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92화 (92/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92화

제16장 여우(2)

정형외과 당직실.

준후와 유정, 대진이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모니터에는 엘 튜브를 꼽았던 환자의 흉부 엑스레이 영상이 떠올라 있었다.

“휴~ 다행이다. 아무 이상 없어. 혹시 기도로 들어갔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대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준후가 멋지게 엘 튜브를 삽입했다고 해도 완전히 마음을 놓지는 못했다.

튜브가 식도가 아닌 기도로 들어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까.

“준후 넌 깡도 좋다. 거기서 실패했으면 어쩔 뻔했어?”

“그러게요. 보는 저도 아찔하더라고요. 환자분 성격이 괄괄해 보이던데. 또 실패했으면 과장님이라도 부를 것 같았어요.”

대진과 유정이 한마디씩 했다.

아까 준후를 지켜보는 일이 조마조마했다고 밝혔다.

“뭔가 실패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있었거든요. 그 느낌을 믿었죠.”

“그러니까 순전히 감이라고?”

“정확히 말하면 절반이 감이고 나머지 절반은 믿음이었어요.”

“근데 참 이상해.”

유정이 준후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겉으로 봤을 때는 준후 네 처치나 내 처치나 별 차이가 없었단 말이지.”

“…….”

“근데 환자는 네 처치를 부담 없이 받았어. 난 그게 이해가 안 가.”

준후는 대답 대신 웃고 말았다.

준후가 엘 튜브를 단번에 꽂았던 이유.

그것은 정교한 점혈 덕분이었다.

경동맥 인근에 위치한 9번 뇌 신경은 구역 반사를 담당한다.

구역 반사란 이물질이 들어오면 반사적으로 구역질과 토할 것 같은 자극을 전달하는 기제인데…….

아까 준후는 점혈을 통해 환자의 9번 뇌 신경을 일시적으로 마비시켰다.

신경이 마비되니 구역질이 나지 않고.

구역질이 나지 않으니 엘 튜브 삽입이 고통스럽지 않았던 것이다.

의대 시절 공부한 전문 해부학.

무림에서 익힌 점혈법.

이 두 가지 조합은 전 세계에서 오로지 준후만이 가진 무기였다.

앞으로도 톡톡히 신세를 지게 되리라.

“준후야, 엘 튜브 잘 넣는 요령 좀 있으면 가르쳐주라.”

“요령이랄 게 있겠어? 어느 수준까지만 하면 복불복이지. 환자가 처치를 잘 참아주느냐. 아니냐.”

“근데 네가 할 때는 복 같고 내가 할 때는 불복 같아서 하는 소리야.”

“정 그렇다면야.”

준후는 초식으로 재창조한 엘 튜브 삽관 법을 전해주었다.

적절한 튜브를 선정하는 방법.

튜브의 삽입 깊이를 측정하는 방법.

환자가 엘 튜브에 저항감을 느끼지 않게 행동을 유도하는 방법.

엘 튜브가 제대로 삽입되었는지 확인하는 방법 등등.

준후의 설명은 무려 5분 동안 이어졌는데.

그 방법은 꼭 알고리즘 같았다.

A를 시행한 다음에 B로 이동하고 B가 안 되면 B+ 단계를 실행하고.

그다음 C로 넘어가고 등등.

“뭐야? 가르쳐 달라면서 왜 그렇게 질린 표정을 하고 있어?”

준후는 넋 나간 표정의 유정을 지켜보며 피식 웃었다.

“꼼꼼해도 너무 꼼꼼하잖아. 누가 보면 수술하는 줄 알겠다. 혹시 선배도 준후처럼 삽관하세요?”

“아니. 나야 그냥 적당히 요령껏 집어넣지.”

“저도 그러는데.”

두 사람은 준후의 삽관법을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실제로 준후처럼 세심한 과정을 거쳐 삽관하는 의사는 거의 없었으니까 말이다.

“가르쳐 달라고 해서 가르쳐 줬을 뿐이야. 날 원망하지 마.”

“근데 가르쳐 준 대로 따라 하면 너처럼 성공할 수 있는 거야?”

“제대로만 따라 한다면 대부분 성공하겠지.”

준후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본래 초식이란 누가 펼치든 간에 똑같은 위력을 발휘하게 되어 있었다.

다만 초식의 이해도와 숙련도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뿐.

“괜히 오기가 생기네. 준후야, 나 좀 도와주라.”

“이번엔 뭘?”

“너한테 엘 튜브 꼽아보면 안 될까?”

“좋을 대로.”

준후는 흔쾌히 수락했다.

이윽고 유정이 드레싱 카트에 엘 튜브 세트를 챙겨 당직실로 복귀했다.

비장한 표정으로 삽관 준비를 마친 뒤 포셉으로 젤이 묻은 엘 튜브를 쥐었다.

“들어간다. 불편해도 참아줘.”

스으으윽.

콧줄이 코를 통과해 준후의 목 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앞선 환자처럼 준후도 구역 반사를 느꼈다.

확실히 답답하긴 했다.

눈물이 핑 돌고 속이 메스꺼워졌다.

환자가 한사코 엘 튜브를 거부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준후도 늘 엘 튜브를 삽입하는 입장이었지.

삽입 당하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유정아, 튜브 꿀꺽꿀꺽 삼켜달라고 해야지.”

“아, 맞다. 튜브 삼켜줘.”

“근데 지금 튜브 역주행하는 것 같거든? 긴장해서 그런지 삽입 속도가 너무 빨라.”

준후는 코맹맹이 소리로 유정을 컨트롤하기 시작했다.

“그럼 천천히 할까?”

“너무 천천히 해도 안 돼. 구역 반사가 오래간단 말이지. 나야 잘 참고 있지만 환자들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어.”

“그럼 어떻게 해?”

“내 말 들으면서 차분하게 해봐.”

준후는 유정을 다그치지 않고 비위관 삽관 요령을 반복해서 알려주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유정은 비위관을 성공적으로 삽입했다.

“준후야. 고생 많았어. 괜히 나 때문에…….”

엘 튜브를 제거하면서 유정이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고생해도 괜찮아. 대신 빨리 익숙해져서 환자들을 편하게 해줘.”

“꼭 그래야지. 고맙고 미안해.”

“진짜 괜찮아. 신경 쓸 필요 없어.”

준후와 유정이 뒷정리를 하는데 때마침 대진이 대화에 껴들었다.

“공교롭게 방금 엘 튜브 오더 하나 냈거든? 누가 가볼래?”

“제가 갈게요. 혼자서 해볼게요.”

유정이 번쩍 손을 들었다.

대진이 허락하면서 유진이 쏜살같이 당직실을 벗어났다.

“준후 너도 어지간하다. 엘 튜브 꼽은 상태로 강의까지 다 하고.”

“이 정도는 참을 만해요.”

준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엘 튜브 삽관이 불편하다고는 하지만 무림에서 크고 작은 부상을 수도 없이 당한 준후였다.

고통을 참는 데는 이미 익숙했다.

“근데 듣다 보니 나도 너한테 처치를 배우고 싶을 지경이더라. 설명은 또 왜 이렇게 잘해?”

“선생 노릇을 잠깐 했거든요.”

“과외 선생?”

“과외 선생도 하고 다른 선생도 해 봤죠.”

준후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적일도와 양패구상을 벌이기 전.

준후는 1년 동안 무림맹의 무공 교관을 맡았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나는 언제쯤 완성된 외과의가 될까.

언제쯤 후학들에게 내가 가진 비법과 요령들을 전수하게 될까.

준후는 불현듯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았다.

아직은 까마득하게 먼 이야기여서 실감이 안 나긴 했지만.

“유정이 신나서 나가던데. 실패해서 또 실망하는 건 아닌지 몰라.”

“걱정 마세요. 그럴 일은 없을 거니까.”

“근거는?”

“제가 가르쳤으니까요.”

준후의 대답은 잠시 후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드르르륵.

당직실 문을 열고 들어온 유정의 입가에 함박웃음이 걸려 있었다.

“선배. 저 엘 튜브 삽입, 한 번에 성공했어요!”

* * *

그날 오후.

점심 식사를 위해 회의실로 향하던 준후가 가운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누구야? 혹시 여자친구?”

곁에서 걷던 유정이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아는 동생이야.”

“여자 동생?”

“조카뻘이거든? 이상하게 엮지 말아 줄래?”

“장난이야. 장난. 먼저 들어가 있을 게.”

유정이 회의실로 들어갔고 준후는 복도 끝에서 전화를 받았다.

“해나야. 오랜만이다?”

준후는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해나는 준후가 응급의학과 근무를 할 때 진료비를 대신 납부해 주었던 어르신의 손녀였다.

지금은 지애의 소속사 연예인으로 활동 중인데.

준후가 해나의 노래 솜씨를 알아보고 가수를 추천했던 것이다.

소속사에서 해나의 휴대폰을 챙겨줬기에 이렇게 가끔 연락을 주고받곤 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그럼 안녕하다말다. 해나는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니?”

-네.

일상적인 대화 후 해나는 놀라운 소식을 전해왔다.

해나가 종편 채널에서 진행하는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공교롭게 오늘 유아부 예선전이 있다고도 했다.

-선생님. 저 너무 떨려요. 할머니도 아파서 못 오고 여기 저 혼자 밖에 없어요.

해나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매니저 아저씨는 옆에 없어?”

-있는데 아직 안 친해요. 말도 잘 안 하고.

“잠깐 통화 끊을래? 선생님이 영상 통화로 다시 걸게.”

준후는 연결됐던 통화를 끊고 해나와 영상 통화를 시도했다.

통화가 연결되었다.

영상 속 해나는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우리 해나 긴장 많이 되겠다. 그렇지?”

-네. 도망치고 싶어요. 노래 잘 부르는 친구도 많고.

“해나도 충분히 노래 잘 불러. 그러니까 기죽을 필요 없어. 선생님이 보증, 아니, 인정한 사람이잖아. 해나는.”

-저 잘할 수 있겠죠?

“꼭 잘할 필요는 없어.”

-네? 왜요?

준후의 대답이 예상 밖이었는지 해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람은 원래 잘하려고 하면 더 긴장하는 법이야. 평소 할머니 앞에서 부르던 것처럼만 하면 돼.”

-…….

“만약 성적이 안 좋더라도 선생님 마음속에서는 해나가 언제나 최고의 꼬마 가수란다.”

준후는 긴장한 해나를 포근하게 달랬다.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이런 식의 위로와 위안을 준후는 싫어했다.

그런 말을 했다가 정작 안 좋은 결과가 나오면 어쩌란 말인가.

또한 일이 잘될 것이기에 괜찮다는 말은 은근히 결과 지상주의를 깔고 있는 위로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준후는 결과가 나쁘더라도 괜찮다는 식의 위로를 즐겨 사용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하니까 기분이 좀 나아졌어요.

“…….”

-선생님 말대로 결과가 안 좋더라도 전 할머니의 손녀고 선생님한테는 좋은 아이니까. 그걸로도 충분할 것 같아요.

부담을 떨쳐냈는지 해나가 밝게 웃었다.

그나저나 해나는 역시 철이 일찍 든 게 분명했다. 준후의 위로를 금방 받아들이는 걸 보면.

“그래. 선생님도 응원할게. 이 친구도 같이 응원할 거고.”

준후는 가운 속주머니에 넣어둔 보물 1호를 꺼내서 흔들었다.

과거 해나가 준후를 그려준 그림이었다. 코팅해 놓은 그림은 여전히 빳빳하고 선명했다.

-그거 아직도 가지고 있어요?

“당연하지. 선생님 보물 1호인데.”

-그거 나중에 더 멋있게 그려서 드릴게요.

“그건 보물 2호가 되겠구나.”

통화를 끊은 뒤에도 준후는 한참 동안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 * *

소화기 외과 컨퍼런스 룸.

준후는 유정과 간단하게 점심을 때우고 있었다.

준후의 식사 메뉴는 편의점 샌드위치와 우유.

유정의 식사 메뉴는 계란이 잔뜩 들어간 키토 김밥과 견과류였다.

구내식당이 있었지만 준후는 식당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콜을 받으면 먹던 음식을 내팽개치고 병동이나 중환자실, 응급실에 가야 했으니까 말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구내식당을 이용한 횟수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지경이었다.

“밥 먹을 때만 밥만 먹어. 그러다가 체할라.”

유정이 준후를 보며 혀를 찼다.

준후가 소화기 외과 포켓북을 보면서 식사했기 때문이다.

“자투리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지. 알게 모르게 버려지는 시간이 많아.”

“너도 지독하다, 진짜. 난 너처럼은 못 살 것 같아.”

“안 그래도 그런 이야기 자주 들어. 근데 나도 너처럼은 못 살 것 같다.”

“내가 어디가 어때서?”

유정이 샐쭉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 식단. 난 그렇게 느끼한 것만 먹고서는 못 살겠다고.”

“키토의 매력을 못 느끼는 네가 불쌍해.”

“불쌍할 것까지야.”

“근데 대화하면서도 책 내용이 눈에 들어와? 정신 산만할 것 같은데.”

“평소에 연습하면 가능하지.”

준후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준후가 익힌 무공 중에는 만화공(滿花功)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현대 말로는 멀티 태스킹이라고 하는가.

만화공을 사용하면 집중력을 골고루 분배해서 한 번에 다양한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대화하면서 독서하는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지금 어디 파트 보고 있어?”

“로봇으로 펼치는 위암 절제술.”

준후는 포켓북의 페이지를 넘기며 말을 이었다.

“조금 이따가 로봇 수술 스크럽 들어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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