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90화
제15장 닮은꼴(5)
준후는 소화기 외과 레지던트들과 간단하게 통성명을 나눴다.
두 사람 다 1년 차였고 남성의 이름은 김대진, 여성의 이름은 주미호였다.
대진은 소처럼 순박한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던 반면.
미호는 미인상이었지만 옆으로 찢어진 눈매 때문에 차갑고 독한 분위기를 풍겼다.
“신원대 출신 맞죠? 학교 다닐 때 소문 많이 들었는데.”
“기왕 지낼 거 말 편하게 해도 되죠?”
“네. 편하게 하세요.”
“오늘 월요일이라 오더 많지 않았어? 생각보다 빨리 들어왔네?”
“그러게. 심지어 인턴 한 명은 탈주했다고 들었는데.”
대진의 말에 미호가 맞장구를 치며 말을 이었다.
“처치 제대로 한 거 맞아? 혹시 바쁘다고 날림으로 한 거 아니지?”
미호가 팔짱을 낀 채 탐탁지 않다는 눈빛을 보냈다.
준후의 처치가 너무 빠르자 정확도를 의심한 것이다.
“환자를 어떻게 날림으로 보겠어요. 그런 마음가짐이었으면 애초에 의사할 생각도 안 했습니다.”
준후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의사를 꿈꾸는 동기는 의사를 지원하는 사람만큼 다양할 것이다.
누구는 명예.
누구는 돈.
누구는 적성.
누구는 부모님의 영향 등등.
준후의 경우에는 무림에서 동료들을 눈앞에서 잃으며 느꼈던 무기력과 한 때문이었다.
그런 준후가 환자를 날림으로 본다?
그건 하늘이 무너져도 있을 수 없었다.
“말은 거창하게 잘하네. 누가 들으면 벌써 명의인 줄 알겠다?”
미호가 가시 돋친 목소리로 물었다.
“정 못 믿겠으면 확인해 보세요. 전 제 처치와 진심이 의심받아야 할 필요를 못 느끼겠네요.”
“어머머? 애 한 성깔하네?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그냥 넘어갈 줄 알았지?”
드르르륵. 쾅!
미호는 신경질을 부리며 당직실을 뛰쳐나갔다.
스테이션에서 근무 중인 간호사 중 한 명을 붙잡고 물었다.
“서준후라고 오늘 새로 온 인턴 있는데요. 준후랑 같이 라운딩 한 선생님 계세요?”
“전데요?”
간호 기록지를 입력하던 효정이 대답했다.
“선생님. 준후 처치 제대로 한 거 맞아요? 복귀가 너무 빨라서 미심쩍던데.”
“아…… 준후 선생님이요? 처치 끝내주던 걸요? 엄청 빠르고 엄청 꼼꼼해요.”
기대하지 않았던 대답에 미호의 미간이 좁아졌다.
인턴은 원래 첫날부터 바짝 군기를 잡아줘야 제맛이거늘…….
준후의 일 처리가 정말 그 정도로 완벽했단 말인가.
미호는 팔짱을 낀 채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러다가 눈을 가늘게 뜨려 효정을 쳐다보았다.
“선생님, 혹시요.”
“네. 말씀하세요.”
“준후가 잘 생겼다고 홀라당 넘어간 건 아니겠죠?”
“저기요. 선생님. 그런 막말이 어디 있어요?”
미호의 무례한 발언에 효정이 발끈해서 언성을 높였다.
“너무 불쾌하네요. 당장 사과하세요. 이번엔 저도 못 넘어가겠어요.”
“에이, 농담 한 번 한 걸 가지고 왜 그렇게 정색하세요? 매사에 그렇게 진지하면 피곤하지도 않아요?”
미호가 눈웃음치며 스테이션을 황급히 빠져나갔고.
멀어지는 미호를 보며 간호사들이 수군거렸다.
“아휴. 저 불여시. 말하는 꼬라지 좀 봐. 하여간 지 선배들 말고는 다 하인이라니까.”
“효정아. 억울해도 네가 참아야겠다. 똥 밟았다고 생각해.”
“쯧쯧쯧. 이름이 괜히 미호가 아니라니까.”
간호사들은 잘근잘근 미호를 씹어댔다.
* * *
일찍 처치를 마친 준후는 당직실을 청소 중이었다.
미호가 시킨 일이었다.
청소도 인턴 잡의 일부였기에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미호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뭔가 자신을 휘어잡으려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인수인계를 받을 때.
동기들이 조심하라고 했던 인물이 바로 미호였다.
그래서 준후는 청소하는 내내 미호를 유심히 관찰했다.
미호는 미인계와 활발한 성격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빌런(?)이었다.
동기들과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며 친근감을 표시했고.
선배들에게는 애교와 아양을 떨며 사랑을 독차지했다.
하지만 후배와 간호사를 대하는 태도는 영 딴판이었다.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을 서슴지 않았고 하대와 냉대가 기본이었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전형적인 소인배라고 해야 할까.
“대진아. 혹시 바빠?”
“바쁘긴 한데 왜?”
“응급실 콜 왔는데 파라(Paracentesis, 복수 천자의 줄임말) 좀 해달래. 혹시 네가 가줄 수 있어?”
“그럼 내가 갔다 올게.”
“역시 대진이가 최고라니까. 땡큐. 땡큐.”
“대진아. 중환자실 라운딩 좀 부탁해도 될까? 오늘은 이상하게 컨디션이 안 좋아서.”
“대진아.”
“대진아.”
…….
미호는 특히 동기인 대진을 노예처럼 부려 먹었다.
아무리 선배들에게 사랑을 받는다고 해도.
선배들에게 업무를 직접 부탁하기는 어려우니 동기인 대진에게 자주 손을 벌리는 것이다.
이는 지극히 영악한 행동이었다.
준후가 본 대진은 순둥순둥해서 거절을 못 했다.
미호의 부탁이 도를 넘었음에도 미호가 미안하다거나 고맙다고 하면 금방 화를 풀고는 했다.
그러니까 미호는 대진의 성격까지 계산해서 뼛속까지 우려먹었던 것이다.
미호의 별명이 구미호였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응급의학과에서는 성민.
정형외과에서는 동석.
소화기 외과에서는 미호.
준후는 자신이 마주했고 또 마주하고 있는 빌런 계보를 어렵지 않게 정리할 수 있었다.
만약 이 셋 중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사람을 꼽자면 분명 미호가 되리라.
왜냐면 미호의 행동과 말들이.
무례와 쌀쌀함.
교육과 부려먹는 것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준후. 청소 다 했어? 설마 청소로 시간 때우고 있는 건 아니겠지?”
“시간 때우는 건 아니고요. 방금 끝났습니다.”
준후가 손걸레를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그사이에 밀린 오더 있으니까 처리하고 와.”
“네.”
대답을 마친 준후는 책장에서 소화기 외과의 지식이 담긴 포켓북을 챙겨 가운에 넣었다.
앞으로 틈틈이 포켓북을 읽으며 지식을 쌓을 예정이었다.
1) 양수 호박 기술의 숙련도를 높여 왼손의 효율을 한층 더 끌어올린다.
2) 소화기 외과에 지식을 흡수한다.
3) 소화기 외과 수술 스크럽에 들어가서 수술 경험을 쌓는다.
이 세 가지가 준후가 소화기 외과에서 세운 목표였다.
“다녀오겠습니다.”
준후는 당직실을 나와 포켓북을 펼친 채 병동 복도를 걸었다.
목적지는 심전도 실.
포터블 심전도 기기를 챙겨서 병동 환자의 심전도를 체크해야 했다.
그런데 이동하는 자투리 시간까지 준후는 포켓북을 펼친 채 공부시간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포켓북에서 단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았음에도.
준후는 마주 오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비껴냈다.
간단한 일이었다.
내공으로 증폭한 청각을 통해.
발소리만으로도 상대와의 거리를 알 수 있었으니까.
발소리만으로도 상대가 접근하는 방향을 알 수 있었으니까.
그뿐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준후는 발소리만으로도.
상대가 환자인지, 보호자인지, 간호사인지, 의사인지도 알 수 있었다.
크룩스를 신은 의사의 발소리.
간호사용 샌들을 신은 간호사의 샌들 소리.
환자들이 질질 끄는 슬리퍼 소리 등을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심전도 실로 이동하는 동안.
준후는 포켓북을 무려 20페이지나 읽었다.
의대 시절 해부학 교수 밑에서 따로 공부했던 지식이 큰 밑바탕이 되었고.
지금까지 각종 지식을 단순히 암기하지 않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공부 방식 덕분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돌아오는 길에 준후는 양수 호박 기술도 펼쳤다.
카트를 밀고 있는 양손으로 가위바위보를 했던 것이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재능을 가졌으니.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노력을 통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외과의가 되겠다.
준후의 목표는 원대했다.
대한민국을 넘어서 세계 최고의 외과의가 되기를 꿈꿨다.
무림을 경험한 준후라면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한편 포켓북을 읽으며 걷는 기행(?)이 반복되면서 준후는 먼 훗날 환막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환막은 환자 사이로 막 간다는 줄임말이었다.
* * *
효과 확실하네.
준후는 씨익 웃으며 손에 쥐고 있던 포켓북을 가운에 넣었다.
현재 시각은 오후 2시.
그동안 짬짬이 시간을 냈음에도 포켓북을 100페이지나 독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첫날에 이만한 속도라면.
소화기 외과 수련이 끝날 즈음에는 책을 세 바퀴 정도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는 어지간한 레지던트보다 준후의 지식이 더 출중해지리라.
드르르륵.
준후는 모처럼 당직실로 복귀했다.
미호는 스크럽을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대진만 외롭게 차트를 작성 중이었다.
“준후 왔냐?”
대진이 먼저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네. 선배. 바쁘세요? 제가 일 좀 거들어 드릴까요?”
“아냐. 됐어. 병동에, 처치실에, 검사실까지 돌아다니느라 피곤할 텐데 짬 났을 때 쉬어야지.”
대진은 오히려 준후를 위해 주었다.
미호와는 태도가 영 딴판이었다.
“전 별로 안 피곤한데요?”
“내 앞에서 센 척할 필요 없어. 누구는 인턴 생활 안 해 봤니?”
“선배 앞에서 센 척해봐야 제가 얻을 게 뭐가 있다고요.”
준후가 대진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20분 전.
준후는 비타민 B 복합제제.
비타민 C, 타우린, 아르기닌 영양제를 섭취하고 화장실에서 운기조식을 했다.
덕분에 조금 있던 피로와 나른함마저 싹 사라졌다.
무거웠던 머리까지 가벼워졌다.
한 마디로 컨디션은 최상.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운기조식과 영양제 조합은 사기였다.
덕분에 준후는 근무 내내 날카로운 집중력과 튼튼한 체력을 유지할 수 있었으니까.
“어라? 선배 아이디가 아니네요?”
대진이 작업하는 모니터를 확인하고 준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호가 스크럽 가기 전에 오더 좀 입력해달라고 해서. 미호 아이디로 작성 중이야.”
“선배. 혹시 미호 선배 좋아하세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럼 미호 선배한테 약점 잡힌 것도 아니죠?”
“그것도 아닌데? 너 말이 좀 심하다?”
대진이 피식 웃으며 팔꿈치로 준후의 옆구리를 건드렸다.
“선배가 너무 미호 선배 일을 대신해 주니까 하는 말이에요. 선배도 선배 일로 바쁠 텐데.”
“동기끼리 도와주고 도움도 받고 그러는 거지. 나쁘게 볼 것 있나.”
‘도와주기만 하고 도움받는 게 하나도 없어서 하는 말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준후는 참았다.
옛날 생각 나게 만드네.
나도 이랬던 적이 있었는데.
대진을 지켜보고 있으면 무림에서의 기억이 겹쳐지는 준후였다.
무림맹 무사로 입관하고 1년 동안.
준후도 대진처럼 살았다.
주변에서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도왔다.
그러면 자신이 더 힘들어질 줄 알면서도 도왔다.
정파의 정은 단순히 정(正)이 아니라 정(情)도 의미한다고 믿었기에.
하지만 그건 순진한 착각이었다.
사람 중 일부가 그런 준후를 이용해 먹기 시작했다.
정말 필요해서 도움을 요청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준후에게 떠넘겼던 것이다.
미호가 대진에게 그랬던 것처럼.
현대식으로 표현하자면.
호의를 베풀었다가 둘리가 되어버린 꼴이었다.
이후로 준후는 변했다.
가짜 도움과 진짜 도움을 구분하는 눈을 길러 진짜 도움만 주었다.
그런데 대진이 딱 그때의 준후를 닮아 있었다.
그 속내마저 준후와 똑같은지는 의문이었지만.
그럼 한 가지 시험을 해볼까.
“선배. 죄송한데 저 냉장고에서 음료수 하나만 꺼내주실래요?”
“그래. 뭐 어려운 일도 아니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대진의 어깨를 준후는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뭐야? 음료수 달라며? 왜 못 가게 막아?”
“이럴 때는 네가 알아서 가져다 먹으라고 하셔야죠.”
준후는 질렸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냉장고에서 가까운 사람도 준후였고 당장 할 일이 없는 사람도 준후였다.
그러니 대진은 준후의 부탁을 거절하는 편이 옳았다.
아무래도 대진은 과거의 준후와 같은 부류가 아닌 것 같았다.
그보다 더 심한 부류 같았다.
순간 준후의 머리를 스쳐 지나는 심리학 용어.
바로 착한 아이 증후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