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91화 (91/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91화

제16장 여우(1)

대진과의 대화를 통해 준후는 몇 가지 사적인 정보를 얻어냈다.

대진이 장남이라는 것.

애정 표현이 적은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는 것.

이 두 가지 성장 환경을 가졌다고 해서 반드시 착한 아이 증후군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대진이 지금까지 보여준 행동까지 감안한다면 가능성이 높은 건 사실이었다.

착한 아이 증후군.

이는 주변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의 욕구를 지나치게 억누르는 사람들의 심리를 가리키는 용어였다.

“선배. 다른 사람이 부탁하면 거절 같은 거 잘 못하시죠?”

“그런 편이지. 거절하면 왠지 사이가 멀어질 것 같고 이상하게 죄책감도 들고.”

“그래도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준후는 솔직한 의견을 전했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는 없어요. 제가 비록 종교는 없지만, 신도 사람한테 욕을 먹는다고요.”

“…….”

“하물며 사람은 어떻겠어요?”

“준후 네 말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닌데. 어쩌겠니. 난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데.”

답답하다고 억울하다는 목소리로 대진이 대답했다.

대진은 최소한 본인의 문제는 자각하고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미호 선배가 부탁하면 몇 개는 거절하세요. 그렇게 시작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선배, 너무 피곤해 보여요.”

준후는 퀭한 얼굴의 대진을 살피며 말했다.

판다가 친구를 하자고 할 만큼 대진의 다크서클은 짙게 눈 밑으로 내려와 있었다.

눈빛은 생기가 없었으며.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가뜩이나 할 일이 넘쳐나는 레지던트 1년 차 아닌가.

그런데 동기의 업무까지 도맡으니 피로가 쌓일 수밖에…….

만약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대진은 의사가 아니라 환자가 될 것이다.

최악의 경우 과로사로 쓰러질지도 모르는데.

준후는 그런 최악의 사태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저도 일종의 부탁을 드린 거니까 들어주실 수 있죠?”

“으음…… 최대한 노력해 볼게.”

“그런 의미에서 로비 좀 할게요. 제가 소문난 로비스트거든요.”

농담을 마친 준후는 대진을 당직실 침대에 눕혔다.

장기인 추궁과혈을 시작했다.

주요 부위는 목, 어깨, 허리.

경추, 흉추, 요추로 이어지는 허리 라인을 분절할 때마다 뚜두둑 섬뜩한 뼈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공이 담긴 손가락을 둥글게 문지르며 굳은 근육을 이완시켰고.

짧게 단축된 근육은 팽팽하게 당겨주었다.

“어우야. 미쳤는데. 의사가 아니라 물리치료사인 줄 알았네. 어쩜 이렇게 시원할 수가 있지?”

“…….”

“뻐근하고 쑤셨던 게 싹 날아갔다. 고마워.”

“근데 선배는 왜 위장관 외과 전공을 택하셨어요?”

준후가 화제를 돌렸다.

소화기 외과를 이루고 있는 세 가지의 전공.

위장관 위과.

간담췌 외과.

대장 항문 외과.

그중에서 대진의 전공은 위장관 외과였다.

준후가 알기로 위장관 외과의 역할은 차차 축소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40세 이상이면 건강보험 공단에서 거의 무료로 위 내시경을 검사받을 수 있게 해주는데.

이런 조기 검진으로 인해 내시경 검사 중 용종을 떼어내는 경우가 많고.

위암을 빨리 발견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대단한 건 아니고.”

대진이 후련한 표정으로 침대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역류성 식도염을 앓았거든. 지금은 많이 나아지긴 했는데.”

“…….”

“어쨌거나 식도염으로 고통받다 보니 위장관 외과 쪽에 관심이 가더라.”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네요. 저도 비슷하거든요.”

준후는 공감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 사람의 진로란 어쩌면 과거에 받았던 상처를 치료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준후의 경우.

무림에서 지켜봐야만 했던 소중한 사람들의 부상과 질병, 그리고 죽음.

그로 인해 느꼈던 무력감과 안타까움이 준후를 외과의의 길로 이끌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드르르륵!

당직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수술 어시스트가 끝난 미호가 복귀했나 싶었는데.

주인공은 미호가 아닌 유정이었다.

“대진 선배. 죄송한데 환자 한 명만 봐주실래요?”

유정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 * *

유정이 앞장서서 도착한 곳은 6인실 병실이었다.

출입문과 인접한 병상에 드레싱 카트가 놓여 있었는데 카트 위가 지저분했다.

포장을 벗긴 소모품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이미 한바탕 전쟁을 치른 것 같았다.

“여기 계신 환자분인데요. 엘 튜브(Levin tube, 비위관 또는 콧줄) 삽관을 한사코 거절하셔서요.”

유정이 애타는 목소리로 노티를 시작했다.

때는 바야흐로 20분 전.

유정은 환자에게 비위관을 삽관하고 있었다.

환자의 이름은 고영철.

이틀 전 복강경 위 절제술을 받은 환자로.

수술 후 위에 가스가 많이 차서 비위관으로 위를 감압해야 한다는 오더가 떨어졌다.

문제는 처치 도중에 발생했다.

엘 튜브 삽입 도중.

환자가 심각한 고통을 호소하며 엘 튜브 삽관을 거절했던 것이다.

유정이 한참 호소했음에도 환자는 요지부동이었다.

콧줄을 꼽을 바에는 차라리 퇴원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니 대진에게 SOS를 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환자분 많이 힘드시죠? 근데 이 처치는 꼭 받으셔야 해요. 그래야 빨리 나아요.”

대진이 영철을 부드럽게 타일렀다.

“난 안 해, 아니, 못 해. 쇳덩어리를 삼키는 느낌이라고. 토할 것 같고 눈물도 핑 돌아.”

“치료받으려고 병원도 오고 수술도 받으셨잖아요. 그럼 저희 처치에 따라주셔야죠.”

대진도 물러서지 않았다.

영철에게 엘 튜브 삽관은 꼭 필요한 처치였다.

결코 타협이나 협상의 대상이 아니었다.

“똑똑한 선생님들이니까 다른 방법이 있지 않겠어? 다른 방법을 찾아봐.”

“…….”

“콧줄 꼽는 건 죽어도 못하겠다고.”

영철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의견이 평행선으로 대립하면서 침상 주변의 공기가 무겁고 팽팽해졌다.

같은 병실을 쓰는 환자와 보호자들은 흥미롭다는 듯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환자가 필수적인 처치를 거부하는 상황.

엘 튜브 이외에 다른 대안도 없었기에 진퇴양난이었다.

“제가 하면 조금 다를 겁니다. 저를 믿고 맡겨주세요.”

대진이 가까스로 한 마디 덧붙였다.

“그쪽 선생님이 하면 안 아프다는 보장 있어? 보장하면 기꺼이 허락하지.”

“제가 하더라도 아예 안 아플 수는 없습니다. 원래 안 아플 수가 없는 처치예요.”

“선생님. 혹시 본인 코에 이거 꼽아 봤어?”

영철이 드레싱 카트에 놓인 엘 튜브를 가리키며 대진에게 물었다.

“아…… 아니요.”

“그쪽 선생님은?”

“저도…….”

영철의 물음에 유정도 말끝을 흐렸다.

두 사람 다 처치만 해봤을 뿐 처치를 당한 적은 없었다.

이십대 중후반의 건강한 청년들이 엘 튜브 삽입을 당할 일은 거의 없으니까 말이다.

“안 당해 봤으면 말을 하지 마. 꾀병을 부리는 게 아니라 정말 힘들단 말이야.”

영철이 하소연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영철은 아직도 생생했다.

빳빳한 튜브가 목구멍을 통과할 때 느꼈던 불쾌함, 역겨움, 쓰라림이.

같은 고통을 반복할 바에는 차라리 수술을 한 번 더 받고 싶을 지경이었다.

영철의 고백에 병상 분위기는 다시 숙연해졌다.

“선배, 이젠 어떻게 하죠?”

유정이 대진을 쳐다보며 물었다.

“환자분이 이렇게 거부하시면 나도 답이 없는데. 일단 2년 차 선배한테 물어보고 올게.”

“잠깐만요.”

잠자코 있던 준후가 모처럼 대화에 껴들었다.

그리고 폭탄선언을 해버렸다.

“이 환자분 엘 튜브, 제가 삽입할게요.”

* * *

“준후야. 방금 환자분이 한 이야기 못 들었어? 절대 못 받겠다고 하시잖아.”

대진이 준후를 타일렀다.

“그래도 해야 하는 처치면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글쎄. 그게 그렇기는 한데…….”

대진은 난감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환자분 제가 아프지 않게 튜브 넣어드릴게요.”

“누가 하든 아프지만 않으면 상관없어. 아프지만 않으면. 대신 아프면 내 손으로 튜브를 빼버릴 거니까 그렇게 알아.”

영철이 으름장을 놓았다.

물론 그라고 해서 이렇게까지 막 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젊은 의사들이 열심히 근무 중이라는 것도 알았고.

이들이 자신을 위해 처치를 하려고 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하지만 어쩌랴.

아픈 데는 장사가 없는 것을.

“당신이 좀 참으면 안 돼요? 다른 사람들은 다 잘 받는 것 같은데.”

“뭐?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곁에 있던 아내의 말에 영철은 버럭 성질을 냈다.

“아프니까 아프다고 하지. 내가 꾀병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보여?”

“……미안해요. 난 그냥 선생님도 고생하는 것 같으니까 그랬죠.”

아내가 고개를 숙였다.

“두 분이 싸우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처치하면 아무 문제 없을 테니까요.”

준후가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말했다.

“난 분명 경고했어요.”

“네. 저도 다 귀담아듣고 있었습니다.”

“준후야, 너 괜한 짓 하는 것 같다? 가만히 있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너까지 실패하면 환자분이 진짜 실망하실 거야.”

“실패할 거면 나서지도 않았어요. 저만 믿어주세요.”

걱정하는 대진을 설득하고 준후가 영철에게 다가왔다.

“처치하기 전에 잠깐 목 좀 보겠습니다.”

콕. 콕. 콕.

준후가 검지로 영철의 목 주변을 찌르듯이 눌렀다.

처음에는 장난을 치는 건가 싶었는데 그 이후로 이상하게 목이 편해진 영철이었다.

“입 살짝 벌리시고요. 천천히 심호흡해 보세요.”

준후가 수술 장갑을 끼고 젤이 발린 투명한 튜브를 손에 쥐었다.

튜브만 봤는데도 영철은 벌써 겁이 났다.

“지…… 진짜 안 아픈 거 맞지?”

“아프다고 말씀하시면 바로 빼 드릴 거예요. 걱정 마세요.”

준후의 미소는 여전히 푸근했다.

그래서 영철도 조금이나마 마음을 놓았다.

영철은 준후가 시키는 대로 입을 벌린 채 심호흡을 했다.

수우우욱.

두꺼운 콧줄이 콧구멍으로 진입해서 목구멍으로 들어갔다.

거북하고 불편한 감촉.

순간 영철의 팔다리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아까도 토할 것 같았던 구간이 바로 이 구간이었다.

눈물을 쏙 뺐던 구간이 이 구간이었다.

하지만 웬걸?

영철은 아까와 달리 조금의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 토할 것 같은 기분도 들지 않았다.

뭐랄까.

목에 마취가 된 느낌이랄까.

감각이 둔해져서 콧줄의 삽입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잘하고 계세요. 튜브를 꿀꺽꿀꺽 삼켜보실래요? 그래야 튜브가 더 잘 들어갑니다.”

아프지 않았기에 영철은 준후의 지시를 순순히 따랐다.

꿀꺽. 꿀꺽.

그리고 튜브 삽관은 단 10초 만에 끝났다.

영철이 의사들에게 역정을 부리고 화를 냈던 것이 무색할 만큼 빠르고 간단하게.

“이상 없네요. 잘 들어갔습니다.”

준후가 청진기로 영철의 상복부를 청진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 만약에 기도로 들어갔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흉부 촬영 오더 내리면 되죠?”

“어? 어.”

대진이 얼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금 전에는 미안했습니다. 이렇게 빨리 끝나는 걸, 늙은 사람이 주책을 부리는 바람에 여러 사람을 고생시켜서.”

영철은 얼굴을 붉히며 의사들에게 사과했다.

좀 전까지 본인이 했던 말투와 행동을 떠올리면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근데 아까는 진짜 아팠는데…….”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당연한 일이에요.”

준후가 영철을 푸근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르신도 잘 아시겠지만 사람마다 잘 참는 종류의 아픔이 다 다르잖아요. 누구는 기다리는 걸 잘 못 참고. 누구는 화를 잘 못 참고.”

“…….”

“누구는 뜨거운 걸 못 참고. 누구는 차가운 걸 못 참고.”

“…….”

“어르신에게는 이 튜브를 코에 넣는 게 견디기 힘든 고통이셨겠죠.”

“…….”

“누구에게나 참을 수 없는 고통은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아세요?”

“글쎄요…….”

수수께끼 같은 준후의 질문에 영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준후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제일 중요한 건 말이죠. 아픈 건 죄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환자분은 아무 잘못 없어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