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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95화 (95/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95화

제16장 여우(5)

컨퍼런스 룸에서 미호는 캔 커피를 들이켜고 있었다.

방금 막 ICU(집중치료실) 라운딩을 하고 돌아온 참이었다.

먼 곳까지 다녀왔더니 당이 떨어졌다.

우드드득.

빈 캔이 미호의 손에서 우그러지기 시작했다.

미호는 준후 생각만 하면 약이 올랐다.

뭐, 잘난 척을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잘난 거라고?

그게 레지던트 선배 앞에서 할 소리야?

미호는 준후의 건방진 말버릇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건방진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엄밀히 따지면 말이다.

준후 덕에 위장관 출혈을 발견하고 처치까지 했으니.

준후에게 고마움을 표시해야 했지만 미호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미호의 마음은 그저 준후를 향한 분노와 질투, 열등감에 사로잡혔을 뿐이었다.

미호는 세상에서 가장 싫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그런데 그런 짓을 준후가 도맡아서 하고 있었다.

예뻐 하래야 예뻐 할 수가 없었다.

드르르륵.

때마침 컨퍼런스 룸 문이 열리고 상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창 바쁠 때 아닌가? 여기서 쉴 여유도 있네?”

상혁이 농담조로 말하며 미호 곁에 앉았다.

“막 일 다 끝내고 한숨 돌리는 중이에요. 너무 야박하게 몰아붙이지 마세요.”

미호가 눈웃음치며 대답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밀려 있던 일의 대부분을 끝마쳤다.

직접 한 게 아니라 대진에게 부탁해서 처리하긴 했지만 말이다.

“우리 미호가 확실히 일 처리가 빠르긴 해. 대진이 녀석도 좀 본받아야 할 텐데.”

“대진이도 늘 열심이잖아요.”

“열심이지만 요령이 없기도 하지.”

“언제 책을 읽었는데 나중에 성공하는 사람은 요령을 모르는 사람이래요.”

미호가 대진을 치켜세웠다.

실제로 거절할 줄 모르는 대진의 성격은 미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미호 업무까지 맡아서 하다 보니 대진은 항상 일 처리가 늦었다.

그 때문에 선배들은 대진이 일을 못 하고 미호는 일을 잘한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미호에게 유익한 착각이었다.

“동기라고 감싸는 거냐?”

“팔은 안쪽으로 굽어야죠. 그나저나 선배. 준후 좀 유심히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왜? 인턴답지 않게 야무지던데? 위장관 출혈을 의심한 것도 준후였잖아.”

상혁은 벌써 준후에게 홀딱 빠진 눈치였다.

하지만 미호는 지금부터 그 콩깍지를 벗겨낼 계획이었다.

얄미운 준후가 선배들에게 인정을 받는다?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 꼴은 두고 볼 수 없었다.

“다른 과 동기들한테 이야기를 들어봤는데 소문이 좀 안 좋더라고요.”

“그래?”

“선배 알기를 우습게 알고 뒷담화까지 한데요. 전형적으로 호박씨 까는 스타일 있잖아요.”

“호박씨는 우리가 까고 있는 거 아닌가?”

“선배.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기껏 좋은 정보 알려드리고 있는데…….”

미호는 서운하다는 표정을 짓고 서운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저도 몇 번 당했어요.”

“응? 너까지?”

“네. 대답도 항상 짧고 제 눈을 똑바로 쳐다보더라고요. 시키는 일도 미적미적거려요.”

“흐음…… 준후 녀석, 그렇게 안 봤는데.”

“그럴 수밖에 없죠. 선배는 수술 어시스트 하느라 바쁘니까.”

미호는 없는 사실을 지어냈다.

모략과 이간질은 미호의 특기 중 하나였다.

성공률은 80퍼센트 이상인데.

미호가 본인의 거짓말을 스스로 철석같이 믿으며 실감 나게 연기를 펼쳤기 때문이다.

“그럼 위장관 출혈 건은 어떻게 된 거야?”

“저를 이겨 먹으려다가 운 좋게 하나 얻어걸린 거죠. 세상에 혈변 확인하겠다고 CCTV까지 뒤지는 독종이 어디 있어요?”

미호는 준후가 잘한 점까지 태연하게 왜곡했다.

“관점에 따라서는 그렇게 볼 여지도 있겠네. 일단 기억은 해둘게.”

상혁은 가만히 턱을 쓸어내렸다.

미호의 모략으로 준후의 인성을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상혁은 후배들의 인성을 가장 중요시하는 선배 중 하나였다.

인성 문제로 상혁에게 찍힌다면 준후의 인턴 생활은 고달프기 짝이 없으리라.

서준후.

넌 죽었다가 깨어나도 모를 거다.

병원 생활은 업무 능력이 아니라 정치 능력으로 결판난다는 걸.

미호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피어났다.

* * *

참 나, 이게 사람이야?

괴물이야?

대진은 준후가 오더 입력하는 것을 지켜보며 혀를 찼다.

타다다다닥.

타다다다닥.

키보드 위를 날아다니는 준후의 손은 의사의 손이 아니라 피아니스트의 손 같았다.

현란하고 빨랐다.

심지어 타이핑이 요란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내용까지 정확했다.

잘못 쓴 내용을 지우기 위해 백스페이스를 누르는 경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준후의 손끝에서.

산더미처럼 쌓였던 오더와 차트들이 박살 나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0분 전.

당직실에 들어온 준후는 대진이 피곤해 보인다며 업무의 일부를 분담해 주겠다고 했다.

대진이 완강하게 거절했음에도 도와주겠다고 했다.

준후가 인턴 잡은 잘할지언정 차팅에는 익숙하지 않을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웬걸?

막상 일을 맡겨보니 준후는 대진보다 일을 더 잘했다.

더 빠르게 처리했다.

준후는 한 마디로 탈(脫) 인턴이자 초(超) 인턴이었다.

“선배, 저 끝났는데요?”

“어? 어. 수고했다. 근데 준후 넌 손가락에 날개라도 달렸니? 차팅이 왜 그렇게 빨라?”

대진이 감탄하며 물었다.

“손쓰는 일은 자신이 있거든요. 무슨 일이 됐던지.”

“어쨌거나 고맙다. 이제 한숨 덜었어.”

“선배 주제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제가 한 마디만 드려도 될까요?”

준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해 봐.”

“미호 선배 일, 그만 대신해 주세요. 선배 업무가 계속 밀리잖아요.”

“동기인데 뭐 어때. 다 서로 돕고 도움받는 거지.”

“선배가 일방적으로 돕기만 하는 것 같아서 하는 소리입니다.”

대진도 준후의 의도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말이다.

대진은 미호의 부탁을 도무지 거절하기 힘들었다.

자신이 거절하면 미호가 힘들어질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미호는 자연스럽게 대진을 원망하게 될 것이고.

원망은 불편한 관계로 이어질 것이다.

대진은 그게 싫었다.

“내가 조금만 더 고생하면 끝나는 문제야. 신경 쓸 필요 없어.”

“선배는 지금 미호 선배한테 이요…… 아니에요. 방금 하려던 말은 잊어주세요.”

준후가 황급히 말을 거두었다.

하지만 준후가 미처 하지 못한 말을 대진은 알 것도 같았다.

“점심 아직 못 먹었지?”

어색한 분위기를 떨쳐내기 위해 대진이 화제를 돌렸다.

“오늘은 모처럼 구내식당이라도 다녀와. 그 정도 여유는 있을 것 같으니까.”

“네. 선배.”

준후가 떠난 후 대진은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기댔다.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미호의 부탁을 거절하라고?

준후 너는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너무 어려운 일이란 말이지.

대진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의 기대, 학교 선생님의 기대, 주변 지인들의 기대 등등.

다양하고 수많은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다.

주변 사람의 기대를 충족시켜주면 인정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

즉, 타인에게 받는 인정이 대진이 살아가는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그 원동력을 지금에 와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으으으윽!”

잡념에 빠져 있던 대진의 얼굴이 갑자기 와락 구겨졌다.

숨은 가빠졌고 칼에 베인 것처럼 왼쪽 가슴이 시큰거리고 아려왔다.

소름 돋는 두려움이 엄습했지만.

대진은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제야 증상이 차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대략 2주 전부터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이 때때로 대진을 덮쳐왔던 것은.

아마 최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탓이리라.

나만 이런 것도 아니고 다들 마찬가지겠지.

별일 아닐 거야.

대진은 애써 스스로를 달랬다.

* * *

본관 1층, 직원 전용 구내식당.

준후는 모처럼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식사 시간의 끝자락이라서 그럴까.

식당에 사람은 적었고 테이블은 대부분 비어 있었다.

준후는 창가 쪽 자리를 차지하고 식판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밥은 병원 밥이다.

……라는 말이 진리로 통용되고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병동 입원 환자 식사에 한정된 말이었다.

구내식당은 밥맛이 꽤 좋았다.

창가에 휴대폰 거치대를 세워놓고.

거치대에 휴대폰을 올려놓고.

준후는 휴대폰으로 뉴튜브 업로드 용 동영상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른손으로는 소화기 외과 포켓북을 든 채 공부를 했고 왼손으로는 식사를 했다.

세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준후는 자투리 시간을 극도로 활용하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후 준후는 뒷정리를 하고 병동으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확인한 뉴튜브 채널은 갑자기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다.

구독자는 어느새 1,000명.

평균 동영상 조회수는 3,000회.

아무래도 우연치 않게 뉴튜브 알고리즘의 간택을 받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동영상 댓글을 통해서.

준후는 간택 받은 알고리즘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바로 공부 영상이었다.

-열공 TV에서 넘어왔어요. 훈남이신데 얼굴만 봐도 힐링되네요.

-잔잔해서 보기 좋아요.

-영상 틀어놓고 공부하면 같이 공부하는 것 같아서 동기부여가 돼요. 거기다 가끔 쌤 얼굴 한 번씩 보면…… 헤헤^^ 도서관에서 잘 생긴 사람 보는 느낌이 들어서 좋아요.

동영상에 이런 댓글들이 많았던 것이다.

공부 영상이란 말 그대로였다.

뉴튜버가 아무 말도 없이 공부하는 영상을 일컫는 영상이었다.

그러나 준후가 본 공부 영상은 도무지 재미라고는 1도 찾을 수 없었다.

남이 공부하는 걸 왜 본단 말인가?

뭐가 재미있어서?

뭐가 유익해서?

그런데도 공부 영상은 수요가 꽤 있는 것 같았다.

어쨌거나 준후 영상은 공부 영상과 겹치는 구석이 많았다.

말은 거의 없다시피 했고.

야간에 공부하는 영상을 주로 올리곤 했으니까.

실제로 조회수가 잘 나온 영상들도 다 공부 영상이었다.

외모에 힐링 된다.

같이 공부하는 느낌이 좋다.

댓글들의 공통점을 파악하고 준후는 뉴튜브 채널의 방향성을 확고하게 정했다.

잘 생긴(?) 의사가 공부하는 영상을 업로드하는 채널로 말이다.

지금까지 딱히 써먹은 적은 없다만 훈훈한 외모도 준후의 강력한 무기 중 하나였다.

또한 공부 영상이라면 준후가 편집할 필요도 없고.

촬영 컨셉을 고민하느라 애먹을 일도 없으니 일석이조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저기요! 말씀을 똑바로 해주셔야죠. 괜히 그쪽 때문에 먼 길을 돌아갔잖아요.”

로비를 통과하는데 안내 데스크 쪽이 소란스러웠다.

“본관 3층에 있는 심혈관 센터를 별관 3층에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해요?”

“죄송합니다. 보호자분.”

“죄송하면 다예요? 아버지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실례합니다.”

준후는 시비를 지나치지 못하고 안내 데스크로 이동해 대화에 껴들었다.

신입으로 보이는 안내 데스크 직원이 곤란해 보여서 그랬고.

보호자의 화도 가라앉히고 싶어서 그랬다.

“그쪽은 누구인데 껴들…….”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은 앙칼지게 쏘아붙이려다가 말문이 막혔다.

드라마 속에서나 볼 법한 멋진 의사가 눈앞에 뿅 하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인턴으로 근무하고 있는 서준후라고 합니다.”

“아. 네. 선생님.”

“멀리서 듣자 하니 안내가 잘못돼서 환자분과 보호자분이 많이 고생하신 모양이더군요.”

“이 직원이 엉뚱한 곳을 알려줬어요.”

“별관이면…… 오가는데 15분은 걸리셨을 텐데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

“하지만 보호자분께서 한 번만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면 안 될까요? 이 직원분은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습니다. 아무래도 처음 일을 하면 실수가 생기기 마련이잖아요.”

준후는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직원분은 보호자님 덕분에 앞으로 심혈관 센터 안내를 잘못하는 일이 없을 겁니다. 직원분께 좋은 교훈을 줬다고 생각해 주실 수는 없을까요?”

“뭐. 선생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다면야…….”

보호자가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준후의 온화한 미소와 감미로운 목소리는 보호자의 화를 누그러뜨리기에 충분했다.

“생각해 보니 저도 조금 심했던 것 같네요. 사과드릴게요.”

“아닙니다. 보호자분. 실수는 제가 했는 걸요.”

보호자와 직원이 사이좋게 한마디씩 주고받았다.

결과적으로 준후의 개입을 통해 사건은 평화롭게 마무리되었다.

보호자는 안내 데스크를 떠났고 안내 직원은 준후에게 연신 고마움을 표시했다.

확실히 외모도 무기긴 했다.

적어도 단기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이걸 왜 여태 안 써먹고 있었을까.

이걸 왜 뉴튜브에 적용하지 못했을까.

뒤늦은 깨달음을 얻고서 준후는 병동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소화기 외과에서 하는 첫 스크럽이 코앞이었다.

수술은 위 절제 로봇 수술이고.

집도의는 유승용이었다.

유승용은 소화기 외과 과장이자 진료부원장이자 의대 망나니 동기인 승범의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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