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89화 (89/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89화

제15장 닮은꼴(4)

소화기 외과 컨퍼런스 룸.

업무 인수인계를 위해 모인 인턴들은 모처럼 재잘재잘 수다를 떨고 있었다.

마치 의대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공교롭게도 모인 인턴들이 전부 신원대 출신이었던 것이다.

크고 작은 목소리.

곳곳에서 터지는 맞장구.

희노애락이 담긴 표정 등등.

인턴들의 대화는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 장면을 연상케 할 만큼 역동적이었다.

그동안 병원에서 겪었던 일이 워낙 역동적이었으니까.

준후는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묵묵히 듣는 쪽이었다.

친구들이 느낌 감정에 공감해 주고 가끔 질문을 던졌다.

준후가 궁금했던 건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승범의 아버지인 승용이 어떤 사람인지.

둘째는 소화기 외과의 근무 분위기는 어떻고 수술 어시스트는 얼마나 자주 들어가는지였다.

어떤 대답은 기대에 못 미쳤고.

어떤 대답은 기대를 뛰어넘었다.

“레지던트 쌤들은 어때? 우리한테 잘해주는 편이야?”

유정이 눈을 빛내며 동기들에게 물었다.

“전체적으로 잘해주는 편이지. 특히 힘들 때는 대진 선배를 찾아. 1년 차인데 처치도 잘 도와주거든.”

“…….”

“조심해야 할 사람이라면…… 미호 선배 정도?”

“미호 선배? 못 들어 본 이름인데?”

“다른 학교 출신이니까. 되게 까탈스럽고 신경질도 잘 부려. 한 번 찍히면 얼마나 표독스럽게 구는지 몰라.”

동기가 질렸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미호의 별명이 구미호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건 그렇고 한 사람이 없네?”

준후가 컨퍼런스 룸을 살피며 모처럼 한마디 했다.

소화기 외과에 배정된 인턴은 총 4명이었다. 그런데 정작 인수인계를 받는 사람은 3명뿐이었다.

한 명이 계속 부재중이었다.

“나 화장실 갈 건데 내가 알아보고 올 게.”

유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10분이 지난 후 돌아온 유정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마에 손을 얹었다.

“우리 고생 좀 하겠다. 스테이션에 알아봤는데 같이 근무할 인턴이 탈주했대.”

“탈주? 세상에 맙소사. X됐잖아?”

용호가 놀란 부엉이처럼 눈을 치켜떴다.

용호는 준후, 유정과 함께 소화기 외과에서 수련하게 된 인턴이었다.

“늦깎이 인턴이라 나이가 많았는데 어제저녁부터 연락도 안 된다더라. 그럼 백 퍼센트 탈주지.”

“올해 첫 탈주자가 하필이면 우리 근무할 때 나오냐. 재수도 없지.”

용호의 목소리에 시름이 가득했다.

인턴의 잡무량은 상상을 초월했다.

특히 소화기 외과는 더더욱.

소화기 외과가 위장관 위과, 간담췌외과, 대장관 외과를 다 포함하고 있어서 관리할 환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TO가 발생한다면.

쉬는 날이 줄고 당직일이 늘어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유정과 용호와 달리 준후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아니, 오히려 이 상황을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T.O가 줄었다면 수술 스크럽을 설 기회가 늘겠구나, 하는 변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근데 준후, 넌 이상하게 기분 좋아 보인다?”

유정이 준후의 표정을 살피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의식중에 기분이 표정에 드러났던 모양이었다.

“기왕 일이 터진 거 좋게좋게 생각해야지.”

준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수인계해 준 동기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희들은 고생 많았고 우리는 고생하러 갑시다.”

그렇게 소화기 외과 근무가 시작되었다.

* * *

위장관 외과 스테이션에 딸린 물품실.

준후는 드레싱 카트에 필요한 물품들을 챙기고 있었다.

수액과 수액 세트.

드레싱(상처 소독)에 필요한 도구.

주사기와 주사 약제들 등등.

인수인계를 하는 동안에도 오더는 차곡차곡 쌓여 산더미를 이루고 있었다.

“선생님. 오늘 오전은 하루 종일 정신없겠네요.”

간호사 효진이 준후에게 다가와 말을 이었다.

“월요일이라 오더 폭탄이 떨어진 데다가 인턴 한 분은 탈주까지 했다던데…….”

효진의 목소리에는 근심과 걱정이 가득했다.

오더가 밀리면 인턴뿐만 아니라 간호사들도 영향을 받았던 탓이다.

“전 별로 신경 안 씁니다.”

“원래 성격이 무디신 거예요? 아니면 자포자기하신 거예요?”

“둘 다 아니에요. 충분히 감당할 수준이라고 생각하거든요. 30분 정도면 끝날 것 같은데요?”

“30분이요? 제가 보기에 2시간은 걸릴 것 같은데.”

준후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효정이 혀를 내둘렀다.

“일이 밀렸다고 처치를 너무 급하게 하면 안 돼요. 환자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빠르고 꼼꼼하게가 뭔지 보여드릴게요.”

준후는 효정을 향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자신감의 근거는 곧바로 드러났다.

준후는 벼락불에 콩을 굽듯이 밀린 오더들을 해치워 나갔다.

ABGA 채혈을 할 때는 손가락으로 환자의 맥박을 느낀 후, 주사기 바늘을 45도 각도로 세워서 찔렀고.

소변을 못 봐서 불편한 남성 환자에게 폴리 카테터(소변줄)를 삽입할 때는.

스으으윽.

환자의 성기를 소독하고 거침없이 폴리 카테터를 밀어 넣었다.

남성의 경우 12-18센티미터를 삽입하는데 준후는 그 길이를 자처럼 정확히 재면서 삽입했다.

상처를 소독하는 드레싱 또한 빠르고 간결했다.

소독액이 묻은 솜으로 나선형을 그리며 상처 주위를 닦아냈다.

한편 처치 내내 준후를 노심초사하며 지켜보던 효정은 또다시 경악하고 말았다.

장담했던 대로.

그러니까 준후가 정말 빠르고 꼼꼼하게 처치했기 때문이다.

간호사 근무만 벌써 4년 차인 효정은 그동안 수많은 인턴을 경험해 보았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준후의 처치력은 한 손가락에 꼽혔다.

뭐랄까.

단단하고 야무진 느낌?

실수를 하지 않을 것 같은 든든함?

그 어떤 처치를 할 때도 준후의 손은 망설임도 없고 떨림도 없었다.

또한 처치에 필요한 주의사항을 잊어버리는 일도 없었다.

그야말로 처치의 교과서였다.

‘와. 고작 10분밖에 안 지났잖아?’

효정은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두 눈을 의심했다.

다른 인턴이었다면 40분은 걸렸을 처치들이 준후의 손에서는 10분 만에 끝났다.

준후의 처치는 빠르고 실패가 없었으니까.

그래서인지 몰라도.

준후만 다른 시간에 사는 것 같았다.

“선생님 진짜 정체가 뭐예요? 저 선생님 같은 분 처음 봐요.”

다음 병실로 이동하는 도중, 효정이 감탄하며 말했다.

“가끔은 저도 제 정체가 의심스럽더라고요.”

준후는 너스레를 떨며 대답했다.

사실 준후의 처치 속도가 빠른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처치의 초식화였다.

초식이란 다양한 무공 동작들을 일련의 흐름과 순서에 따라 펼치는 연속 동작이었다.

태권도의 품새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빨랐다.

응급의학과와 정형외과를 거치면서.

준후는 인턴 잡에 필요한 처치들을 모두 초식으로 정형화시켰다.

가령 ABGA를 할 때.

손가락으로 요골동맥을 촉지하는 방법.

최적의 동맥 위치.

주삿바늘의 삽입 각도와 삽입 깊이 등등을 초식으로 재창조했다.

이는 마치 정량화한 요리와 비슷한 효과를 냈다.

같은 요리사가 같은 요리를 하더라도 재료의 중량을 못 맞추면 요리 맛은 변하기 마련 아닌가.

하지만 준후는 그럴 일이 없었다.

초식으로 처치의 정량화를 이뤄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준후는 한결같이 빠르고 정확하게 처치할 수 있었다.

물론 환자에 따라 같은 처치라도 접근이 달라야 하는 경우가 있었다.

앞서 설명한 ABGA 채혈의 경우.

환자가 알렌 검사에서 합격을 받지 못했을 때.

손목이 아닌 다른 동맥에서 채혈을 해야 했다.

준후는 그런 특별한 케이스까지 다 초식화 시켰다.

이른바 초식의 발전이랄까.

무림의 초식도 실제로 이런 식으로 발전되고 정교하게 가다듬어졌다.

가령 화산파의 매화검법은 1초식 매화노방에서 24초식 매화만리향으로 마무리가 되는데.

1초식만 사용하다 보니.

1초식이 통하지 않는 상황을 맞닥뜨려 2초식을 개발하고.

2초식이 또 3초식으로 이어지는 방식이었다.

준후가 시도한 처치의 초식화도 같은 방식으로 구성이 되어 있었다.

참고로 현재 준후의 경우.

인턴이 하는 모든 처치를 초식으로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준후의 처치가 남다른 또 다른 이유.

그것은 바로 진통 점혈이었다.

인턴이 환자에게 실시하는 처치들은 대부분 통증을 수반했다.

주삿바늘로 살갗을 찌르고.

튜브 같은 것을 신체 부위에 쑤셔 넣고 등등.

그 과정에서 인턴은 필연적으로 환자와 마찰을 빚었다.

말다툼과 하소연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간은 지연되고 말이다.

하지만 준후는 굳이 환자와 다툴 필요가 없었다.

필요한 처치 전.

진통 점혈로 환자의 통증을 잠재웠던 덕분이었다.

통증이 없으니 환자는 준후에게 불평·불만을 할 필요가 없었고 준후는 자연스럽게 처치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무림에서의 경험과 지식의 덕을 준후는 톡톡하게 보고 있었다.

* * *

“휴. 드디어 끝났네요. 고생하셨습니다. 선생님.”

준후는 마지막 병실을 나오며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고생이야 선생님이 다 하셨죠. 그나저나 정말 약속 지키셨네요? 30분 만에 오더 다 끝났어요.”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니까요. 이제 제 실력은 의심 안 하시겠죠?”

“의심이 뭐에요. 아까부터 감탄만 하고 있었는데.”

효정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선생님 보고 있으니까 왠지 동질감이 느껴지네요.”

“어떤 점에서요?”

“선생님이 처치할 때 왼손을 쓰시더라고요. 저도 왼손잡이거든요. 저희 부모님이 조금 옛스러워서 그런지 몰라도.”

“…….”

“밥 먹을 때나 연필 쥘 때 그렇게 오른손을 쓰라고 강요하셨는데 말이죠.”

“저 원래 오른손 써요. 왼손은 훈련 중이에요.”

준후가 멋쩍게 웃었다.

정형외과에서 양수 호박 기술을 익힌 지 어언 한 달째.

준후의 왼손은 제법 물이 올랐다.

웬만한 처치는 다 왼손으로 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소화기 외과에서는 왼손 위주로 처치하자고 마음먹은 상태였다.

양수 호박 기술 수련과 왼손 처치를 병행한다면 왼손은 더욱 빠른 속도로 정교해질 테니까.

“에이, 농담이죠? 왼손을 그렇게 잘 쓰는데요?”

“오른손을 따라가려면 멀었어요.”

준후는 드레싱 카트에 있는 주사기를 오른손에 얹고 빙글빙글 돌렸다.

마치 요즘 유행하는 피젯 스피너를 돌리듯.

주사기의 회전 속도는 무시무시해서 바람이 다 일어날 정도였다.

사소한 행동이지만 회(廻)자 결의 이치를 담았기에.

“선생님. 그럼 내친김에 하나만 더 물어볼게요.”

“그러세요.”

“만약에 아까 오른손으로 처치했으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지금보다 처치가 두 배는 더 빨랐겠죠.”

준후는 차분하게 대답했고.

효정은 경악한 나머지 입을 떡 벌렸다.

“선생님은 대단한 일을 별거 아닌 것처럼 말하는 재주가 있네요. 그 정도면 거의 초능력자 같은데.”

“제가 설령 초능력자라고 해도 모든 게 가능한 건 아니죠.”

준후의 얼굴에 처음으로 애잔함이 묻어났다.

채 아물지 못한 마음의 상처는 아려왔다.

내공과 무공.

그 초인적인 힘으로도 준후는 무림에서 소중한 사람들을 다 지켜내지 못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은 그만큼 벅차고 힘든 일이었다.

그때의 무력함.

또 느끼고 싶지 않아.

이젠 누구도 아프거나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문득 밀려오는 어둠과 그림자를 준후는 애써 물리쳤다.

그러면서 현재와 미래에 집중했다.

내공과 무공을 더 발전시키면.

현대 의학에 더 정통하면.

과거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준후는 굳게 믿었다.

그 믿음이야말로 지금 준후의 뿌리와 기둥을 이루는 근본정신이었다.

“어쨌든 선생님 덕분에 저도 손을 덜었네요. 카트 주세요. 뒷정리는 제가 할게요.”

“고맙습니다. 사양 안 할게요.”

준후는 효정과 헤어진 후 당직실로 들어갔다.

드르르륵.

당직실에서 남녀 한 쌍의 레지던트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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