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87화
제15장 닮은꼴(2)
타다다닥.
타다다닥.
이 소리는 요즘 유행하는 ASMR 영상, 그중에서도 불멍으로 통하는 모닥불 타는 영상 소리가 아니었다.
이것은 준후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였다.
현진은 같이 당직을 서고 있는 준후를 쳐다보며 혀를 찼다.
미친놈.
지금 준후를 설명할 수 있는 한 단어였다.
준후가 현진을 도와 차트 작성을 했던 건 1시간 전부터였다.
준후는 놀라운 속도로 밀린 오더를 처리했고.
입·퇴원 기록지, 퇴원 요약지, 경과 기록지 등을 가리지 않고 작성했다.
이것들은 레지던트 1·2년 차가 작성하는 차트들이었다.
인턴이 입력하기에는 다소 복잡하고 버거운 차트들이었다.
하지만 진짜 놀라운 건 준후의 업무 범위뿐만이 아니었다.
준후의 업무 속도였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의사의 특성상 한글이 아닌 영문 타자를 치는데도 준후의 타자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뭘 그렇게 넋 놓고 쳐다보세요?”
준후가 현진의 시선을 의식하고 한마디 했다.
“그냥 신기해서. 넌 인간이 아닌 것 같아.”
“멀쩡한 사람 괴물로 만들면 곤란합니다.”
준후가 빙긋 웃으며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벌써 당직 때 해야 할 차트 업무를 끝낸 모양이었다.
“준후야, 한 가지만 물어보자.”
“네. 선배.”
“너 영문 타자 몇 정도 나오냐?”
“전에 한 번 측정해 본 적이 있는데 그때는 1,700 정도 나오더라고요.”
준후의 대답에 현진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1,700이면 속기사가 찍을 법한 타자 속도 아닌가.
그것도 속기사 전용 키보드를 사용해서 말이다.
그런데 준후는 일반 키보드로, 영문 타자를 치는데도 1700을 찍었다고 한다.
눈앞에서 준후를 봤음에도.
현진은 이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무슨 비법이라도 있어?”
“글쎄요. 뭐라고 설명하기가 힘든 거라서…….”
준후가 멋쩍게 웃었다.
“내용 빠뜨린 거 있는지 확인해 보실래요?”
“당연히 그래야지.”
현진은 준후가 작성한 차트와 오더들을 꼼꼼히 살폈다.
놀랍게도 영문 1,700타로 작성한 차트와 오더에는 일말의 오류도 없었다.
“야 차팅까지 완벽하네. 네가 그냥 레지던트 해라.”
“그래도 아직 배울 게 많은데요. 경험 측면에서도 선배보다 많이 모자라고요.”
“겸손하기는. 그나저나 벌써 오늘이 마지막이네.”
현진의 시선이 벽에 걸린 달력에 머물렀다.
아쉽게도 준후와 근무를 서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준후가 정형외과에 온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었다.
캐스트와 스플린트를 소화하고.
영문 1,700타로 차트 입력을 돕던 준후가 곁에 없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막막했다.
“정형외과 전공 꼭 생각해 봐라. 열 번 생각해 봐라. 알았지?”
“네. 저도 정형외과 좋아해요.”
준후의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다행히 정형외과에서 받은 인상이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근데 선배 저도 궁금한 게 있는데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현진이 농담조로 존댓말을 사용했다.
“선배가 인턴 돌면서 가장 빡셌던 과는 어디에요?”
“당연히 외과긴 한데. 외과 중에서 신경외과랑 흉부외과.”
“신경외과랑 흉부외과가 정형외과보다 힘든가요?”
“정형외과야 레지던트가 많기라도 하지. 신경외과랑 흉부외과는 레지던트 씨가 말랐어.”
현진은 신경외과와 흉부외과 수련 시절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 두 곳에서는 당시 인턴이었던 현진조차 레지던트처럼 일했다.
왜냐고?
레지던트의 숫자가 지극히 부족했으니까.
특히 흉부외과는 3년 동안 신규 지원 레지던트가 없을 정도로 극심한 인력난에 시달렸다.
노동뿐만 아니라 진료과목에도 3D(Difficult, Dirty, Dangerous)는 존재했던 것이다.
“선배 말을 들어보니까 더 수련하고 싶어지네요.”
“하여간 변태 기질은 여전해.”
“에이, 너무 멀리 가셨다. 그럼 흉부외과의랑 신경외과의는 다 변태게요?”
“인마, 사람 말을 왜곡하면 안 되지. 내 말은…….”
현진이 반박을 하려는 찰나.
드르르륵.
당직실 문이 열리고 동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레지던트 3년 차이자 정형외과 군기반장인 동석.
동석은 준후와 눈을 마주치고는 흠칫 몸을 떨었다.
“난 신경 쓰지 마. 잠깐 가지고 갈 게 있어서.”
동석이 순한 양처럼 혼잣말을 하고 냉장고에서 음료를 꺼낸 후 당직실을 떠났다.
놀랍게도 동석은 예전의 폭군 동석이 아니었다.
준후에게 한 번 호되게 당한 뒤부터는 일체의 가혹 행위를 중단했다.
덕분에 현진은 요새 수련할 맛이 났다.
“동석 선배, 요즘 얌전하죠?”
준후가 동석에 대해 물었다.
“얌전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딴 사람이 되어버렸다니까. 잠깐 짜증을 내다가도 네 이름만 들으면 벌벌 떨어.”
“비록 제가 없더라도 제 이름 계속 파세요. 혹시라도 다시 손찌검하면 저한테 이야기하시고요.”
“그래. 든든하다. 준후야.”
현진이 씨익 웃었다.
* * *
그날 새벽.
정형외과에서의 마지막 근무 날.
준후는 지애와 메신저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극단적인 시도를 했던 지애는 많이 안정된 상태였다.
배우 활동은 잠시 쉬면서.
방전됐던 마음을 충전하고 있었다.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
지애는 준후가 가르쳐주었던 심법을 꾸준히 익히고 있었는데 그 효과가 너무 좋다고 준후에게 연신 감사를 표했다.
그럴 수밖에…….
서씨세가에서 내려오는 청명심법은 마음을 다스리는데 특효약이었으니까.
어쨌거나 지애가 잘 쉬고 있다니 마음이 놓이는 준후였다.
인턴 루틴을 시작하기 전까지.
준후는 양수 호박 기술을 단련했다.
양손으로 하는 가위바위보 말이다.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수련한 덕분일까.
이젠 손이 잘 꼬이지 않았다.
왼손과 오른손이 진검승부를 펼치는 듯한 상황도 자주 연출되었다.
2시간 정도 수련을 하고.
준후는 문득 창밖을 응시했다.
시간은 참 빨리도 흘러갔다.
정형외과 근무를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다른 과로 이동해야 한다니…….
캐스트와 스플린트 사용.
양수 호박 기술의 단련.
레지던트 1·2년 차에 버금가는 차트 입력 속도와 정확도.
정형외과에서 얻은 성과는 크게 이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었다.
오늘부터 근무하는 소화기 외과에서도 더 많은 걸 배우고.
더 많은 성장을 했으면 좋겠다고 준후는 생각했다.
슬슬 일어나볼까.
오전 5시가 됐을 때, 준후는 조용히 당직실을 나왔다. 스테이션에서 처치에 필요한 도구들을 챙겨 병실을 돌기 시작했다.
드레싱, 폴리 카테터 관리, 비위관 관리, 중심정맥관 제거, 일반 채혈, ABGA 채혈 등등.
각종 인턴 잡들을 능숙하게 처리해나갔다.
“선생님. 저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곁에서 준후를 돕던 윤정 간호사가 모처럼 질문을 던졌다.
“뭔데요?”
“선생님. 원래 오른손 쓰지 않아요? 근데 오늘은 처치할 때, 왼손을 쓰고 계신 것 같아서요.”
“눈썰미 좋으시네요. 맞아요. 저 원래는 오른손잡이예요.”
준후는 담담하게 대답하고 왼손으로 주사기를 쥐었다.
푹!
환자의 굵직한 동맥에 왼손으로 주사기를 찔러 넣고 ABGA 채혈을 시도했다.
주사기 바늘은 단번에 혈관에 닿았다. 주사기의 팁 부분에 붉은 혈액이 고여 갔다.
“근데 이젠 왼손도 그럭저럭 잘 씁니다.”
* * *
터벅. 터벅.
준후는 복도를 걷다가 미련이 남았다는 듯 뒤를 돌아보았다.
정형외과의 오전 컨퍼런스와 회진은 끝났고 다음 인턴에게 업무 인계도 해주었다.
즉 이 시간부로 정형외과와는 안녕이었다.
준후가 정형외과 전공을 선택하지 않는 이상 다시 정형외과 병동을 찾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동안 정이 들긴 들었나 보네.
준후는 정면을 바라보며 다시 무거운 발을 뗐다.
다음 목적지는 별관 5층에 위치한 소화기 외과 병동이었다.
소화기 외과.
이 과는 위장관외과, 간담췌외과, 대장 항문 외과를 한데 묶어서 부르는 명칭이었다.
복부의 장기가 워낙 다양하다 보니 장기 별로 세부 전공이 나뉘어 있었다.
그래서일까.
준후는 소화기 외과 근무를 특히 기대하고 있었다.
소화기 외과는 앞서 언급한 특성상, 타 외과에 비해 정규 수술 스케줄이 많았다.
또 응급으로 펼치는 수술도 많았다.
즉 준후가 수술 스크럽을 자주 설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서준후!”
본관과 별관을 이어주는 스카이 브리지로 향하던 도중.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유정이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최유정.
의대 동기로 구김살 없고 쾌활한 성격이 매력적인 친구였다.
MBTI로 따지자면 아마 ESFP(자유로운 영혼의 연예인)쯤 되지 않을까.
“반갑다. 너도 소화기 외과 근무지?”
“맞아. 준후 너랑 같이 근무라니 벌써부터 든든하네. 네 이야기 많이 들었거든.”
“응? 내 이야기를? 어디서?”
준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정형외과 현진 선배한테. 선배가 나랑 같은 동아리였거든. 정형외과에서 아주 날아다녔다던데?”
“선배가 나를 좋게 본 거지.”
“어쨌거나 만반잘부.”
“그건 또 무슨 뜻인데?”
“유행을 몰라도 너무 모르네. 만나서 반가워 잘 부탁해의 줄임말이잖아.”
유정이 쾌활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슈퍼 인싸는 뭐가 달라도 달랐다. 저런 유행어 같은 것도 바로바로 써먹고 말이다.
유정과 있으면 심심할 일은 없겠다고 준후는 문득 생각했다.
“아침은 먹었어?”
“라면하고 빵으로 대충 때웠지.”
“나 키토하는데 너도 키토해 볼래?”
유정이 의사 가운에서 커피를 하나 꺼냈다.
커피 라벨에 방탄 커피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키토는 또 뭐고.
이름도 요란한 방탄 커피는 또 무엇인지…….
준후는 다시 머리가 혼란해졌다.
“유정아.”
“응?”
“미안한데 나는 네 속도를 못 따라가겠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알고 보면 별거 아니야. 겁먹을 필요 없어.”
유정이 수다쟁이처럼 설명에 나섰다.
키토란 키토제닉의 줄임말이다.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탄수화물 대신 지방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특징이 있다.
방탄 커피는 키토 식단 중 하나인데.
블랙커피에 몸에 좋은 버터와 오일을 섞은 커피라고 했다.
“와, 이런 걸 왜 마셔?”
유정이 건넨 방탄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준후는 진저리를 쳤다.
커피가 느끼해도 너무 느끼했다.
준후의 입맛에는 속이 니글니글거릴 정도였다.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 수도 있어. 근데 이거 먹으면 엄청 든든해. 반나절은 공복이라도 거뜬하다고.”
“유행을 따라가는 건 괴로운 일이구나.”
“엥? 결론이 왜 그렇게 나오는 건데? 어쨌든 네가 입 댔으니까 그건 네가 다 마셔.”
준후는 눈물을 머금은 채 방탄 커피 한 캔을 다 비웠다.
유정도 다른 방탄 커피를 꺼내 단번에 비웠다.
유정과 대화를 나누면서 이동하는 길은 예상대로 지루하지 않았다.
유정이 워낙 병원 정보와 유행에 아는 것이 많아서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코드 블루. 코드 블루. 6층 스카이 브릿지에서 응급 환자 발생. 방송을 듣는 의료진은 지금 즉시 스카이 브릿지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안내 말씀드립니다. 코드 블루. 코드 블루. 방송을 듣는 의료진은…….]
안내 방송을 듣고서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를 쳐다보았다.
“스카이 브릿지면 우리가 가는 쪽이잖아?”
유정이 놀란 부엉이 눈으로 말했다.
“스태프들이 자주 이동하는 통로도 아니야. 우리가 빨리 가야 해.”
대답을 마친 준후는 반사적으로 보법을 밟았다. 유정을 내팽개치고 번개처럼 달려나갔다.
한편 유정은 앞서 나가는 준후를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다.
뭐…… 뭐지?
방금까지만 해도 곁에서 대화를 나누던 준후였다.
그런데 준후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가운을 휘날리며 검사실 복도를 질주하고 있었다.
놀라운 건 스태프와 환자와 보호자들이 지천에 있음에도.
준후가 그 틈을 매끄럽게 통과해서 달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달리는 속도가 마라톤 선수 뺨친다는 점이었다.
축지법이라도 익혔나?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유정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달리고 달려도 준후의 뒷모습조차 구경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