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82화
제14장 구원(2)
정형외과 당직실.
천재와 이상한 놈 사이에 걸쳐 있던(?) 준후는 대놓고 양수 호박 기술을 익히고 있었다.
어차피 아까 야식을 먹으면서 양수 호박 기술이 공론화되지 않았던가.
이젠 동료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수련 4일 차.
준후는 양손 가위바위보는 전혀 진전이 없어 보였다.
왼손의 승률은 여전히 2할 정도.
하지만 가위바위보를 하는 속도가 전보다 2배보다 빨라졌다. 속도에 비해 손을 버벅거리는 일도 많이 줄어 있었다.
이런 수련으로 왼손에 숙달할 수 있을까.
수련은 언제까지 해야 할까.
의심과 불안이 찾아왔지만 준후는 물리쳤다.
양수 호박 기술을 전해준 은거기인 강백통은 틀림없는 괴짜였다.
하지만 적어도 거짓말쟁이는 아니었다.
무위가 현경에 다다랐으니 믿고 따를 만했다.
준후는 수련이 답답할 때마다 이동훈 교수를 떠올렸다.
대한민국 정형외과 3대 명의이자 얼마 전 어시스트했던 수술에서 왼손을 자유자재로 쓰던 이동훈을.
이동훈을 등대 삼으니 고된 수련도 참을 수 있었다.
목적지를 알 수 없는 것.
목적지는 알지만 가는 길이 고된 것.
사실 더 괴로운 건 전자라고 준후는 생각했다.
“벌써 몇 시간째인지 모르겠네. 안 지겹냐?”
같이 당직 근무 중인 현진이 준후를 보며 한탄했다.
“당연히 지겹죠.”
“지겨운 일은 왜 하는 건데?”
“무슨 일이든지 익숙해지고 숙달하려면 반복이 필요하잖아. 안 되면 될 때까지 해야죠.”
“내 말은 가위바위보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냐는 거지.”
“당연히 있어요. 선배는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준후는 수련을 멈추고 창밖을 응시했다.
창밖에서 푸르스름한 새벽빛과 환한 달빛이 흘러들고 있었다.
당직실은 운치 있고 고요했다.
필요한 업무는 2시간 전에 마쳤으며 응급실 콜도 없었다.
응급의학과 당직 근무에 비하면 정형외과 당직 근무는 천국이었다.
“그러고 보니 준후 너, 오늘 오프지? 계획은 있어?”
“오랜만에 집에 가보려고. 다른 건 없어요.”
인턴 근무를 하는 동안.
통화와 영상 통화는 자주했지만 집에 들른 적은 없는 준후였다.
그래서 모처럼 부모님을 뵐 생각이었다.
집에 새 식구도 생겼다고 하니 얼굴도 좀 보고 말이다.
“아. 참 그걸 안 물어봤네? 저녁에 동석 선배랑 따로 나갔잖아? 그때 무슨 이야기 했어?”
현진이 화제를 돌렸다.
“동석 선배랑요? 뭐 이런저런 인생 이야기?”
“그 인간이 아무 짓도 안 했어? 난 네가 맞는 줄 알고 조마조마했는데.”
“그럴 리가요. 당한 쪽이라면 동석 선배죠.”
준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까 회의실에서 대화할 때.
준후는 동석의 기를 완전히 꺾어놓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준후가 자리를 비웠을 때 동석의 처신이었다.
그때도 동석이 후배들에게 난폭하게 군다면?
준후는 동석에게 더 깊은 지옥을 맛보여 줄 계획이었다.
“만약에 동석 선배가 선배를 때리려고 하면요.”
“야, 무슨 말을 그렇게 살벌하게 하냐. 말이 씨가 된다.”
“씨가 안 되는 방법을 알려드리고 있는 거예요.”
준후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저한테 이르겠다고 말하세요.”
“뭐, 엄마한테 이른다. 그런 느낌인가?”
“네. 확실히 효과가 있을 거예요.”
“알았어. 기억은 해둘게.”
현진과 잡담을 끝내고 준후는 오전 5시까지 양수 호박 기술을 수련했다.
짝턴 현우를 깨워 오전 루틴을 실시했다.
평소와 달리 준후는 처치에 왼손을 사용했다.
드레싱 같은 비교적 쉬운 처치는 왼손으로 소화할 수 있었지만.
ABGA 채혈이나 비위관 삽관, 폴리 카테터 삽입 등은 오른손을 사용해야 했다.
왼손 숙달의 길은 아직 멀고 험했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지.
단기 목표는 이번 달 안으로 왼손으로 ABGA 성공이고.
장기 목표는 올해 안으로 왼손을 완전히 마스터하는 거다.
준후의 목표는 손에 잡힐 듯 선명했다.
오전 루틴을 끝내고 찾아온 오전 컨퍼런스.
준후는 스태프들에게 한 번 더 주목을 받게 되었다. 건우의 아동학대를 밝힌 사람이 준후였기 때문이다.
-서 선생, 눈썰미가 좋네. 아무도 눈치를 못 챘던 것 같은데.
-사진으로 증거를 남기고 바로 경찰을 부른 것도 잘했어. 덕분에 처리가 빨라졌으니까.
-레지던트들도 서 선생 좀 본받아요. 아무리 업무가 바빠도 환자한테 소홀하면 안 되지.
교수들의 쏟아지는 칭찬에 준후는 멋쩍게 웃기만 했다.
고래는 칭찬을 들으면 춤을 춘다는데 준후는 칭찬만 들으면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컨퍼런스가 끝난 뒤 회진이 이어졌다.
병동이 밤새 평화로웠으므로.
회진 역시 평화로웠다.
과장은 환자들과 경과를 주고받으며 추가로 필요한 처방을 내렸다.
준후는 처방들을 수첩에 적었다.
마지막으로 찾은 병동은 건우의 병동이었다.
큰일을 겪고도 건우는 제법 의젓한 모습을 보였다.
과장의 질문에 대답도 곧잘 했다.
의지할 수 있는 아버지가 곁에 있고.
품에 꼭 안고 있는 선비 캐릭터 인형도 안정감에 한몫하고 있는 듯했다.
앞으로 살면서 많은 고난이 닥치겠지만 그 모든 것을 건우가 씩씩하게 이겨나가기를 준후는 기도했다.
회진이 끝나면서 병동 업무의 본격적인 막이 올랐다.
준후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지만.
준후는 숙직실을 찾아 모처럼 가운을 벗고 일상복을 입었다.
“뭐지?”
휴대폰을 확인한 준후의 눈이 커졌다.
회진을 도는 사이.
연락이 두 통이나 와 있었다.
누구지?
이른 아침부터?
* * *
휑하네.
현진은 당직실을 훑어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준후가 오프라서 그런지.
준후의 존재감이 커서 그런지.
준후 없는 당직실이 오늘따라 유독 황량하고 넓어 보였다.
“선우현.”
“네. 선배.”
“오늘 준후 오프인 거 알지? 일 똑바로 해라. 저번처럼 밍기적거리면 혼난다.”
“네. 선배.”
“대답은 잘해요. 대답은.”
인턴 우현이 병동 잡을 하기 위해 당직실을 떠났고 현진은 자리에 남았다.
타다다닥.
현진은 바쁘게 키보드를 두들겼다.
레지던트의 일은 끝이 없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끝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다.
오늘 아침도 마찬가지였다.
회진 때 교수님들이 내린 처방을 입력해야 했고.
오전에 퇴원하는 환자들의 퇴원 기록지를 작성해야 했고.
중환자실 라운딩도 돌아야 했다.
눈 뜨고 나면 일은 항상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래도 2년 차가 되면.
부사수가 생기면 그나마 좀 나아지겠지?
현진은 내년을 기약하며 기운을 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드르르륵.
당직실 문이 열리고 동석이 현진에게 다가왔다.
동석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현진은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자동반사와 같은 반응이었다.
이렇게 거리가 좁아졌을 때 종종 구타를 당하곤 했으니까.
“강현진. 내가 시킨 수술 기록지 작성, 다 했어?”
“그…… 그게…… 지금 작성할 생각입니다.”
현진은 마른 침을 꼴깍 삼키고 대답했다.
수술 기록지 작성은 본래 3년 차의 업무였지만 현진이 종종 대신하곤 했다.
동석이 도끼눈을 뜨고 부탁, 아니 협박을 하는데 안 들어줄 수가 있나.
문제는 현진이 동석의 부탁을 깜빡했다는 것이었다.
“새끼가 빠져 가지고는. 당직 근무 때 뭐했냐?”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하겠습니다.”
“당직 때 뭐했냐고 묻잖아. X발, 너도 내가 만만해 보이냐?”
동석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난동을 부리기 일보 직전의 표정이었다.
“X만 한 게 아침부터 기분 싹 잡치게 만드네. 야, 너 일어나.”
동석이 의사 가운 자락을 걷으며 말했다.
평소대로의 전개.
오늘은 귀싸대기를 맞을까, 아니면 정강이를 맞을까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구타에 체념하던 그 순간.
현진은 문득 준후의 조언을 떠올렸다.
-만약에 동석 선배가 선배를 때리려고 하면요. 저한테 이르겠다고 말하세요.
이 상황에 준후를 들먹이는 게 효과가 있을까 했지만, 그래도 현진은 한 번 질러보기로 했다.
언제까지나 맞고 살 수만은 없지 않은가.
“선배.”
“왜?”
“저 때리면 준후한테 이를 겁니다. 그래도 됩니까?”
현진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내뱉었다.
그런데 말이다.
현진의 되지도 않은 협박에 동석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뭐야?
준후를 들먹이는 게 정말 효과가 있다고?
더 화를 내면서 더 때릴 줄 알았는데?
말에 효과가 있는 것 같아서 현진은 용기 있게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지금 준후한테 전화할까요? 나간 지 얼마 안 돼서 금방 돌아올 것 같은데.”
“아…… 아니, 됐다.”
동석이 온순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난폭했던 사냥개가 한순간에 시고르자브종으로 변한 느낌이었다.
“수술 기록지는 내가 작성할 테니까 넌 일 봐.”
순순히 물러나는 동석을 지켜보며 현진은 씨익 웃었다.
드디어 악당 동석을 물리칠 마법의 주문을 냈구나.
주문의 이름은 바로 서준후였다.
* * *
왜 이렇게 귀가 간지럽지?
준후는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병원 로비로 나왔다.
병원 로비는 오전부터 북적거렸다.
출근하는 병원 스태프들, 진료를 보기 위해 미리 대기 중인 환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병동과 수술방에서 볼 수 없는 활기가 낯설었다.
준후는 가까운 벤치에 앉아 휴대폰을 확인했다.
회진 중에 온 두 통의 연락.
그중 하나는 해나의 연락이었다.
해나는 노래에 재능이 있는 초등학생으로 해나 할머니의 병원비를 대주면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선생님. 저 오디션 합격했어요. 정식으로 연습생이 됐어요. 감사합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할게요.]
문자를 확인하고 준후는 흐뭇하게 웃었다.
해나가 연습생이 되면서 해나의 집안에 한 줄기 빛이 생겼음을 의심치 않았다.
연습생이 됐다고 만사형통은 아니겠지만 해나의 재능이면 잘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휴대폰은 소속사에서 맞춰준 건가?
휴대폰이 없었던 걸로 아는데.
잘됐네.
또래들은 다 가지고 있는 휴대폰이 없어서 답답했을 텐데.
준후는 축하 메시지를 보내고 다음 연락을 확인했다.
이번 연락의 주인공은 지애였다.
초중학교 동창이자 배우 활동 중인 친구.
해나에게 소속사 오디션을 연결해 준 사람도 지애였다.
[오늘 뭐 해? 시간 괜찮으면 저녁에 볼래?]
[아니, 대 배우님께서 나를 다 찾는다고?]
[그러니까 영광인 줄 알아. ㅋㅋㅋ]
지애의 답장이 빨랐다.
아무래도 오늘은 시간이 넉넉한 모양이었다.
오프기도 하고 해나 건으로 고마움을 표시할 겸 만나보는 것도 좋을 듯했다.
[암요, 영광인 줄 알겠습니다. ㅋㅋㅋ. 그럼 저녁 7시에 중학교 앞에서 콜?]
[콜!]
지애와 약속을 잡고 로비를 살피던 준후가 휴대폰의 카메라를 켰다.
모처럼 주어진 자유 시간.
뉴튜브 촬영을 게을리할 수 없었다.
오늘은 병원 내부를 돌아다니며 이곳저곳을 살펴보는 투어 컨셉의 영상을 찍어볼까 했다.
채널의 규모와 조회수는 아직 초라하고 볼품없었지만.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뉴튜브가 떡상할 수 있지 않을까.
무림에서 말하는 기연을 얻거나, 귀인을 만나거나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천운을 붙잡는 건 평소의 끈기와 성실함이라는 것을 준후는 무림에서 배웠다.
“안녕하세요. 구독자 여러분. 닥터 서튜브의 서준후입니다. 오늘은 신원대학교 병원을 둘러볼 건데요.”
“…….”
“빅4병원 중 한 곳인 신원대학교 병원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실 분이 많을 겁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직접 발품을 팔면서…….”
준후는 멘트를 하며 병원 로비를 걷기 시작했다.
휴대폰으로 병원을 촬영하며.
종종 휴대폰에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준후 뉴튜브 영상의 백미는 누가 뭐래도 준후의 외모(?)였으니까.
그런 준후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신기하고 이상하게 쳐다봤지만 준후는 개의치 않았다.
뉴튜버라고 생각하니까 부끄럽지 않은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