩍 듭니까?”
준후가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후배와 인턴들에게 상습적으로 손찌검을 했던 동석이었다.
심지어 준후를 등 뒤에서 기습까지 했던 동석이었다.
분근착골술을 당해도 쌌다.
“너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왜 내가 몸도 못 움직이고 고통받아야 하냐고?”
동석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따졌다.
“딱히 설명할 필요는 못 느끼겠네요. 알아서 생각하세요.”
“이이이익! 너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인턴 주제에 감히 레지던트를 폭행해?”
“하…… 곱게 말하니까 말귀를 못 알아 들으시네. 그럼 레지던트는 인턴을 때려도 되고?”
“난 너한테 일방적으로 맞았어.”
“다른 인턴들은 당신한테 일방적으로 맞았어.”
준후는 아예 동석에게 반말을 했다.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린 걸 보면 동석은 싹수가 글러 먹었다.
이런 부류를 갱생하고 교화시킨다고 애썼던 정파의 동료들을 생각하면 갑자기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잡초는 제거해야지.
우쭈쭈 달래야 할 것이 아니었다.
“긴 말하기 싫으니까 본론부터 꺼낼게. 앞으로 다시는 레지던트나 인턴들한테 손대지 마.”
“네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동석이 코웃음을 쳤다.
“딱 한 달. 네 수련 기간만 지나면 정형외과 군기는 다시 돌아올 거야. 현진이 새끼도 정신무장을 단단히 시켜줄 거라고.”
“할 수 있으면 한번 해봐.”
“왜 타과에서 수련하다가 우리 과에 오기라도 하시려고?”
준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동석의 폭행 사실이 귀에 들어오는 순간.
준후는 가능한 빨리 정형외과를 찾아 동석에게 분근착골술을 펼칠 계획이었다.
그래야 거듭되는 폭행의 굴레를 끊을 수 있으리라.
준후도 원치는 않는다만.
오로지 무력으로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경우도 존재했다.
바로 지금처럼.
“X새끼. 졸X 정의로운 척하네.”
동석이 빠드득 이를 갈며 말을 이었다.
“내 윗 선배부터 나까지 다 맞으면서 수련했어. 그게 뭐 대수라고 지랄인데?”
“착각하지 마. 네가 맞았다고 남을 때릴 수 있는 권리가 생기는 건 아니니까.”
“어디서 격투기를 좀 익혔다고 유세 떠나 본데. 난 너한테 무조건 복수한다.”
“지금 해.”
“…….”
“지금 해보라고.”
준후가 살벌하게 노려보자 동석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지금까지 뻗대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또 게거품 물고 기절하게 해줄까?”
준후는 험상궂은 표정으로 가운 주머니에 있던 볼펜을 꺼냈다.
볼펜 앞부분을 내공으로 감싼 후 다트처럼 던졌다.
휘이이익.
퍽!
놀랍게도 볼펜이 동석의 얼굴을 스쳐 벽에 박혀 버렸다.
벽에 박힌 볼펜을 확인한 동석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버렸고.
방금 벌어진 일을 믿기 힘들겠지.
터벅. 터벅.
준후는 동석에게 다가간 후 무심하게 벽에 박힌 볼펜을 빼냈다.
그리고 겁에 질린 동석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동석아, 처신 잘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