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88화
제15장 닮은꼴(3)
대학 병원은 어디를 가도 사람이 많았다.
사람 구경을 하고 싶으면 대학 병원에 가라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같은 응급 상황에서 복도에 있는 사람들은 잠시 장해물이 되곤 했다.
물론 준후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지만.
파바바밧!
준후는 서씨세가의 대표 보법 중 하나인 청운보를 밟고 있었다.
마주 오거나.
또는 앞서 걷는 사람들을 감촉같이 비껴내며 달리는 중이었다.
청운보는 장해물을 피하면서도 가속도가 떨어지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후우우웅.
비상구에 들어선 준후는 반 층짜리 층계를 한 번에 훌쩍 뛰어넘었다.
지켜보는 눈이 없으니 능력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단 두 번의 도약으로 도착한 5층.
준후는 스카이 브릿지를 향해 계속 내달렸다.
이윽고 스카이 브릿지 중간 지점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있는 것이 보였다.
방송에서 언급한 장소가 바로 저곳이리라.
코드 블루 방송이 나온 지 채 1분이 안 됐어. 소생술만 잘하면 문제없을 거야.
준후의 판단은 냉정하고 간결했다.
코드 블루란 병원에서 전파하는 의료 코드 중 하나로 심폐 소생술이 필요한 환자의 존재를 알리는 방송이었다.
그밖에도 화재를 알리는 코드 레드.
유아의 납치를 알리는 코드 앰버.
병원 전산이 마비됐음을 알리는 코드 화이트 등등이 존재했다.
“다들 비켜 주세요. 환자는 제가 보겠습니다.”
준후가 몰려 있는 사람들을 헤치며 환자에게 나아갔다.
의료진이 도착해서 처치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환자가 쓰러졌음에도 CPR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기를 쓰고 빨리 달려온 보람이 있었다.
“환자분, 괜찮으세요?”
준후는 무릎을 굽히며 쓰러진 환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5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성 환자는 미동이 없었다.
준후는 환자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대보았다.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유심히 관찰한 결과.
환자의 흉곽은 오르락내리락거리는 움직임이 없었다. 이쯤 되면 더 두고 볼 필요도 없었다.
당장 흉부 압박이 필요했다.
준후는 환자의 코트를 벗기고 착용하고 있는 목걸이 등이 있는지 살피고 곧장 흉부 압박을 준비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예기치 못한 날벼락을 맞게 된 것은.
“서…… 선생님, 저희 남편 우심증이에요.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서요.
곁에 있던 보호자가 뜻밖의 정보를 전했다.
우심증(右心症).
이는 말 그대로 심장이 우측으로 향한 질환이었다.
준후가 교과서로만 공부한 질환이기도 했다.
우심증 환자 자체가 드문 데다가.
흉부외과 근무를 해 본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단 한 번의 막힘도 없었던 준후가 처음으로 막혔다.
환자의 가슴에 얹었던 두 손도 갈 길을 잃은 듯 방황했다.
어쩐다?
우심증 환자에게 CPR을 해본 적은 없는데?
심장이 오른쪽에 있으니 손바닥을 더 내려서 압박해야 하나?
짧은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방송을 듣고 온 스태프가 있을까 해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흰 가운을 걸친 사람은 준후뿐이었다.
기댈 곳조차 없는 상황.
환자의 생명은 오로지 준후의 판단에 달려 있었다.
영겁처럼 느껴지는 찰나 속에서 준후는 끊임없이 고민했다.
시간은 준후의 편이면서도.
동시에 준후의 적이기도 했다.
처치를 제때 한다면 환자를 살릴 수 있을 테고 그렇지 못한다면 정반대의 결과가 나올 테니까.
스스로를 믿자.
믿음이 없으면 될 일도 안 돼.
준후는 중심을 잃고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 잡았다. 태도가 달라지면서 눈빛도 변했다.
준후는 어느새 공포를 모르는 검객의 눈을 하고 있었다.
본격적인 흉부 압박의 서막이 올랐다.
퍽! 퍽! 퍽! 퍽!
단단하게 깍지를 낀 두 손은 환자의 가슴 정중앙을 압박했고.
그럴 때마다 환자의 몸이 파도처럼 들썩거렸다.
환자가 우심증이라고 해서.
준후는 흉부 압박의 위치를 바꾸지 않았다.
* * *
환자는 5분 만에 의식을 되찾고 소생되었다.
준후가 바람 같이 현장에 도착해 흉부 압박을 했고.
뒤따라온 유정은 늦었지만 앰부백(공기 주머니)과 제세동기를 챙겨서 현장에 도착했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치료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준후는 환자를 부축해서 일으키며 환자에게 물었다.
“아. 네.”
환자의 대답은 짧고 어눌했다.
아직 의식이 완전히 돌아오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저희 남편이 살았어요.”
“의사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데요. 마침 저기 응급실 직원들이 오네요. 응급실에서 자세한 검사 받으시고 진료도 마저 받으시면 될 겁니다.”
“네. 선생님. 정말 감사해요.”
드르르륵.
때마침 저 멀리서 스트레쳐 카를 끌고 오던 응급실 스태프들이 현장에 도착했다.
“이 환자분 우심증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신경 써서 관리해 주세요.”
준후는 스트레쳐 카에 실려 가는 환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늘도 소중한 생명을 살렸다는 사실에 보람을 느꼈다.
“유정아, 너도 고생 많았다.”
“고생하긴 했지. 어휴, 숨 차.”
유정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유정은 병동에서 앰부백을 빌려오고 자동 제세동기까지 챙겨 현장으로 달려왔다.
준후가 흉부 압박을 하는 동안.
쉴 틈 없이 앰부백을 짜기도 했다.
환자를 살리는 데는 유정의 공도 컸다.
“그나저나 준후, 너 전생에 홍길동이었니? 사람들 틈을 아주 귀신처럼 통과해서 달리던데?”
“내가 원래 잡다한 기술에 능하거든. 앞으로 이런 거 자주 보게 될걸?”
“거기 두 사람, 어디 과 인턴이에요?”
때마침 낯선 목소리가 두 사람의 대화에 껴들었다.
준후가 고개를 돌리자 안경을 쓴 중년 의사가 서 있었다.
그런데 왜일까.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 어쩐지 친숙한 느낌이 드는 것은.
준후는 위화감의 정체를 밝히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저는 오늘부로 소화기 외과에서 수련하게 된 서준후라고 합니다.”
“저도 소화기 외과에서 수련을 시작한 최유정이라고 합니다.”
“공교롭게 나랑 인연이 있군.”
사내가 씨익 웃으며 검지로 본인의 가운 가슴을 가리켰다.
가운 가슴에는 ‘위장외과의 유승용’이라는 직함이 박혀 있었다.
나이를 감안하며 최소 교수급 인물로 보였다. 은근히 뿜어내는 위엄 또한 만만치 않았다.
“앞으로 자주 볼 텐데, 말은 편하게 해도 되겠어요?”
“네. 당연히 그러셔야죠.”
“사실 난 자네가 흉부 압박을 시작할 때부터 곁에 있었네.”
“처치에 집중하느라 곁에 계신지 몰랐습니다.”
“암. 날 의식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승용이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우심증 환자인데 평범한 환자랑 똑같이 흉부 압박을 했던데. 이유가 있나?”
아까 준후를 괴롭혔던 질문이 승용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우심증 환자는 어떻게 흉부 압박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준후는 찰나의 시간을 지옥처럼 보냈었다.
지금도 그때만 떠올리면 눈앞이 깜깜하고 가슴이 먹먹할 정도였다.
“우심증이라고 흉부 압박 위치를 변경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이유를 묻고 있네.”
승용이 취조하듯 대답을 재촉했다.
“우심증이라고 해서 환자의 심장이 완전히 오른쪽에 달린 건 아닙니다.”
“…….”
“심장의 방향이 왼쪽이 아닌 우측으로 틀어졌을 뿐이죠. 그렇다면 굳이 압박점을 바꿀 필요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준후의 설명이 이어졌다.
일반적인 사람의 심장은 ‘▷’ 형태로 좌측에 치우쳤고.
우심증 환자의 심장은 ‘◁’의 형태로 우측에 치우쳤다.
하지만 굳이 이런 형태에 현혹당할 필요가 없었다.
결국 흉부 압박이 필요한 지점은 삼각형의 중앙에 해당하는 밑변 지점이었다.
그러니까 보통 사람이든.
우심증 환자이든 환자의 명치 부근, 그러니까 가슴 중앙을 압박하면 되는 거 아닐까.
준후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우심증이라는 미혹을 걷어내고 소신대로 흉부 압박을 했다.
“혹시 제 생각이 틀렸을까요?”
준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준후는 궁금했다.
자신의 처치가 얻어걸린 것인지.
아니면 제대로 된 의학적인 판단에서 비롯된 것인지가.
“아니, 자네 말이 맞아. 혹시 선배나 다른 사람한테 이야기를 들은 게 있나?”
“아닙니다. 제가 즉흥적으로 판단했습니다.”
준후의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승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군. 생각 없이 되는 대로 CPR을 한 줄 알았는데. 나름 근거가 있었다니 말이야.”
“운도 많이 따라준 것 같습니다.”
준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가 저 환자에게 흉부 압박을 해야 했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나?”
승용의 질문은 이제 유정에게 향했다.
“그…… 그게…….”
유정이 말을 더듬으며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준후가 보기에 유정은 아까부터 눈에 띄게 얼어 있었다.
승용을 마주친 후부터 핵 인싸다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편하게 대답해 봐.”
“솔직히 말씀드리면 팔 위치를 조금 더 내렸을 것 같습니다. 우심증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면 아무래도 마음이 흔들리기 마련이니까요.”
“그래. 보통은 그렇겠지. 덕분에 오늘 좋은 구경을 했군. 둘 다 의국에서 보자고.”
승용이 휘적휘적 걸으며 스카이 브릿지를 통과해 사라졌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다 있네. 소화기 외과 가는 도중에 소화가 외과 교수님도 다 만나고.”
준후가 혼잣말을 이어나갔다.
“근데 나, 저 교수님 어디서 본 것 같아. 왠지 낯이 익어.”
“당연히 낯이 익어야지. 저분, 누구인지 몰라?”
승용이 사라진 후에야 유정이 쾌활한 목소리로 물었다.
“병원에 교수님이 얼마나 많은데 일일이 다 기억해? 그러는 넌 저분이 누군지 알고?”
“알다마다.”
유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소화기 외과 과장님이자 진료부원장님이셔.”
“그래서 그렇게 얼어 있었던 거야? 아까는 아주 꼼짝을 못하던데.”
“그것 말고 다른 이유가 또 있어. 네가 과장님을 어디서 본 것 같다고 말한 이유와 일맥상통하지.”
“궁금하게 하지 말고 빨리 말해 봐.”
“과장님이 승범 오빠 아버지야.”
유정의 대답에 준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의대 재학시절 준후와 사사건건 부딪쳤던 유승범.
학교 화장실에서 태연하게 담배를 피웠고.
카데바 사진을 SNS에 올렸던 희대의 망나니 유승범.
그런 유승범의 아버지가 저 사람이라고?
확실히 이야기를 듣고 보니 두 사람은 닮은 데가 많았다.
양옆으로 찢어진 가느다란 눈매.
얇고 핏기없는 입술.
송곳처럼 뾰족한 역삼각형의 턱 등등.
준후가 처음 본 승용에게 낯익은 느낌을 받았던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즉 준후는 승용에게서 승범을 봤던 것이다.
“소화기 외과 근무했던 동기들한테 이야기 들었는데. 과장님은 완전 독재자 스타일이래.”
“…….”
“인턴 평가까지 본인 손으로 직접 한다고 하더라. 그동안 B등급 이상을 받은 동기도 없고.”
“…….”
“준후, 넌 좋겠다. 과장님 눈에 들어서. 네가 최초로 소화기 외과에서 A턴 받는 거 아니야?”
유정이 부럽다는 눈빛을 보냈지만 준후는 담담하기만 했다.
승용이 승범의 아버지라…….
부전자전이라는 사자성어가 떠오르면서 불길함이 밀어닥쳤다.
이번 소화기 외과 근무.
아무래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듯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