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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94화 (94/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94화

제16장 여우(4)

준후는 미호, 상혁과 본관 2층 위 내시경실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상혁은 3년 차 레지던트로.

준후의 노티를 받은 미호의 노티를 받은 후 위 내시경 오더를 내렸다.

환자에게 위 내시경을 펼칠 사람도 상혁이었다.

일과 시간의 병원은 언제나 그랬듯 사람들로 붐볐다.

환자와 보호자, 병원 스태프, 보험 회사 직원 등등.

병원 건물의 복잡함과 인구밀도는 대형 쇼핑몰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세상에는 이렇게 아픈 사람이 많구나.

아픈 사람만큼이나 아픔의 종류도 다양하겠지?

아픔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한 사연이 있겠지?

수 없이 마주치는 사람들을 훑어보며 준후는 문득 그런 생각을 생각했다.

병원만큼이나 생노병사를 적나라하고 또 압축해서 보여주는 곳은 없었다.

“분위기가 왜 이렇게 냉랭해? 혹시 너희 둘이 싸웠니?”

상혁이 뒤따라서 걷는 준후와 미호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내시경실로 향하는 동안.

준후와 미호가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던 것이다.

“인턴이랑 싸울 게 뭐가 있겠어요. 그냥 할 말이 없어서죠. 그나저나 선배 머리 잘 잘랐네요?”

미호의 목소리 톤이 갑자기 밝아졌다.

준후와 말다툼을 할 때와는 달리 꾀꼬리 같았다.

“어제 저녁에 잠깐 여유가 생겨서 지하 1층 미용실에서 잘랐지. 댄디컷이라는데. 잘 어울려?”

“완전이요. 아까는 말을 못 해서 그렇지 아이돌인 줄 알았다니까요?”

“너 지금 나 엿 먹이냐? 아주 달달하네~”

말투와는 다르게 상혁은 유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준후를 쏙 빼놓고 대화를 나눴다.

그것이 미호가 의도한 바라는 걸 준후가 모를 리 없었다.

미호의 별명은 구미호였다.

선배들에게는 한없이 친근하게 굴며, 동기인 대진은 은근히 부려먹고, 인턴과 간호사들은 만만해서 하대했다.

지금 준후를 빼놓고 대화를 하는 이유.

그것은 준후가 소외감을 느끼게 만들기 위함일 확률이 높았다.

본인이 선배들과 친하다는 사실을 과시하기 위함일 확률이 높았다.

미호는 지금까지 만났던 빌런들하고는 성격이 조금 달라.

은근하게 주변 사람을 조종하고.

은근하게 정치질을 하는 타입이란 말이지.

아무래도 대처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겠어.

준후는 속으로 생각들을 정리했다.

무림에서 사파인들과 검을 겨루다 보면 유연한 대처가 필요하기 마련인데.

그 유연함의 묘미를 병원 근무에서도 잘 살릴 필요가 있었다.

“미호한테 이야기 들었는데 준후 너도 만만치 않더라?”

상혁이 모처럼 준후에게 말을 걸었다.

관심을 빼앗기자 미호가 잠깐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이는 준후와 미호만 아는 사실이었다.

“환자가 혈변인 거 확인하려고 병실 돌아다니고 CCTV까지 봤다며?”

“네.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면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라서요.”

“너도 어지간하다. 진짜.”

상혁이 질렸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말이다. 혈변이 있다고 해서 꼭 위장관 출혈이 발생했다는 보장은 없는 거 아니?”

“제 말이 그 말이라니까요? 근데 준후 제가 막무가내로 굴어서 말리지를 못하겠더라고요.”

미호가 기다렸다는 듯 본인의 의견을 보탰다.

“서준후, 혈변이 발생하는 원인을 설명해 볼래?”

“위장관 출혈을 제외한다면 치핵, 치루. 대장게실. 염증성 장 질환 등이 있습니다.”

준후의 대답은 언제나처럼 똑 부러졌다.

의대 시절 공부한 지식에 더해서.

포켓북으로 쌓고 있는 지식들이 입에서 술술 나왔다.

“잘 아네. 방금 말한 요소들이 혈변의 원인이라면 위 내시경을 해도 아무 이상이 없을 수 있어.”

“설령 내시경에서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습니다.”

“무슨 뜻이지?”

준후의 대답에 상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호 역시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준후를 주목했다.

“의심 가는 질환 중 하나를 배제할 수 있었으니까요. 원래 진단이란 수많은 가능성을 열어놓고 하나하나 배제해가는 과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

“위장관 출혈이 원인이 아니라면 마음 편히 대장 관련 검사를 해보면 되겠죠.”

준후의 눈빛도, 목소리도 흔들림이 없었다.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소화기 외과 레지던트들이었지만 준후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그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해내고.

그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있는 준후였기에.

“이야, 누가 보면 네가 인턴이 아니라 치프인 줄 알겠다?”

준후의 대답에 상혁이 피식 웃었다.

잡담을 나누는 사이 도착한 위 내시경실.

내시경실은 대기 중인 외래 및 입원 환자와 보호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검진 센터 전용 내시경실이 따로 존재함에도 그랬다.

최근 내시경은 수면 마취를 통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래서 환자가 마취에서 깨는 시간을 기다리다 보니 검사대기 시간이 길어지곤 했다.

하지만 세 사람은 대기 줄을 가로질러 곧장 내시경실로 진입했다.

응급 검사 오더를 내렸기 때문이다.

한편 먼저 내시경실에 도착해 있던 환자는 1-3 병상에 누워 있었다.

“너 때문에 선배가 수술 끝나고 쉬지도 못한 채 내시경 검사하러 왔어.”

“…….”

“환자한테 이상 없으면 넌, 나하고 선배한테 개 박살 나는 거야. 각오는 됐어?”

미호가 준후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엄포를 놓았지만 준후는 대꾸할 가치를 못 느꼈다.

응. 아니야.

환자는 위장관 출혈 맞고.

3년 차한테 박살 날 일도 없어.

* * *

삐이이. 삐이이.

환자 감시 장치에서 규칙적인 기계음이 들려왔다.

프로포폴 가스를 흡입한 환자는 축 늘어진 채 새우처럼 웅크린 자세를 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환자는 어제저녁부터 오늘 점심까지 금식을 했기에 곧바로 내시경이 가능했다.

점심시간에 혈변을 봤을 뿐.

점심시간에 식사를 했던 건 아니었던 것이다.

“스코프(Scope, 내시경).”

상혁은 미호가 건네 내시경을 들고 환자의 목구멍으로 집어넣었다.

내시경에 달린 광원 렌즈가 어두운 목구멍을 환하게 비추었다.

환자 목 주변의 구조가 마주 보고 있는 모니터에 고스란히 떠올랐다.

상혁은 모니터를 주시하면서 내시경을 천천히 식도로 밀어 넣었다.

내시경 삽입부가 주변 조직을 긁지 않도록.

내시경이 엄한 기도에 들어가지 않도록.

-별일은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해본다.

상혁은 그런 생각으로 내시경을 진행 중이었다.

미호와 마찬가지로 상혁 역시 준후가 유난을 떤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입원 환자에게 위장관 출혈이 발생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준후야, 로프 좀 잡아줘. 로프가 꼬이면 안 돼. 직선으로 팽팽해야 잘 들어간다.”

“이미 잡고 있습니다.”

준후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미호와 준후의 도움을 받아 상혁은 내시경을 환자의 위 내부로 진입시켰다.

카메라를 돌려가며 위의 소만과 대만의 위벽을 살폈지만 출혈 소견은 없었다.

환자의 위벽은 건강한 선홍빛이었다.

“선배, 아무 이상 없어 보이는데요?”

“내 눈에도 그렇게 보인다.”

“하여간 준후 때문에 괜히 선배만 고생하셨네요.”

미호가 일을 키운 준후를 은근하게 탓했다.

환자를 꼼꼼하게 보는 것이 의사로서의 본분이지만.

쉬지도 못하고 내려와서 아무 소득도 건지지 못하니 상혁도 기운이 빠졌다.

“선배. 유문(위의 말단부로 십이지장과 연결됨) 부위는 아직 확인 안 하셨죠?”

“그런데 왜?”

“출혈이 있다면 그쪽에 있을 것 같습니다.”

“얼씨구. 초능력자라도 되세요? 그걸 알았으면 회복 마법 같은 거라도 써보지 그랬어?”

준후의 말을 미호가 신랄하게 받아쳤다.

상혁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그런데 웬걸?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내시경을 유문 쪽으로 비추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유문 위 벽에 붉은 혈액들이 있었는데.

혈액들이 강줄기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이건 명백한 위장관 출혈의 흔적이었다.

환자가 본 혈변에.

현재 모니터에 드러난 출혈량을 어림잡아 계산해 보면 그 양은 최소한 500CC 이상으로 보였다.

“…….”

“…….”

준후의 말이 현실로 드러나면서 주변 공기가 서늘해졌다.

만약 준후가 위장관 출혈을 의심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내시경 검사를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환자는 저혈압에 빈맥으로 졸도했을지 몰랐다.

그 결과 환자 관리를 하지 못한 레지던트들에게 큰 책임이 돌아갔을 테고 말이다.

“……정말 위장관 출혈이 있었네요. 선배, 이젠 어떻게 해야 하죠?”

미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상혁을 응시했다.

“당연히 지혈해야지. 준후야, 혹시 이럴 때 어떻게 지혈해야 하는지 알아?”

상혁은 도리어 준후에게 물었다.

미호와 달리 준후의 표정이 워낙 태연했는데 그 모습은 마치 이후의 처치까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혈 방법은 많습니다. 전기나 레이저로 소작을 하거나, 자동 봉합기로 출혈 부위를 봉합하거나, 고무 밴드를 이용하거나 등등.”

“그래서 그중에 지금 필요한 지혈법은?”

“출혈 부위와 출혈 양상을 봤을 때 분무 형태의 지혈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에피네프린을 분무하면 괜찮지 않을까요?”

상혁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상혁이 생각한 최고의 지혈법이 바로 방금 준후가 언급한 지혈법이었다.

얘, 진짜 인턴 맞아?

진단은 물론이고 처치까지 이렇게 완벽할 수가 있나?

상혁이 지금까지 만난 인턴들과 준후는 클래스가 달랐다.

“소화기 외과 공부를 따로 했나 봐? 이 정도로 박식할 줄은 몰랐는데.”

“안 그래도 틈틈이 공부 중입니다. 나중에 소화기 외과 전공을 할 수도 있으니까요.”

준후가 가운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소화기 외과 포켓북이었다.

레지던트가 내린 오더를 처리하기도 바쁠 텐데 짬짬이 개인 공부까지 한다라…….

의학 지식이 바로바로 튀어나오는 걸 보면 공부도 대충하는 게 아닌 듯한데…….

상혁은 그저 감탄만 나올 따름이었다.

“미호야. 준후랑 처치실 가서 물품 좀 챙겨와. 스프레이하고 에피네프린 분무액하고.”

“네. 선배.”

자리를 떠나는 준후와 미호의 뒷모습을 상혁은 멍하니 지켜보았다.

* * *

“말도 안 돼. 진짜 위장관 출혈이었잖아?”

준후보다 한걸음 빨리 걷던 미호가 구시렁거렸다.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모양이었다.

분명 미호는 내시경 결과가 정상으로 나오고.

그걸 빌미 삼아 준후에게 기강을 잡으려는 단꿈에 젖어 있었으리라.

물론 준후 입장에서는 어림도 없는 착각이었지만.

“소가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는다고. 서준후. 너 진짜 운 좋은 줄 알아.”

미호가 새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운은 맞는데 뒤에 한 글자가 빠졌네요.”

“한 글자가 빠졌다고? 무슨 글자?”

“명이요.”

“운…… 명?”

“네. 이 상황은 전부 운명이었죠. 선배에겐 느끼하게 들리겠지만요.”

준후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지금으로부터 30분 전.

준후는 환자의 복부에 손바닥을 얻은 후.

내공 위 조영술을 펼쳤다.

환자의 유문 부위에서 내공들이 거미줄처럼 흩어지는 감각을 확인했다.

이는 출혈이 발생했다는 뜻이었다.

내공 덕분에 준후는 살아 숨 쉬고 걸어 다니는 검사 기기였다.

웬만한 검사는 스스로 펼친 후 검사 결과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남들이 모르는 결과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

결과를 알고 과정을 밟아 나갔다는 점에서.

환자의 위장관 출혈 진단은 운명이라고 볼 수 있었다.

사실 혈변에 굳이 집착했던 이유도 내시경 검사를 위한 명분이 필요해서였고 말이다.

내공 위 조영술의 결과는 어디까지나 준후만 알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어휴. 재수 없어. 너 언제까지 잘난 척하는지 두고 보자.”

미호의 시기에 준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맞받아치는 여유를 보였다. 악당 앞에선 겸손할 필요가 없었다.

“저는 말입니다. 잘난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 잘난 건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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