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85화
제14장 구원(5)
자동차가 교차로 신호에 걸렸을 때.
지애는 앞 유리 너머로 보이는 번화가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서울의 밤은 화려했다.
고층 건물들이 내뿜는 빛.
가게들이 내 건 간판들의 불빛들이 떠들썩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도로는 자동차로 가득했다.
어느 매장에서 스피커로 틀어놓은 최신 유행곡이 도로까지 들려왔다.
서울의 밤은 화려하지만 실속 없이 겉만 화려하다고 지애는 생각했다.
마치 지금의 자신처럼.
연예인이라면 많은 사람이 동경하고 부러워하는 직업이었다.
적당히 성공하면 돈 잘 벌지.
주변에서 먼저 알아봐 주고 대접하지 등등.
하지만 사람들은 단지 연예인들의 화려한 모습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속에 어둠은 전혀 알지 못했다.
아니 관심도 없었다.
지애의 경우 기사만 떴다 하면 악플이 거머리처럼 달라붙었다.
악플이 지애의 정신력과 마음을 갉아 먹어댔다.
‘안 보면 되잖아’라고 누군가는 말했다.
‘무시하면 되잖아’라고 누군가는 말했다.
하지만 그건 남의 일이라고 너무 편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대중의 관심을 먹고 사는 연예인이었다.
대중의 관심과 반응이라고 할 수 있는 리플이나 SNS 글들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야 피드백을 할 수 있으니까.
악플을 보지 말라는 건.
힘든 사람에게 힘을 내라고 하는 말처럼 난폭하고 잔인하고 무신경한 조언이었다.
“아…….”
지애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흘렸다.
떨쳐버리고 싶었던 악플 몇 개가 기어코 떠올랐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자존감이 두부처럼 으깨졌다.
빠아아앙!
뒤에서 울리는 신경질적인 자동차 클락션.
지애는 그제야 다시 차를 몰았다.
지애를 괴롭히고 있는 건 단순히 악플만이 아니었다.
얼마 전에 잘 해결은 됐다만 스토킹 문제로도 한동안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한 3달 정도됐나.
스케줄이 끝나고 집에 들어가면 항상 집 앞에서 웬 남자가 지애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동선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두려운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차가 다시 신호에 멈췄을 때.
지애는 휴대폰 연락처를 쭉 훑었다.
지난 일주일간, 만나고 싶은 사람은 다 만났다.
오늘 만난 준후가 만나고 싶었던 마지막 사람이었고.
모처럼 만난 준후는 여전히 정직하고 정의로웠다.
고난에 흔들리지 않고 외과 의사라는 꿈을 향해 곧게 나아가고 있었다.
지애는 그런 준후가 조금, 아니, 많이 부러웠다.
병원 인턴 생활도 만만치 않게 힘들다고 들었는데 어찌 그리 잘 버틸 수 있을까 싶었다.
역시 내가 너무 약한 걸까.
난 그냥 여기까지인 걸까.
지애가 자책감에 몸서리치며 도착한 곳은 도심 번화가에 위치한 한 주상복합 오피스텔이었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지애는 곧바로 옥상을 찾았다.
며칠 몇 날을 고민했기에 발걸음은 망설임이 없었다.
꼬여 버린 인생의 매듭을 풀어낼 자신은 여전히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해결 방법은 단 하나뿐.
그 매듭을 싹둑 잘라내는 것뿐.
열려 있는 옥상에는 한 남성이 먼저 와 있었다.
50대 정도로 보이는 남성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남성은 지애를 힐끔 쳐다보고는 금방 관심을 거두었다.
지애를 모르는 모양이었다.
“저기요.”
지애가 남성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왜요?”
“죄송한데 담배 한 대만 빌릴 수 있을까요?”
“그래요.”
남성이 선뜻 담배를 건네고 불까지 붙여주었다.
“콜록! 콜록!”
매캐한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빨아 당긴 순간, 지애는 고통스럽게 기침을 했다.
머리는 핑 돌고 속에서는 구역질이 올라왔다.
난생 처음 펴 본 담배는 지독했다.
“뭐야? 담배 처음 펴요? 근데 왜 달라고 했어요?”
사내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냥…… 펴보고 싶어서요.”
“젊은 분이 안 좋은 일이 있었나? 억지로 피우지 말고 그냥 버려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역겨움을 느끼면서도 지애는 담배 한 대를 끝까지 피웠다.
단순한 오기 같은 것이었다.
이 정도는 이겨내야 ‘그일’도 해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저기 아저씨. 아저씨는 왜 사세요?”
“사는데 이유가 필요해요? 그냥 사는 거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힘내요. 나 같은 놈도 아득바득 살고 있으니까.”
사내가 조언을 하고 자리를 떠났다.
지애는 사내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옥상 문을 향해 다가갔다.
쿵!
철컥!
옥상 문이 닫히고 잠겼다.
* * *
“그럼 애인하고 화해 잘 해봐요. 이 정도 정성이면 애인도 알아주겠지.”
“네. 감사합니다. 기사님.”
택시비를 지불하고 준후는 택시에서 내렸다. 고개를 들어 지애가 사는 오피스텔을 올려다보았다.
지애를 그냥 보낼 수도 있었지만 준후는 그러지 않았다.
평소와 다른 지애의 모습에서 불길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불길함이 틀리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만 자세한 건 직접 확인해 봐야 할 것이다.
터벅. 터벅.
준후는 서둘러 오피스텔 출입구로 향했다.
당연하게도 보안 문제로 출입문은 닫혀 있었다.
문을 깰 수도 없고.
그렇다고 경비원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하자니 괜한 의심을 살 것 같고.
준후의 선택은 기다림이었다.
통화하는 척하며 기다리다 보니 금방 기회가 찾아왔다.
부우우웅~
배달 오토바이 한 대가 출입구에 섰던 것이다.
배달원이 출입문을 통과하는 순간, 준후는 자연스럽게 배달원을 뒤따라갔다.
하지만 문제는 아직 남아 있었다.
지애가 사는 호수를 준후가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내공으로 후각을 증폭했다.
다행히도 날카로워진 후각에 지애의 향수 냄새가 포착되었다.
은은한 비누 냄새와 꽃향기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진동하고 있었다.
단서를 찾은 준후는 엘리베이터의 모든 버튼을 눌렀다.
“저기요? 뭐하시는 거예요?”
배달원이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준후를 빤히 쳐다보았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전부 누르는 게 장난처럼 보였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택배 물건을 찾아야 해서요.”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지 않아요? 나도 배달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준후는 고개를 숙여 미안함을 표현했다.
배달원의 사정은 알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시작된 지애의 향수 냄새가 어느 층으로 이어졌는지 일일이 확인해야 했다.
향수 냄새를 쫓다 보면 지애가 사는 호수를 알 수 있으리라.
“이상한 사람 다 봤네. 근데 다음부터는 이러지 마세요.”
준후가 공손하게 나오자 배달원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배달원이 5층에서 내렸고.
준후는 18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마다 지애의 향수 냄새가 어디로 뻗어 나가는지를 살피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준후의 미간은 좁아졌다. 평소의 준후답지 않게 다리를 떨기도 했다.
향수 냄새가 엘리베이터 안에만 머물러 있어.
그럼 집이 아니라 곧바로 옥상으로 향한 건가.
역시 지애는 억지로 밝은 척 연기를 했던 건가.
흐릿했던 불길함이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고.
준후의 예상은 적중했다.
지애의 향수 냄새가 옥상과 연결된 22층에서 다시 시작된 것이다.
향수 냄새를 쫓아서.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준후는 비상구 계단을 올랐다.
철컹! 철컹!
문을 열려고 하자 옥상 철문이 단단하게 잠겨 있었다.
지애가 잠가놓은 게 틀림없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여기서 좌절했겠지만.
철문에 가로막혀 어쩔 줄 모르고 있다가 경비원에게 옥상 열쇠를 부탁하느라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겠지만, 준후는 아니었다.
준후는 평범한 사람들과 달랐다.
아직 늦지 않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준후는 손바닥에 내공을 담아 철문을 후려갈겼다.
서씨세가의 장법 중 하나인 청옥장이었다.
쿵!
손바닥이 철문에 닿는 순간.
철문이 우지끈하고 뒤로 넘어갔다.
쇳소리가 요란하게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훼방꾼이었던 문이 넘어지면서 난간에 위태롭게 서 있던 지애가 보였다.
저기서 한 발자국만 더 내디뎌도 지애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주…… 준후?”
갑작스러운 소란에 지애가 문 쪽을 돌아보며 넋 나간 표정을 지었다.
헤어졌던 준후가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자 당황한 것이다.
“지애야. 일단 내려와. 내려와서 이야기하자.”
준후는 지애에게 다가가며 좋은 말로 타일렀다.
지애가 목숨을 잃는 것을 차마 두고 볼 수 없었다.
무림을 경험한 후 소중한 사람을 잃지 않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그 다짐이 깨어지게 둘 수는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무력감에 몸서리치는 것은 싫었다.
“가까이 오지 마. 제발.”
“……알았어. 그럼 여기서 말로 할 게.”
지애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준후는 걸음을 멈추었다.
“네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어쩐지 느낌이 안 좋아서 따라 왔어. 네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았으니까.”
“네 눈은 못 속이겠네.”
지애가 처량한 표정을 지었다.
“연예계 생활하면서 많이 힘들었지? 아직 나한테 못한 말이 많은 거지?”
“그래. 맞아.”
“…….”
“하지만 힘들다고 모든 걸 다 털어놓을 순 없잖아? 그건 응석에 불과하니까.”
“…….”
“매니저랑 회사 사람들도 날 별로 신경 안 쓰더라고. 그 정도는 누구나 겪는 일이래나?”
지애의 마음속에 맺힌 괴로움이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음을.
그리고 그 괴로움은 쌓이고 단단해져서.
마침내 지애를 파괴하기에 이르렀음을 준후는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아마 지애에게 필요했던 건 마음의 CPR이었을 것이다.
CPR은 오직 육신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마음에도 필요한 것이었다.
몸이 죽는 것처럼 마음도 죽는다.
“그럼 내려와서 나랑 풀자.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 나한테 다 해줘. 하나도 빼놓지 말고.”
“과연 너한테 이야기한다고 다 괜찮아질까?”
“분명히 좋아져.”
“무슨 근거로?”
“네 아픔이 인정을 받을 수 있으니까.”
“이상한 소리네. 아픔이 인정을 받는다니.”
지애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음도 몸하고 똑같아. 아픈데 안 아픈 척하니까 계속 아프고 더 아파지는 거야.”
“…….”
“그러니까 아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그때부터는 치료도 할 수 있어.”
준후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무림맹에서 첫 임무를 치를 때 준후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갈고 닦은 무공은 너무나 하찮게 무너졌다.
사파인들이 휘두른 검 앞에서 동료들은 픽픽 죽어 나갔다.
그 자리에서 준후가 할 수 있는 건 비겁하게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그 후로 참을 수 없는 무기력감이 준후를 사로잡았다.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
아버지가 적일도의 손에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에도 아무것도 못 했고.
동료들이 죽었을 때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러겠지.
그렇게 시작된 오랜 방황 끝에 준후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자신에게 깊게 뿌리 내린 무기력감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비록 고난 앞에 무력할지 몰라도.
어떻게 해서든 안간힘을 써서 저항해 보자고.
그러면 후회는 없을 거라고.
준후는 오히려 무력감을 인정한 순간부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자신이 그랬다면 지애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준후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 솔직히 힘들었어. 부모님한테 힘들다고 말하면 부모님이 걱정할까 봐 말 못 했고.”
지애가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친구들한테 이야기했더니 친구들은 전혀 공감을 못 하더라. 그 정도 돈을 벌면, 연예인이면 당연히 감당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고.”
“…….”
“회사 사람들도 내가 힘든 게 당연하다고 했어.”
“…….”
“그러니까 꼭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잖아?”
“힘든 건 잘못이 아니야. 문제도 아니고. 그러니까 지애 너는 괜찮아. 내가 보증할게.”
준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지애에게 다시 다가갔다.
“이제 내려와 줄래? 우리 둘이라면 잘 이겨낼 수 있어.”
“난…… 모르겠어.”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던 지애의 몸이 갑자기 크게 휘청거렸다.
고층에서 부는 강풍에 몸의 균형이 흐트러진 것이다.
지애는 손으로 잡고 있던 난간을 놓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