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83화
제14장 구원(3)
봄이구나.
병원을 나와서 걷기 시작한 준후가 처음 한 혼잣말이었다.
봄이 왔다는 건 진작 알았지만 봄을 느낀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산뜻하고 포근한 바람이 살랑살랑 살갗을 스쳤다.
푸른 하늘 위에 걸린 햇빛은 따사로웠다.
환경 정비 사업으로 가꾸고 있는 화단에는 노란 개나리와 자주색 진달래가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하루빨리 의사가 되고 싶다고.
시간을 건너뛰고 싶다고 마음먹었던 게 엊그제 같거늘.
준후는 벌써 인턴 2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아직 인턴 생활을 평가하기에는 이르지만 준후는 인턴 생활이 흥미롭고 즐거웠다.
각 과가 주는 매력은 다 달랐다.
응급의학과에는 응급의학과의 매력이 있었고.
정형외과에는 정형외과의 매력이 있었다.
앞으로 수련할 과도 틀림없이 그 과만의 매력으로 준후를 사로잡을 것이다.
그리고 인턴 수련이 끝나는 순간, 긴 방황도 끝날 것이다.
전공할 과목을 선택하게 되리라.
휘이이잉.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을 타고 날아온 민들레 홀씨가 준후의 옷깃에 달라붙었다.
이거 천식 환자하고 알레르기 환자들이 고생 좀 하겠네.
그런 생각을 하고 준후는 피식 웃어버렸다. 정말 의사가 다 된 모양이었다.
민들레 홀씨에서 낭만이 아닌 환자를 떠올리다니…….
준후는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이동했다.
타인에게는 지극히 일상적인 행동이었지만 그 일상이 준후에게는 비 일상이었다.
병원 바깥의 세상은 적어도 외견상 너무 평화로웠다.
환자가 쓰러지거나 피를 흘리는 것도 아니었고.
코드 블루를 알리는 다급한 방송이 흘러나오는 것도 아니었고.
환자 곁을 전전긍긍 지키는 보호자도 없었다.
그렇게 보면 세상의 모든 아픔은 오로지 병원에만 몰린 것 같기도 했다.
이런저런 잡념을 하던 중.
준후는 제트 코인으로 구입한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다.
-부동산 경기 호재로 우리 아파트값이 2억 정도 올랐더라.
얼마 전 통화를 나눴던 어머니가 했던 말이었다.
부동산 안정은 대한민국의 큰 숙제 중 하나인데 준후는 거기까지 손을 댈 수는 없었다.
메스로 부동산을 가를 수는 없었으니까.
띵동!
집 앞에 도착해서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열리고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 아들 이게 얼마 만이니? 어디 한번 안아 보자.”
“안 그래도 제 얼굴 까먹으시기 전에 찾아왔죠.”
준후는 너스레를 떨며 현관에서 어머니와 포옹을 나눴다.
어머니는 건강해 보였고 실제로도 건강할 것이다.
식당 일을 반나절만 다니시고.(게다가 오늘은 준후가 쉬는 날이라 식당에 나가시지 않았다.)
준후는 인턴 봉급의 3분의 2를 어머니에게 드리고 있었다.
요즘 어머니는 걱정 없이 저축하는 재미로 산다고 했다.
“얘가 똘똘이예요?”
준후는 어머니와 포옹을 풀며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이름 잘 짓지 않았니? 정말 똘똘해 보이지 않아?”
“눈이 초롱초롱하네요.”
새 식구 똘똘이가 꼬리를 흔들며 준후를 반기고 있었다.
준후가 인턴 생활을 시작하면서.
부모님은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반려견을 입양했다고 한다.
이름은 똘똘이.
견종은 웰시코기였다.
똘망똘망한 눈빛과 콩자반 같은 코가 매력적인 아이였다.
사람을 좋아하는지 낯선 준후를 보고도 경계하는 기색이 없었다.
“귀여운 녀석.”
준후는 똘똘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방으로 들어갔다.
편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확실히 집이 병원보다 편하긴 했다.
병원에서는 느낀 적 없던 나른함과 안온함에 몸이 늘어졌다.
“점심 먹기에는 애매하니까 과일이라도 좀 먹고 있으렴.”
어머니가 준후에게 과일이 담긴 쟁반을 건넸다.
어머니들은 왜 자식들을 그렇게 뭐든 먹이려고 할까.
자식에게 뭐라도 주고 싶은 게 분명 어머니의 마음일 것이다.
과일을 먹으며 준후는 어머니와 잡담을 나눴다.
최소 나흘에 한 번꼴로 어머니와 통화를 나눴기에 가족 일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었다.
그런데도 통화와 대화의 차이는 컸다.
-그래서 선생님. 오늘 소개해 주실 영양제는 무엇인가요?
-바로 마법의 가루 시서스입니다. 시서스는 인도에서 신비의 약물로 꼽히는 약재인데요. 다이어트에 특히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보고 있던 건강 채널에서 시서스를 홍보하고 있었다.
홍보 담당은 다름 아닌 의사였다.
어디 병원 가정의학과 전문의라는데 준후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의사 선생님이 효과 있다는데 시서스 한 번 사볼까? 엄마, 요즘 살 빼야 할 것 같은데.”
어머니는 시서스가 솔깃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의사 말이라고 덮어놓고 믿으시면 안 돼요. 저건 홍보예요.”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홍보하는 것보다는 믿을 만하지 않을까?”
“업체에서 노리는 것도 바로 그거예요. 속으시면 안 돼요.”
준후는 단호하게 말했다.
영양제 유통 업체는 소비자의 주머니를 털기 위해 부단하게 영양제 유행을 만들어낸다.
시서스.
타트체리.
노니.
효소 등등.
물론 이런 영양제를 먹고 효과를 본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소비자는 광고를 보고 영양제를 샀다가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며칠 먹다가 버리기 일쑤였다.
자신의 몸 상태에 맞는 영양제를 구입한 게 아니라 오로지 광고에 현혹해서 구입한 영양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영양제 광풍에 헛바람을 넣는 사람이 바로 의사였다.
통칭 쇼 닥터.
쇼 닥터는 TV쇼에 출연해서 각종 상술을 의학적으로 근거 있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맡았다.
지금 어머니가 시서스에 혹한 것처럼 말이다.
준후는 화면 속 쇼 닥터가 싫고 미웠다.
TV에 나오는 의사가 전부 쇼 닥터는 아니지만 이런 건강 프로그램에 나오는 의사는 쇼 닥터일 확률이 높았다.
영양제 같은 거 홍보하지 말고.
그 시간에 환자나 한 명이라도 더 보시라구요.
“재미있는 거 보여드릴까요?”
“재미있는 거? 갑자기?”
“채널 돌리다 보면 분명 시서스 판매하는 쇼핑 채널이 있을 거예요. 없으면 제 손에 장을 지질게요.”
준후는 리모컨을 손에 쥐고 채널을 차례차례 돌렸다.
한 다섯 채널 정도 이동했을 때였을까.
공교롭게도 한 쇼핑몰에서 시서스를 판매하고 있었다.
준후의 예언에 놀란 어머니가 눈을 깜빡거렸다.
“자, 이게 우연일까요? 아니면 상술일까요?”
* * *
그날 오후.
준후는 후련한 마음으로 방에 돌아오는 중이었다.
어머니가 준후 몰래(?) 구입한 영양제들을 싸그리 정리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일을 줄이면서 홈 쇼핑을 자주 봤기 때문일까.
어머니는 준후가 예전부터 챙겨 준 영양제 외에 다른 영양제도 많이 구입해서 먹고 있었다.
대부분이 시서스처럼 쇼 닥터가 선전하는 영양제들이었다.
노니.
포스트 바이오틱스.
크릴 오일.
콜라겐 등등.
준후는 해당 영양제를 지인에게 주거나 아예 버리라고 어머니께 말했다.
앞으로 광고를 보지 말고.
몸이 안 좋으면 자신과 상담을 한 후 영양제를 구입하라고 전했다.
영양제도 적당히 먹어야지.
과하면 간에 무리와 부담이 갈 수 있었다.
준후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지애와는 저녁 약속이 잡혔으므로 아직 시간 여유가 많았다.
가만히 누워서 준후는 양수 호박 기술을 익혔다.
양손으로 가위바위보를 펼쳤다.
요즘은 할 일이 없으면 손이 알아서 움직이곤 했다.
장소와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는 점은 양수 호박의 큰 장점이었다.
“너한테도 이상해 보이니?”
준후는 침대 밑에 앉은 똘똘이를 보며 피식 웃었다.
똘똘이가 준후의 손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던 것이다.
양수 호박 기술을 익히던 준후는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방을 나와 현관으로 이동했다.
그 뒤를 똘똘이가 따랐다.
“택배 왔니?”
“아니요. 아버지 오신 것 같은데요?”
“방에 있었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
“제 귀가 워낙 밝아야죠.”
준후는 아버지가 집에 왔음을 기감으로 알아차렸다.
발소리와 보폭으로 미리 감지했다.
한창때 무림에서는 100장(대략 300미터)의 거리까지도 기감으로 파악하곤 했는데 지금은 그 정도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띠리리링~
벨 소리를 뒤쫓아 아버지가 현관에 들어섰다.
“아버지. 다녀오셨어요.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원래 월요일은 택배가 별로 없잖니. 우리 아들, 집에서 보니까 더 좋은걸?”
“저도요.”
준후는 아버지와 미소를 주고받았다.
아버지는 곧 씻고 거실에 자리를 잡았다. 준후는 그런 아버지의 곁을 지켰다.
오늘의 메인 이벤트가 곧 시작되려는 중이었다.
“요즘 허리는 좀 어떠세요?”
준후는 아버지의 허리부터 걱정했다.
“괜찮아. 파스 좀 붙이면 아무렇지도 않단다.”
아버지야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사실 아버지는 디스크 초기 단계였다.
얼마 전 허리가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엑스레이와 CT를 찍고 초기 디스크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초기라서 수술까지는 필요 없다.
도수치료와 약물치료를 꾸준히 하면 좋아질 수 있다고 의사는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택배 일을 하는 아버지가 도수 치료받을 시간을 내는 건 쉽지 않았다.
가장 좋은 건 아버지가 택배 일이 아닌 다른 일을 하는 것이겠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했다.
현재로써는 불가능했다.
“파스 같은 걸로 안 될 텐데. 토요일이나 월요일에는 꼭 시간 내서 도수 치료랑 물리치료 받으세요.”
“그건 아는데…… 일 끝나면 쉬고 싶지 병원 가서 기다렸다가 치료받기는 귀찮더구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기에 준후도 더 말을 잇지는 못했다.
“그럼 일단 누워보세요. 제가 간단하게 치료해드릴게요.”
“아무렴 병원보다 우리 아들 약손이 낫지.”
“힘 빼고 편안히 계세요.”
준후는 거실 바닥에 엎드려 누운 아버지에게 도수 치료를 실시했다.
뚜두두둑.
뚜두두둑.
아버지의 허리 마디를 적당히 꺾어주고 이완시켰으며.
허리에 뭉친 근육은 내공이 담긴 손가락으로 풀어주었다.
풍부해진 해부학지식.
무림에서 익힌 야무진 손놀림이 빛을 발했다.
“어휴~ 시원하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역시 우리 아들이 최고라니까.”
“잠깐만 더 누워보세요.”
“응? 다 끝난 거 아니니?”
“아직 하나 남았어요.”
준후는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아버지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얼마 전 디스크 수술 스크럽을 서면서 생각한 것이 있었다.
뼈 틈으로 튀어나온 디스크를 내공으로 밀어낼 수만 있다면 말이다.
수술 없는 디스크 치료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병원에서야 야매(?) 닥터 소리를 들을까 봐 펼치지 못했지만 일상에서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한번 해보자.
택배 일을 도와봐서 알잖아.
하루 종일 허리를 굽혔다가 피고.
무거운 물건을 죄다 허리로 짊어져야 한다는 걸.
아버지는 병원에서 치료받을 여유가 없으니 내가 뭔가를 해야 해.
각오를 굳힌 준후는 아버지의 허리로 내공을 불어넣었다.
강물을 거슬러 오르듯.
내공이 요추 5번부터 1번을 향해 상승했다.
그러던 중 요추 2번 부위에서 완만한 곡선이 느껴졌다.
디스크가 빠져나오면서 생긴 굴곡이었다.
내공으로 가하는 압력이 과하면 디스크가 파열될 것이고.
내공을 가하는 방향이 잘못되면 신경이 다칠 것이다.
완벽한 치료를 위해서는.
정교한 내공 컨트롤이 필요했다.
쓰으읍.
후우우.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심호흡 한 번뿐이었다.
조급함도 들지 않고.
망설임도 들지 않는 최적의 타이밍.
그 타이밍에 준후는 단전에 있던 내공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
내공을 손바닥에서 아버지의 허리로 흘려보내며 볼록하게 튀어나온 디스크를 밀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