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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86화 (86/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86화

제15장 닮은꼴(1)

지애의 투룸 오피스텔 거실.

준후는 지애와 나란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지애는 담요를 어깨에 걸치고 있었는데 처음보다는 많이 차분해 보였다.

위기의 상황에는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마음을 안정시키는 점혈법이 제 몫을 톡톡히 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몇 분 전 상황을 돌이키며 준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 내쉬었다.

무공을 익힌 준후가 그 자리에 있었기에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지애는 비극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지애가 추락하던 위기의 순간.

준후는 청풍보를 극성으로 밟았다.

파바바밧!

한 줄기 바람이 되어 난간에 접근했고 손을 뻗어 금나수로 지애의 손목을 낚아챘다.

실로 아슬아슬했던 상황이었다.

준후는 내공을 담은 팔로 지애를 옥상으로 끌어 올리는 데 성공했다.

무공은 의술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인명구조에도 탁월한 위력을 뽐냈다.

“…….”

“…….”

할 말이야 많았지만 준후는 침묵을 지켰다.

어쭙잖은 조언이나 충고, 위로 같은 것들은 지금 필요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지애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뜻한 커피라도 한 잔 타줄까? 너 믹스 커피 좋아하잖아.”

부엌을 바라보며 준후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응. 그래 주면 고맙고.”

“잠깐만 기다려.”

준후는 커피포트기에 물을 받아서 물을 끓이고 믹스 커피 두 봉을 컵에 담았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터라.

지애의 커피 취향은 잘 알았다.

“자. 받아. 뜨거우니까 손잡이 쪽으로 잡고.”

지애가 커피 마시는 모습을 준후는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학창시절부터 지애는 외강내유형이었다.

겉으로는 쾌활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것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게다가 직업이 배우이고.

또 각종 기사와 언론, 악플들을 접하다 보니 마음의 상처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커졌던 모양이었다.

준후는 지애를 만나기 전 확인했던 악플들을 떠올리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수백 명이 쏟아내는 악의를 견뎌내기 위해 지애는 얼마나 고생했을까.

악플러들이 과연 알기나 할까.

본인들이 생각 없이 친 글이 타인의 가슴을 찢어발긴다는 것을.

“걱정 끼쳐서 미안해. 나 때문에 너까지 위험할 뻔해서 미안하고.”

지애가 무겁게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괜찮아. 네가 오죽하면 그랬겠어. 그리고 봐, 나도 멀쩡하잖아?”

“준후야.”

준후의 따스한 대답에 지애는 결국 펑펑 눈물을 쏟았다. 어깨를 가늘게 떨며 흐느껴 울었다.

“속 시원하게 울어. 평생 울 거 지금 다 운다는 생각으로 울어. 그럼 후련해질 거야.”

준후는 지애의 어깨에 손을 얹고서 자신의 품 쪽으로 끌어당겼다.

타인의 신체에서 전해지는 포근함과 따스함.

이것은 말보다 더 큰 힘을 지녔다.

무림에서 준후도 다른 사람 품에 안겨서 서럽게 울어본 적이 있었다.

아마 무림맹 첫 임무에서 동료들 절반이 목숨을 잃었을 때였을 것이다.

* * *

준후는 밤새 지애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아니, 지애의 곁을 떠날 수 없었다는 쪽이 더 옳았으리라.

중간에 준후는 집에 전화를 했다.

걱정하실 부모님께 바깥에서 일을 보다가 곧바로 병원에 출근하겠다고 전했다.

한편 펑펑 울고 난 지애는 그제야 말문을 터뜨렸다.

그동안 배우 생활을 하면서 털어놓지 못했던 아픔들은 준후에게 전했다.

동료 배우의 시기와 질투.

선배들의 텃세.

돈에 혈안이 된 현 기획사에 대한 불만.

스토킹으로 인한 정신적인 피해.

각종 혐오와 멸시가 담긴 악플 등등.

연예계의 화려한 이면 뒤에는 화려한 만큼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의사도 연예인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보통 의사라고 하면 와, 대단하다, 명망 있고 돈 많이 버는 직업이다, 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하지만 의사들에게도 다른 직업군들 못지않은 고충이 존재했다.

사람의 생명을 다룬다는 막중함.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서 끊임없이 해야 하는 공부.

진상 환자와 보호자의 대처.

대학 병원의 근무할 경우 진급 문제.

또 교수와 과장에게 잘 보여야 하는 문제 등등.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이지. 힘이 있으면 책임이 뒤따르는 법이고.

-앞으로 자네는 보이는 것 말고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줄 알아야 해. 심연을 너무 늦게 알아차린다면 심연에 잡아먹히고 테니까.

적일도를 해치우러 가던 날.

무림맹주가 준후에게 해주었던 말이었는데 그 말이 오늘따라 유독 가슴에 여운을 남겼다.

적일도를 죽이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힌 나머지 준후까지 목숨을 잃고 말았으니까.

냉정함만 잃지 않았다면 피해는 최소화할 수 있었을 텐데.

“눈이 퉁퉁 부었네. 누가 보면 개구리 왕눈이인 줄 알겠다.”

준후는 잡념을 떨치며 지애에게 농담을 건넸다.

마음이 안정돼서일까.

지애가 옥상 사건 이후 처음으로 미소를 띠었다.

“새삼스럽게 왜 그래? 예전부터 왕눈이라고 놀렸으면서.”

“하긴 그것도 그러네. 앞으로는 어떻게 하고 싶어?”

준후가 지애의 의견을 물었다.

“제일 편한 건 배우 생활을 그만두는 거겠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아.”

“…….”

“내일 소속사에 연락해서 쉬고 싶다고 말하려고. 최근 드라마 평이 안 좋아서 당분간 캐스팅 제안이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잘 생각했네. 휴식 좋지. 사람도 배터리랑 똑같아. 쉴 때는 쉬어줘야 한단 말이지.”

지애의 판단을 준후는 환영했다.

사람들은 휴식의 중요성을 간과하거나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천만의 말씀이었다.

휴식이 곧 치유였다.

“아 참, 그건 그렇고. 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뭐가?”

“문은 어떻게 부수고 들어온 거야? 옥상 철문 엄청 단단한데.”

지애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 그게…… 경첩이 헐거웠나 봐. 발로 차니까 뒤로 넘어가더라고.”

“그럴 리가 없는데? 문, 얼마 전에 새로 교체했는데?”

“그럼…… 새 문을 달 때 뭔가 실수가 있었겠지. 안 그러고서야 문이 어떻게 넘어갔겠어.”

준후는 황급하게 둘러댔다.

무공과 내공에 대해서 말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지애는 준후의 설명을 순순히 믿는 눈치였다.

‘그나저나 지금부터가 문제인데.’

준후는 가만히 턱을 쓸어내렸다.

지애가 안정을 되찾은 것은 분명 다행이었지만 아직 마음을 놓기는 일렀다.

지애의 상처를 봉합할.

또 앞으로의 상처를 봉합해 줄 처치가 필요했다.

가만 보자.

그러고 보니 무공 중에도 마음을 치료하는 무공이 있었지?

“지애야. 미안한데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당연하지. 오늘 진 빚만 해도 평생 못 갚을 텐데.”

“너한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뭐 한 가지 가르쳐주려고. 따라 하면 절대 후회 안 할 거야.”

준후는 지애에게 무공을 가르쳤다.

* * *

다음 날 새벽.

지애는 차를 몰아 준후와 옛 동네로 돌아왔다.

준후는 말했다.

당분간은 오피스텔에서 혼자 지내지 말고 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지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지애도 동의하는 바였다.

부모님 얼굴을 뵌 지도 오래되었고 당분간은 기댈 사람이 곁에 있는 게 든든할 것 같았다.

“나 혼자 와도 되는데…… 괜히 준후 너만 두 번 고생하는 거 아니야?”

“괜찮아. 나도 택시 타고 가면 되니까.”

“다른 말은 안 할게. 오늘 정말 고마웠어.”

지애는 준후와 감사의 포옹을 나누었다.

감사하고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자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 것 같아서.

준후는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 지애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또 밤새 곁을 지키며 지애를 위로해 주었다.

덕분에 마음속의 어둠이 싹 가신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앞으로의 배우 생활이 녹록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잘 이겨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지애를 믿고 응원해 주는 준후가 곁에 있었으니까.

“이야, 배우의 포옹까지 받아보고 영광이네.”

“그래. 영광인 줄 알아. 병원에서 수련 잘하고 꼭 멋진 의사 선생님이 됐으면 좋겠다.”

“그건 안 되겠는데?”

“왜?”

“난 이미 멋진 의사거든.”

준후의 너스레에 지애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준후는 학창시절부터 듬직하고 여유가 넘쳤다.

스스로의 목숨을 포기하기로 결심한 후.

마지막으로 만날 사람으로 준후를 택한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이 아닐까.

준후라면 자신의 이런 아픈 속내를 알아봐 주고 구원해 줄지 모르겠다는 기대 때문에 말이다.

“잘 가. 다음에 또 연락할게.”

“그래.”

지애는 준후와 헤어지고 모처럼 부모님이 계시는 집으로 들어갔다.

“우리 딸, 이 시간에 웬일이야? 연락이라도 좀 해주지.”

“무슨 일 있었니?”

지애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부모님은 크게 놀랐다.

평소 일찍 드시는 식사마저 내팽개치고 지애 곁으로 다가왔다.

아무 일도 아니에요.

그냥 두 분이 보고 싶어서요.

……라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지애는 그러지 않았다.

“저 식사하시는데 죄송하지만 드릴 말씀이 있어요.”

“어휴. 죄송할 건 또 뭐니? 이리 와서 앉아 봐.”

“그동안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이구나.”

지애는 거실 소파에 앉아 부모님에게 속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동안 숨겨왔던 감정들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단 어제 옥상에 올라갔었던 일만 빼고.

지애의 고백에 어머니가 먼저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는 위로 대신 지애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부모님은 언제나 지애의 든든한 아군이었다.

“안 그래도 최근 드라마 찍은 것 때문에 고생이 많아 보였는데 네가 말을 안 하니까 엄마가 더 답답했지 뭐니. 흑흑흑.”

“진정 좀 해요. 당신이 울면 지애 마음은 또 어떻겠어요?”

“하지만 슬픈 건 어쩔 수 없잖아요.”

어머니가 서럽게 울었던 탓에.

지애가 오히려 어머니를 위로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어쨌거나 부모님께 속내를 털어놓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지애였다.

이렇게 무거운 감정들을 혼자 짊어지고 있었으니 휘청거리는 게 당연할 수밖에…….

장장 1시간의 걸친 대화가 끝났다.

지애는 어머니의 손맛이 담긴 아침상으로 배를 채우고 방으로 돌아갔다.

소속사에는 오후쯤에 연락을 취할 생각이었다.

그 전까지는 여유가 넘쳤다.

-너한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뭐 한 가지 가르쳐주려고. 따라 하면 절대 후회 안 해.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는데 준후의 말이 떠올랐다.

은인의 부탁인데 무시할 수는 없지.

지애는 몸을 일으켜 방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준후가 가르쳐준 대로 눈을 감은 채 호흡에 집중했다. 각종 악플과 상념으로 머릿속은 금방 어지러워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해묵은 감정과 사고의 찌꺼기는 금방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들숨과 날숨.

호흡이 기둥처럼 단단하게 지애를 지탱해 주었기에 지애는 그 어떤 잡념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준후가 단순히 명상을 알려주었다고 지애는 알고 있었지만.

사실 지애가 펼치고 있는 것은 서씨세가의 무공 심법 중 하나인 청명심법이었다.

내공을 쌓을 수는 없지만.

정신을 맑게 하는데 탁월한 효력이 있었다.

심법의 이치가 단순해 남녀노소 누구나 익힐 수 있는 심법이기도 했다.

와, 신기하네.

명상이 이렇게 좋은 거였나.

이래서 준후가 하루에 세 번씩 명상을 하면 마음의 독이 풀릴 거라고 했던 건가.

지애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지만 그 생각마저 지우개가 글씨를 지우듯 사라져버렸다.

적어도 명상하는 동안.

지애의 마음은 평온,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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