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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98화 (98/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98화

제17장 사냥(3)

로봇 위 절제술은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암 조직이 침윤된 장간막.

혈관 주변의 림프절.

위 내부의 암 조직은 전부 제거되었고.

광범위하게 잘려나간 위와 십이지장을 문합하는 단계를 밟고 있었다.

‘이럴 때 보면 무공보다 의학 기술이 더 사기란 말이지.’

준후는 속으로 생각했다.

의료 과학 기술의 발전은 눈이 부셨다.

준후가 알기로는 십여 년 전만 해도 로봇 수술은 엄두도 못했다.

복강경 수술의 환경 또한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다.

복강경을 사용하더라도.

위를 복부 바깥으로 끄집어내서 암 조직을 절제하고 위와 십이지장을 문합한 후 다시 집어넣곤 했다.

무늬만 복강경이었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것도 옛말이 되었다.

수술용 내시경 도구는 놀랄 만큼 발전했다.

위를 복부 바깥으로 끄집어내지 않아도 복부 안에서 모든 처치가 가능했다.

딱! 딱! 딱!

지금 승용이 사용하고 있는 자동 봉합기만 해도 그랬다.

총처럼 생긴 손잡이 입구에 긴 막대가 달렸고.

그 막대 끝에 스테이플러와 똑 닮은 구조물이 붙어 있었다.

집도의가 손잡이를 당기면 자동 봉합기가 알아서 봉합을 해주었다.

딱! 딱! 딱!

승용은 거침없이 자동 봉합기를 사용 중이었다.

다만 자동 봉합기가 봉합을 간소화해 준다고 해서 외과의의 역량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봉합의 정도를 결정하고.

봉합 부위를 결정하고.

매듭 간의 연결을 균일하게 만드는 것은 여전히 의과의의 역할이었다.

그런 면에서 승용은 뛰어난 외과의였다.

준후가 지금까지 스크럽을 서며 본 명의들에게 조금도 뒤처지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최고의 수술은 가장 비싼 수술이지. 내가 로봇 수술을 고집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고. 이제 답변이 됐나?

아까 승용이 했던 대답이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다.

준후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준후도 잘 알았다.

모든 의사에게 희생과 봉사의 직업윤리를 강요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승용은 너무 멀리 나갔다.

제아무리 돈을 밝힌다고 해도.

본인이 치료하는 환자가, 또는 보호자가 나와 같은 사람이며 누군가의 가족이라는 점은 잊지 않아야 하거늘.

승용은 그런 최소한의 감수성마저 내팽개친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가장 비싼 수술이 가장 좋은 수술이라는 망언을 어찌할 수 있을까.

무림 정파 생활을 하던 당시.

자신과 시시각각 날을 세웠던 사천당가의 사문령과 승용의 모습이 겹쳐졌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휴, 이제 문합은 끝났군.”

승용이 조종간에서 일어나며 후련하다는 듯 말했다.

“절개창 닫고 마무리하는 단계는 상혁이 네게 맡기마.”

“네. 고생하셨습니다. 과장님.”

“고생하셨습니다. 과장님.”

“두 사람도 고생했어.”

승용이 두 사람 쪽으로 다가오다가 문득 준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서준후.”

승용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준후의 이름을 불렀다.

“네. 과장님.”

“혹시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이카루스를 알고 있나?”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비행을 했던 인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이카루스의 최후도 알고 있겠지?”

“네.”

“그럼 됐어.”

승용이 고개를 끄덕이고 수술방을 벗어났다.

승용이 굳이 이카루스를 언급했던 이유를 준후는 알 것 같았다.

이카루스는 더 높은 창공을 꿈꾸다가 밀랍으로 만든 날개가 녹아 추락해서 죽고 말았다.

이카루스처럼 이상을 추구한다면 준후 역시 나중에 처참한 꼴을 면치 못할 거라며.

승용은 일종의 경고를 한 것이다.

때마침 승용이 그리스 로마 신화를 비유했기 때문일까.

준후는 멀어지는 승용의 뒷모습이 꼭 미노타우르스 같았다.

* * *

승용이 떠난 후 위 절제술은 30분 만에 마무리되었다.

복부에 생긴 1-2센티미터 크기의 절개창들만 꿰매면 됐기 때문이다.

환자가 70세의 고령이라서 우려했던 것과 달리 수술은 매끄럽게 끝났다.

어떻게 보면 이 또한 승용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빼 먹을 건 충분히 빼 먹었어.’

상혁과 휴게실로 이동하면서 준후는 수술 과정을 복기했다.

승용의 로봇 위 절제술을 하나의 초식으로 이해하고 분석하고 암기를 해두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명의들의 수술 기술들을 차곡차곡 익혀두면.

나중에 집도가 수월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휴게실에 도착한 후.

준후는 자판기에서 캔 커피 두 개를 뽑아서 하나를 상혁에게 내밀었다.

“이야, 서준후, 서비스가 좋은데?”

“제가 원래 한 서비스하죠. 고생 많으셨습니다. 선배.”

준후는 상혁이 앉은 소파 옆에 앉아 캔 커피를 마셨다.

“이렇게 구김살이 없는데 미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죠?”

“아차차. 방금 건 그냥 못 들은 걸로 해라.”

상혁이 곤란하다는 듯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수상한 냄새를 맡은 준후가 이 상황을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미호 선배가 저 보고 뭐라고 했나요?”

“야, 그냥 넘어가자니까.”

“제 서비스를 받아놓고 맨입으로 넘어가면 곤란합니다. 비밀은 꼭 지킬 테니까 귀띔만 해주세요.”

“거 참, 사람 곤란하게 하네. 진짜 비밀은 꼭 지켜라.”

이어지는 상혁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상혁이 오전 중 미호와 잡담을 나눴는데 미호가 준후를 안 좋게 말했다는 것이다.

선배 알기를 개똥으로 알고.

근무 태도가 개판이라고 말이다.

준후의 입장에서는 어처구니없는 낭설이었다.

말도 안 되는 거짓 선동이었다.

준후가 개똥으로 아는 선배는 오직 미호뿐이었고.

근무 태도가 개판인 사람 역시 미호였다. 위장관 출혈 환자도 얼렁뚱땅 넘기려고 하지 않았던가.

“선배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셨어요?”

“흠흠. 솔직히 신경을 좀 쓰긴 했지. 미호랑 같이 지낸 지도 꽤 됐고 미호가 일을 잘하는 편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저에 대한 생각은 변함이 없으신가요?”

“그건 변했지. 준후 너, 성격도 싹싹하고 일도 워낙 잘하더만.”

상혁이 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특히 림프절 제거하던 때 대박이던데? 무슨 무협 영화 주인공 보는 줄 알았다니까.”

“…….”

“손이 막 슉슉하던데?”

‘그야 무공을 익혔으니 당연하죠’라고 대답하고 싶은 것을 준후는 참았다.

“과장님 앞에서 강단 있게 질문하고 대답하는 모습도 꽤 멋지더라. 나였으면 쫄아서 그렇게 못했을 텐데.”

“인턴이라 철이 없어서 그런가 봐요.”

준후는 겸손하게 대답했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미호가 준후를 험담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고의적으로 또 악의적으로.

준후가 대진처럼 고분고분하게 자신을 따르지 않자 심통 난 게 분명했다.

“근데 선배. 미호 선배 일 잘하는 거 맞나요?”

“잘하지. 뭐 하나 시키면 빨리 끝내고 정확하더라고. 대진이가 좀 늦는 편이고.”

“으음…… 그런가요? 전 반대인 것처럼 보였는데.”

“어떤 면에서?”

“제가 지켜봤을 때는요. 미호 선배가 대진 선배한테 자기 일을 계속 떠넘기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준후는 자신이 미호에게 당했던 험담을 고스란히 재현했다.

미호에게 당하고 살 수만은 없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것은 무림에서부터 준후에게 내려져 온 행동 강령이었다.

자신이 당한 만큼만 상대에게 돌려준다면 스스로가 악에 물드는 것도 경계할 수 있었다.

일석이조랄까.

“선배도 이 기회에 미호 선배를 유심히 관찰해 보세요. 선배의 눈썰미면 제가 무슨 말 하는지 금방 알아차리실 걸요?”

“그런 쪽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일단 알았어. 기억은 해둘게.”

잡담이 끝난 후 상혁이 먼저 휴게실을 떠났다.

소기의 목표를 이룬 준후는 느긋하게 남은 커피를 마셨다.

준후의 한 마디로.

상혁의 가슴 속에는 미호에 대한 의심의 씨앗이 심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씨앗은 점점 자라서 미호의 본성을 드러나게 할 것이다.

필요한 건 시간뿐이랄까.

준후는 그 자리에서 10분 정도 운기조식을 했다.

승용의 수술을 꼼꼼하게 분석하면서 진이 빠져 있었는데 운기조식을 마치고 나니 몸이 가뿐했다.

머릿속도 개운했다.

2-3시간은 푹 잔 것처럼.

정신력과 체력을 원 상태로 돌려주는 운기조식은 언제 생각해도 사기였다.

외과의가 된 후에는 지금보다 더 톡톡히 제 몫을 하리라.

터벅. 터벅.

준후는 소파에서 일어나 휴게실 문 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다가 아직 손에 커피 캔을 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준후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무성의하게 등 뒤로 커피 캔을 던질 따름이었다.

텅!

묵직한 소리는 단 한 번 들렸다.

캔이 정확하게 쓰레기통 안에 골인되었다는 증거였다.

로봇 수술은 분명 좋은 수술 중 하나다.

하지만 로봇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자신은 로봇보다 더 정교하고 깔끔하게 수술을 할 수 있다고 준후는 믿었다.

보지도 않고 등 뒤로 던진 캔을 쓰레기통에 넣을 수 있는 능력은 로봇에게 없었으니까.

* * *

지이이잉.

병동으로 복귀하는 도중, 가운 주머니에 넣어둔 콜폰이 몸을 떨었다.

“네. 선생님.”

-준후야, 방금 수술 끝났지?

“아. 선배셨어요?”

스테이션 콜인 줄 알았는데 전화를 건 사람은 뜻밖의 대진이었다.

“네. 방금 끝났고 지금 올라가는 길이에요.”

-잘 됐다. 그러면 오는 길에 ICU(중환자실 또는 집중 치료실) 좀 들러줄래? 원래는 내가 라운딩 해야 하는데 일이 좀 바빠서. 미안하다.

대진이 겸연쩍어하며 용건을 전했다.

“그건 상관없는데 혹시 또 미호 선배가 선배한테 뭐 시켰어요?”

준후는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본래라면 이 시간대 중환자실 라운딩은 미호가 맡아야 했다.

대진 수술 어시스트에 들어가야 할 시간대였으니까.

-뭐, 그렇게 됐네.

“이러다가 선배 몸 축나겠어요. 적당히 거절하시는 게 좋다고 누누이 말씀드렸는데.”

-일 좀 더한다고 어떻게 되겠어? 하여간 부탁해.

대진이 먼저 통화를 끊었고.

준후는 가만히 콜폰을 내려다보았다.

이쯤 되면 미호는 대진의 동기가 아니라 흡혈귀 아닐까.

아무래도 당직실에 올라가서 대진과 미호에 대해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준후는 그 길로 곧장 3층의 소화기 외과 ICU를 찾았다.

라운딩하면서 환자를 살피고.

ABAG, 드레싱, 폴리 카테터와 비위관 교체 등의 업무를 순식간에 해냈다.

그것도 왼손으로.

준후는 요즘 왼손을 사용하는데 재미를 들렸다.

오른손만큼 처치가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왼손 처치의 정확도와 속도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수 호박 기술은 괴짜 무공이었지만 성능만큼은 확실했다.

준후도 이렇게 빨리 왼손에 통달할 줄은 몰랐기에.

양수 호박 기술을 연말까지 꾸준히 익힌다면 아마 오른손에 뒤처지지 않는 경지까지 이를 것이다.

정형외과 명의인 이동준 교수가 무려 6년 동안 왼손을 수련했던 것이 무색해질 정도로 말이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ICU를 빠져나오는데 보호자 대기실에서 익숙한 얼굴이 인사를 건넸다.

방금 막 로봇 위 절제술을 마친 손대철 환자의 딸이었다.

“안녕하세요. 보호자 분. 교수님께 이야기는 들으셨죠?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네. 덕분에 한 시름 덜었답니다. 오늘은 다리 쭉 펴고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선생님도 고생하셨어요.”

“수술은 교수님이 다하셨는데요, 뭐.”

준후는 쑥스러워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로봇 수술을 복강경 수술로 변경하는 건에 관해서 말인데요.”

“…….”

“교수님과 직접 대화를 하셨다고 하던데. 교수님이 뭐라고 하셨나요?”

준후가 호기심에 물었다.

-보호자가 로봇 수술에 동의했다는 뜻이지. 내가 직접 설득했으니까 군소리 나올 일은 없을 거야.

수술방에 막 입장했을 때.

승용은 분명 그렇게 말했는데 구체적인 내용이 궁금했던 것이다.

“아. 그거요? 교수님이 복강경 수술로 변경은 가능하다고 하셨어요.”

“그럼 왜 로봇 수술을…… 분명 수술비가 부담된다고 하셨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준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보호자의 말은 얼핏 앞뒤가 안 맞는 듯했다.

“복강경 수술 스케줄이 밀려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수술 방법을 변경하면 2주일은 더 기다려야 한다고 하셨어요.”

“아…… 그 생각은 못 했네요.”

“저도요. 수술을 기다리는 도중에 아버님 상태가 나빠질 수도 있으니까 빨리 수술받기로 결정했답니다.”

“잘하셨습니다. 아버님이 쾌차하시도록 저도 꼼꼼히 간호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대화를 마치고 병동으로 복귀하는 준후의 얼굴에는 여전히 먹구름이 껴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로비 쪽을 바라보니 때마침 승용과 승범이 마주 서서 대화하는 모습이 보였다.

준후는 성난 얼굴로 승용을 노려보았다.

보호자 앞이라 내색은 안 했지만 사실 복강경 수술 스케줄은 크게 밀려 있지 않았다.

준후가 알기로 적어도 일주일 내에 스케줄을 잡을 수 있었다.

즉 승용은 로봇 수술을 유도하기 위해 보호자에게 거짓을 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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