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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93화 (93/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93화

제16장 여우(3)

준후는 나른한 분위기의 병동 복도를 걷고 있었다.

막 심전도실에 심전도 기기를 반납하고 오는 길이었다.

현재 시각은 오후 1시.

지나가며 병실들을 살펴보니 환자들은 침상에 누워 졸거나 자고 있었다.

보호자들도 처지는 비슷했다.

점심시간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들 졸고 있었다.

저벅. 저벅.

복도를 걷는 사람이 없어 준후의 발소리가 도드라졌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더라?’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준후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기다리고 고대하던 로봇 수술까지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스크럽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시간은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듯했다.

로봇 수술이란 말 그대로 로봇을 이용해 펼치는 수술이었다.

인공지능이 수술까지 다 해주는 수술은 아니고.

집도의가 로봇 팔을 조종해서 집도하는 수술을 일컬었다.

로봇 수술은 차세대 수술법으로 뽑히는 중이었다.

일반 절개 수술에서 복강경 수술.

그다음 바통을 이어받고 있는 것이 바로 로봇 수술이었다.

정형외과에서 수련 당시.

준후는 로봇 수술 스크럽을 선 적이 없었다.

정형외과는 로봇 수술의 빈도가 적었다. 인공 관절 수술 정도에서만 로봇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화기 외과는 다를 것이다.

로봇 수술 스크럽 경험을 더 많이 쌓을 수 있을 것이다.

소화기 외과의 수술은 거의 대부분 로봇 수술로 펼칠 수 있기에.

드르르륵.

준후는 당직실로 들어갔다.

대진과 미호가 바쁘게 차트를 입력하고 있었다.

“벌써 처치 끝났어?”

대진이 준후를 힐금 쳐다보며 물었다.

“네. 뭐 도와드릴 거 있나요?”

“지금은 없는데? 좀 쉬고 있어. 곧 스크럽도 들어가야 하잖아.”

“대진아, 준후 너무 봐주지 마. 스크럽이 무슨 대수인가?”

잠자코 있던 미호가 대화에 껴들었다.

미호의 목소리는 여전히 뾰족했다.

“스케줄 표 보니까 로봇 수술 스크럽이던데. 그럼 할 일도 없겠구먼. 쟤도 요령껏 졸다가 나올 거라고.”

“그래도 쉴 수 있을 때 최대한 쉬게 해주자.”

“하여간 너는 너무 물러 터져서 탈이라니까.”

미호가 쯧쯧쯧 혀를 찼다.

띠리리링~

때마침 울리는 당직실 전화기, 미호가 전화를 받았다.

응급실의 노티를 다 들은 뒤 전화를 끊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대진을 호출했다.

“대진아~ 응급실에서 환자 봐달라는데? 충수돌기염 의심된대. 나 대신 내려가 주면 안 될까?”

“그래. 내가 갈게. 안 그래도 좀 걷고 싶었는데.”

대진이 선뜻 일어나서 당직실을 떠났다.

최악의 조합이구나.

착한 아이 증후군에 걸린 대진.

구미호처럼 남의 간을 빼 먹고 사는 미호의 조합은.

제3자인 내가 다 답답할 정도야.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준후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미호가 일 처리하는 것을 잠시 지켜보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거리가 멀어서 모니터의 내용을 못 보겠지만 준후는 달랐다.

내공을 이용해 시력을 증폭하자 글씨가 선명하게 보였다.

대진에 비해 미호는 업무 속도가 현저히 느렸다.

타자는 빨리 쳤지만 지우고 다시 내리는 오더가 많았다. 의학 용어를 찾느라 책을 뒤지며 허비하는 시간도 많았다.

일은 적당히 할 줄 알지만 귀찮아서 다른 사람한테 떠넘기는 스타일.

일을 못 해서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한테 떠넘기는 스타일.

미호는 후자였다.

그러니까 대진에게 기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을 못 하면 잘할 생각을 해야지.

열심히 배울 생각을 해야지.

동기한테 일을 떠넘기면 되나.

미호의 업무 태도는 최하 중 최하였다.

“서준후. 지금 할 일 없다고 했지?”

“네.”

“가서 프리 라운딩이나 돌고 와. 시간 때울 생각 말고 후딱 갖다 와야 된다.”

“알겠습니다.”

준후는 준비를 하고 군말 없이 프리 라운딩을 시작했다.

프리 라운딩은 자유 회진으로 인턴이나 레지던트가 병실을 돌며 환자의 상태를 살피는 업무였다.

라운딩을 돌면서 준후는 환자의 증상과 차도를 세심하게 들었다.

특이사항은 수첩에 메모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찾은 병실에서 마주친 환자 한 명에게 무언가 꺼림칙한 이야기를 들었다.

“오늘 오전부터 현기증이 좀 있더라고요. 배도 좀 쑤시고 구역질도 나고.”

“오전부터 그러셨다고요? 간호사나 저희한테 노티, 그러니까 알려주기는 하셨나요?”

“아니요. 그때는 심하지 않아서 이야기 안 했죠.”

환자가 한 손으로 배를 쓸어내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가만 보자. 박승현님이…….”

준후는 미리 프린트해 놓은 환자의 차트를 살폈다.

환자는 위암 2기로 이틀 전.

위 아전 절제술을 받은 후 회복 중이었다.

그동안 경과가 나빠졌다는 기록은 없었다.

현재 비위관(콧줄)을 삽입한 상태였고.

그럼 대체 뭐가 문제일까.

환자는 단순히 수술 후 회복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부침에 시달리는 걸까.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는 걸까.

이 두 가지를 구분하는 게 준후의 숙제였다.

준후는 일단 비위관부터 살폈다.

비위관에 혈액이나 다른 내용물이 역류한 흔적은 없었다.

“혹시 기침에 피가 섞여 나온 적이 있나요?”

“아니요. 전혀.”

“대변이 짜장 색깔처럼 까맣지는 않았고요?”

“그게. 까맸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네요. 실수로 변을 확인 안 하고 물을 내리는 바람에…….”

“가장 최근에 변을 본 게 언제시죠?”

“오늘 점심시간이요.”

준후는 이후로도 다양한 질문을 던졌지만 영양가 있는 대답은 건지지 못했다.

복통. 오심. 현기증.

이는 소화기 외과 수술을 받은 환자들이 가장 흔하게 호소하는 증상들이었기에.

아마 다른 인턴이나 레지던트면 이쯤에서 별거 없구나 하고 진료를 마쳤을 것이다.

하지만 준후는 그럴 수 없었다.

사람의 목숨에 관한 일이라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예민하고 까다롭게 굴어야 한다고 준후는 생각했다.

의사와 명의를 가르는 지점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준후의 목표는 단순히 의사가 아니라 명의였다.

무림에서처럼 주변 사람들의 고통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건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환자분. 잠깐 환자복 단추 좀 풀어주시겠어요? 촉진을 해보고 싶습니다.”

“그러세요.”

환자가 환자복 앞섬을 풀었을 때.

준후는 환자의 복부에 오른손바닥을 얹었다.

* * *

타다다닥.

차트를 입력하며 미호는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방금 막 3년 차 선배가 당직실에 와서 미호를 칭찬하고 갔다.

일 처리가 빠르고 정확하다면서 말이다.

그것은 기분 좋은 오해였다.

사실 미호의 일 처리가 빠른 건 미호 업무를 대진이 대신해 주었기 때문이니까.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2년 차가 됐을 때는 1년 차를 부려먹고.

3년 차가 됐을 때는 1·2년 차를 부려먹으면 그녀의 모자란 솜씨가 들통 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라운딩을 마친 준후가 당직실에 복귀했다.

“서준후 너무 늦었잖아. 내가 빨리 오라고 했어? 안 했어?”

“잠깐 확인할 게 있어서요. 선배, 안 그래도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뭔데?”

“513호실에 있는 박승현 환자. 아무래도 위장관 출혈이 있는 것 같습니다.”

“위장관 출혈?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미호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위장관 출혈은 말 그대로 위장에 출혈이 발생하는 질환인데 보통 내시경 검사를 펼쳐야 확진이 가능했다.

“몇 가지 의심 가는 정황이 있습니다.”

이어지는 준후의 노티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위장관 출혈을 진단하기에는 근거가 너무 빈약했던 것이다.

오호라. 너 잘 걸렸어.

이번 기회에 선배의 위신을 제대로 보여줄게.

“일단 복통, 오심, 현기증은 패스하고. 비위관 확인해 봤어?”

“네.”

“그럼 비위관 흡인액 중에 출혈을 의심할 만한 게 있었어?”

“아니요. 없었습니다.”

“서준후, 지금 나랑 장난해? 위장관 출혈이 있으면 비위관에 혈액이 흡인됐어야 할 거 아니야.”

미호는 옳다구나 하고 준후를 따끔하게 혼냈다.

하지만 준후는 물러서지 않았다.

가운에서 포켓북을 꺼낸 뒤 한 페이지를 펼쳐 미호에게 내밀었다.

“여기 보시면 비위관을 통한 위장관 출혈의 진단 민감도는 40퍼센트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특히 십이지장 근위부에 출혈이 발생했다면 더더욱 진단이 어렵고요.”

“이리 줘 봐.”

미호는 준후의 손에 들린 포켓북을 빼앗듯이 손에 쥐었다.

페이지에는 준후가 언급한 내용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미호가 한 방 먹은 것이다.

미호에겐 교수들이 집필한 교제 내용을 뒤집을 만한 능력이 없었다.

이게 뭐야, 나도 모르는 내용을 알고 있잖아?

미호는 순간 기분이 확 상했다.

“선배님의 말과 달리 비위관만으로는 위장관 출혈을 진단할 수 없습니다. 제 말이 틀렸나요?”

되묻는 준후의 눈빛에 섬뜩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좋아. 네 말이 맞다고 쳐. 하지만 네 말이 환자에게 위장관 출혈이 있다는 증명은 못 돼. 그것도 알고 있지?”

“…….”

“환자가 위장관 출혈이라고 했으면 네가 정확한 근거를 대야지.”

미호는 다시 준후를 공격했다.

이대로 체면을 구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환자가 혈변을 본 것 같습니다.”

“혈변?”

“위장관 출혈이 있으면 혈액이 위장과 대장을 거쳐 까맣게 변색되어 배출되니까요.”

“잠깐 환자가 혈변을 봤으면 본 거지, 본 것 같습니다는 또 뭐야?”

미호의 목소리에 가시가 돋쳤다.

“환자가 확실히 기억을 못 합니다.”

“그러니까 위장관 출혈의 근거가 환자는 기억도 못 하는 혈변이라고? 우리 준후 농담이 심하네?”

“하지만 환자가 혈변을 봤다고 의심할 만한 충분한 근거는 가지고 있습니다.”

차분하게 설명하는 준후.

방금 준후는 남자 화장실을 찾아 변기를 샅샅이 뒤졌다고 한다.

그 결과 흑색 변이 묻은 변기를 찾아냈고 검체를 이용해 변기에 묻은 변까지 채취했단다.

그 노력은 가상하다만 미호는 준후의 주장에 취약한 부분을 한눈에 꿰뚫어 보았다.

“참 나, 서준후.”

“네.”

“그 대변이 박승현 환자의 변이라고 확신할 수 있어? 너는 똥만 보고 사람도 맞추니?”

“꼭 불가능한 건 아니죠.”

“어떻게?”

“환자는 오늘 점심시간에 대변을 봤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병실을 돌면서 일일이 남자 환자와 남자 보호자들에게 물었죠.”

“…….”

“혹시 점심시간에 대변을 본 분이 있냐고요. 결과는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변기에 묻은 변은 박승현 환자의 변이겠죠.”

준후의 소름 돋는 치밀함에 미호는 벙찌고 말았다.

과학수사대도 아니고 변을 확인하는 게 이리 꼼꼼할 일인가.

“난 인정 못 하겠는데? 네가 놓친 환자나 보호자가 있을 수도 있고. 시간 차이도 있을 수 있어.”

“글쎄요. CCTV까지 거짓말을 할까요?”

“CCTV까지 확인했다고?”

“네. 병동 복도에 있는 CCTV 중 화장실 입구를 비추는 CCTV가 있습니다. 그걸 확인하느라 복귀가 늦었고요.”

준후의 야무진 대답에 미호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 정도까지 분석했다면 변기에서 채취한 변은 박승현 환자의 것임이 분명한 듯했다.

그 변이 혈변일 테니 환자에게는 위장관 출혈이 있을 확률이 높았고.

어쩐지 되로 주려다가 말로 받은 이 찜찜한 기분은 뭘까.

“좋아. 네가 그렇게까지 고생했다니까 위 내시경 검사 한 번 해보자.”

“…….”

“단 환자한테 아무 이상 없으면 각오해.”

“그러세요. 얼마든지 각오하겠습니다.”

미호의 살벌한 지적에도 준후는 얄밉게 웃을 따름이었다.

마치 검사 결과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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