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99화 (99/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99화

제17장 사냥(4)

병원 지하 1층 카페.

창가 쪽 자리에 앉은 승용은 가만히 카페 내부를 둘러보았다.

카페는 언제나처럼 가지각색의 사람들로 붐볐다.

환자복을 입은 환자도 있고.

휠체어를 탄 환자도 있고.

수액 거치대를 곁에 둔 환자도 있고.

보호자도 있고.

병원 스태프도 있고.

보험 회사 직원도 있고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쏟아내는 다양한 소음에 승용은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승용은 통제되지 않는 소란스러움을 싫어했다.

문득 계산대로 시선을 돌리자 승범이 커피 두 잔을 들고 이쪽으로 오는 중이었다.

로비에서 우연히 아들 녀석을 마주치면서.

아들이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해서 승용은 어쩔 수 없이 카페를 찾게 되었다.

“메뉴는 변함이 없으시네요.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마시면 질리지 않으세요?”

승범이 승용 앞에 커피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부자들이 돈 버는 게 질린다고 하는 것 본 적 있니? 아이스 커피는 나한테 그런 의미다.”

“하하하. 뭔가 말씀이 거창하고 오묘하네요.”

승용은 대답 대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차갑고 쓸쓸한 커피가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승용은 아이스 커피를 좋아했다.

아니, 차가운 음식이라면 다 좋아했다.

냉면, 냉국, 아이스크림, 화채 등등.

음식 취향은 언젠가부터 사람 취향에도 반영되었다.

승용은 차가운 사람을 좋아했다.

오로지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하며 타인과 거리 둘 줄 아는 사람을 좋아했다.

반대로 정이니 희생이니 봉사니 하며 서로의 살과 마음을 맞대려고 하는 뜨거운 사람을 싫어했다.

“기껏 쉴 시간을 만들어 놨더니 이런 식으로 소모하게 될 줄이야.”

승용이 눈썹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용건만 간략하게 말하거라.”

“네. 아버지. 사실 부탁드릴 게 하나 있어서요.”

“부탁?”

“네. 지금 소화기 외과에 서준후라는 인턴이 수련 중이거든요. 그 친구, 아버지 힘으로 어떻게 괴롭혀주실 수 없나요?”

“이런 미친 녀석을 다 봤나.”

커피잔을 든 승용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소화기 외과 과장이자 진료부원장인 자신에게 고작 인턴 따위를 괴롭혀달라고 하다니…….

승범의 부탁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승범을 따끔하게 혼내려던 승용은 불현듯 서준후의 존재를 의식했다.

우심증 환자에게 CPR을 했던 인턴.

오늘 수술방에서 자신의 수술을 어시스트했던 인턴이 바로 서준후였던 것이다.

“혹시 준후 아세요?”

부전자전이라고 승범이 승용의 표정을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고 선수를 쳤다.

“모를 수가 없지. 내 눈에만 벌써 두 번이나 띠었으니까.”

“하여간 걔는 어딜 가나 주목받는다니까.”

“준후가 네게 무슨 잘못이라고 저질렀니?”

“엄청났죠. 저 의대 다닐 때, 그 사건 기억하세요?”

이어지는 승범의 설명은 놀라웠다.

과거 승범은 카데바와 찍은 사진을 SNS에 올려 곤혹을 치룬 적이 있었다.

그 사건을 막기 위해 승용은 당시 학과장이었던 동기에게 전화해서 일을 잘 처리해달라고 부탁도 했었고 말이다.

문제는 사건이 기사화되면서.

승용의 청탁마저 물거품이 됐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그 주인공이 준후였다고?

“맞아요. 그때 절 엿 먹인 게 준후입니다. 아직도 그때만 떠오르면 잠을 설쳐요.”

“…….”

“그러니까 아버지가 이번에도 힘 좀 써주시면 안 될까요? 소화기 외과에서 아버지는 최고시잖아요.”

승범이 뜨거운 표정으로 말했고.

승용은 차가운 표정으로 들었다.

서준후라…….

환자밖에 모르면서 실력은 뛰어난, 전형적인 샌님이라고 생각했건만.

준후는 의외로 수완이 좋은 친구였다.

“들어주실 거죠? 아버지. 네?”

“아들아.”

승용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승범을 불렀다.

“널 돕는 건 그때 한 번뿐이라고 누누이 말했을 텐데?”

“그때와 연장 선상에 있는 부탁이잖아요. 별개가 아니라고요.”

“그건 네 생각이지.”

“아버지. 저 화병 나는 거 보고 계실 거예요?”

“내 말에 감히 토를 달다니. 이제 눈에 뵈는 게 없는 게냐?”

승용의 섬뜩한 눈빛을 받고서 승범이 깨갱 꼬리를 말았다.

테이블 분위기가 순식간에 무겁고 팽팽해졌다.

“부자지간을 떠나서 넌 내게 청탁을 하고 있어. 그리고 청탁을 하려면 뭔가 대가가 있어야 하지.”

“…….”

“준후를 손 보고 싶으면 내게 무언가를 내와라. 그럼 들어주마.”

할 말을 마쳤기에 승용은 캔 커피를 손에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망한 표정의 아들을 뒤로한 채 수술실로 걸음을 옮겼다.

와드드득.

와드드득.

치아에 부서지는 얼음 파편이 입속 사방으로 튀었다.

승용은 역시 차가운 것이 좋았다.

* * *

그날 저녁, 소화기 외과 당직실.

준후는 유정, 대진과 함께 야식으로 피자를 먹고 있었다.

먹기도 편하고 남은 음식을 보관하기도 좋아서, 피자는 당직 서는 의사들에게 사랑받는 야식 중 하나였다.

“유정아, 너무 얍삽한 거 아니냐?”

준후가 유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유정이 피자 테두리만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피자를 먹더라도 최대한 탄수화물 섭취를 줄여야지. 나 키토(저탄고지)하는 거 몰라?”

“빵 테두리 먹는다고 사람 안 죽는다.”

“살은 찌겠지. 혈당은 올라가고.”

“그래도 어쩌다 한 번 먹는 건데 제대로 먹는 게 맞지 않나?”

준후는 유정의 식단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는 유정의 식단을 존중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원래 음식은 남기면 안 되는 건데 말이다.

“후. 넌 몰라. 키토의 광활한 세계를.”

“그나저나 선배, 미호 선배는 어디 갔어요?”

준후는 자리에 없는 미호에 관해서 대진에게 물었다.

“내일 오프인데 약속이 있다나 봐. 피자 먹으면 얼굴 붓는다고 안 먹는데.”

“내일 오프, 선배 아니었어요?”

“내가 양보했어. 딱히 갈 때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만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진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지만 한 번 굳은 준후의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

미호가 대진을 이용해 먹는 선이 점점 과해진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문제는 대진이 미호의 행동을 매번 오냐오냐 받아준다는 것인데…….

하지만 준후는 그런 대진이 답답하면서 한편으로는 이해가 갔다.

대진과는 성격이 조금 다르긴 했지만 준후 역시 타인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던 때가 있었으니까.

“선배. 침대에 누워보세요.”

“와우, 서준후 스페셜 나오나요?”

유정이 피자 테두리를 버리며 대진에게 농담조로 말했다.

“서준후 스페셜?”

“준후가 안마 잘하는 건 아시죠?”

“알지. 아까도 한 번 받았어.”

“준후의 안마 중에서도 서준후 스페셜이 으뜸이에요. 받아보면 깜짝 놀라실 걸요?”

“더 놀랄 게 남아 있었나?”

대진이 고개를 갸웃거리곤 준후가 시키는 대로 침대에 누웠다.

“몸에 힘 빼고 가만히 계세요.”

준후는 엎드려 누운 대진에게 추궁과혈을 실시했다.

뚜두둑. 뚜두둑.

목뼈와 허리뼈를 하나하나 펴는 분절을 통해 가동성을 늘려주었고.

목과 허리 주변부에 긴장으로 짧아진 근육을 내공이 담긴 손가락으로 문질러 풀어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진의 머리를 맑게 해주기 위해 태양혈과 백회혈, 아문혈 등을 지압해 주기도 했다.

지압으로 혈액순환이 원활해지면 정신이 번쩍 들기 때문이다.

“정말 미쳤네? 뭔가 자고 일어나서 개운한 느낌인데?”

5분가량 펼쳐진 서준후 스페셜이 끝난 후.

대진이 몸을 움직여보며 감탄했다.

안마를 받기 전과 후의 차이가 마치 온탕과 냉탕만큼 극명했던 것이다.

적어도 지금 기분이라면.

이틀 동안 당직을 서도 끄떡없을 것 같았다.

아까 받은 마사지보다 효과가 더 좋았던 것이다.

“고맙다. 준후야. 덕분에 살 것 같네.”

“피곤하면 언제든지 저를 찾아주세요. 공짜로 모시겠습니다.”

“뭐야? 나는 안 해줄 거야?”

“야식 먹기 전에 받았잖아. 욕심도 많아라.”

준후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고 본론을 꺼냈다.

대진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선배. 미호 선배에 관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뭔데?”

“오전에도 잠깐 말은 했는데. 미호 선배가 뭐를 부탁하면 제발 거절도 좀 하고 그러세요.”

준후는 대진이 대진에게 기생하고 있는 미호를 떨쳐내기를 바랐다.

준후도 한 때 기생을 당해서 봐서 알았다.

몸과 마음이 갈수록 무기력해지고 썩어들어가는 그 느낌을 잘 알았다.

그래서일까.

과거 자신과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대진을 지켜보면 마냥 안쓰러웠다.

“계속 그렇게 무리하다가는 선배가 환자 되겠어요.”

“괜찮아. 아직은 견딜 만하니까. 준후 너처럼 일 잘하고 마사지도 잘해주는 후배도 곁에 있는데, 뭐.”

“견디면 견딜수록 좋아지는 게 있고 견딜수록 나빠지는 것도 있어요. 선배는 후자 같아서 걱정해서 하는 소리입니다.”

“준후야. 내 생각해 주는 건 진짜 고맙긴 한데 적당히 하자. 응?”

대진의 표정이 처음으로 살벌하게 변했다.

“이용당하는 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겠어? 나는 그냥 힘들어하는 동기를 돕고 있을 뿐이라고.”

“…….”

“동기를 돕는 게 죄야? 그럼 의사가 환자를 보살피는 것도 죄겠네?”

“돕는 것도, 도움을 받는 것도 적정한 선이 있는 법이죠. 미호 선배도 그렇고 선배도 그렇고 지금 둘 다 선을 넘었어요.”

준후도 물러서지 않고 대답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말다툼 수준으로 넘어가자 지켜보고 있던 유정이 불안하게 양쪽을 지켜보았다.

당직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전쟁터로 변했다.

“선을 넘고 있는 건 오히려 너 아니냐?”

“…….”

“당사자인 내가 괜찮다는데 왜 네가 나를 안 괜찮다고 해?”

대진이 격정적으로 말했고.

준후는 곧바로 차분하게 반론했다.

“스스로가 괜찮지 않은데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때가 누구나 있으니까요.”

“…….”

“그리고 그런 시기가 정말 위험한 시기고요. 삶아진 개구리 증후군 모르세요?”

“…….”

“비커 속에 개구리를 넣어놓고 천천히 가열하면 개구리는 빠져나갈 생각도 못 하고 서서히 죽어간다고요.”

“개구리 같은 소리 하네. 그리고 네가 그런 걸 어떻게 아는데?”

“당연히 알죠. 제 몸으로…… 뼈저리게 경험해 봤으니까.”

준후의 목소리에 애잔함이 묻어났다.

무림에서 준후는 현대인들은 감히 상상도 못 할 사건과 사고들을 경험해 봤다.

덕분에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고통스러웠지만 몇 가지 깨달음도 얻었다.

물러서야 할 때와 나아가야 할 때를 배웠고.

마음을 다스리는 법도 배웠다.

그래서일까.

준후의 직감은 말하고 있었다.

대진이 벼랑 끝에 위태롭게 내몰려 있는 상태라고.

그런 대진을 준후는 못 본 척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적어도 곁에 있는 선한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보듬어주고 싶은 게 준후의 마음이었다.

동료가 힘들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이젠 지긋지긋했다.

“하…… 쫑알쫑알 말도 많네. 준후 넌 라운딩이나 돌고 와. 유정이 넌 당직도 아니까 숙직실로 가고.”

대진이 다 귀찮다는 듯 허공에 손을 저었다.

하지만 준후는 그런 대진에게 오히려 거리를 좁혔다.

“비록 선배랑 의견 다툼이 있었지만 전 선배 편입니다. 선배가 마음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릴게요.”

* * *

“하아…….”

대진은 하얀 당직실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준후와 다투고 난 후 음식이 얹힌 것처럼 마음이 불편했다.

사실 대진도 준후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미호의 부탁은 과했고.

부탁을 군말 없이 들어주는 자신의 행동도 과했다.

자신과 미호 사이의 관계는 명백하게 기형적이었다.

그런데도 마음을 고쳐먹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장남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타고난 성품이 그런지 몰라도.

대진은 타인의 부탁을 거절하는 일이 너무 힘들었다.

부탁을 거절하면 죄를 짓는 느낌이었다.

부탁을 한 사람이 자신을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주변 사람이 하는 부탁은 웬만하면 다 들어주었다.

마음이 힘든 것보다는 몸이 힘든 게 나았으니까.

젠장, 또 이러네.

대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꼭 누군가가 손으로 자신의 심장을 움켜쥔 것처럼 가슴이 아파 왔다.

몇 주 전부터 간간이 찾아오던 통증이었다.

준후의 안마를 받고 조금 나아지는가 싶었는데 아무래도 착각이었던 모양이었다.

쿵. 쿵. 쿵. 쿵.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는데도 심장은 갈수록 빠르게 뛰었다.

반대로 등골은 서늘했으며.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

뭔가 이상했다. 평소보다 증상이 너무 과격했다.

“으으으으.”

벌어진 입술 사이로 한 줄기 신음이 새어 나왔다.

대진은 이제 의자에 앉아 있는 것조차 버거웠다. 의식은 흐려지고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계속 그렇게 무리하다가는 선배가 환자 되겠어요.

-스스로가 괜찮지 않은데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때가 누구나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런 시기가 정말 위험한 시기고요. 삶아진 개구리 증후군 모르세요?

-비커 속에 개구리를 넣어놓고 천천히 가열하면 개구리는 빠져나갈 생각도 못 하고 서서히 죽어간다고요.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준후가 했던 말들이 주마등으로 뇌리를 스쳤다.

내가 정말 삶은 개구리 증후군에 걸린 걸까.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스스로를 방치했던 건가.

그래서 결말이 과로로 인한 심장마비인 걸까.

후회와 한탄은 오래가지 않았다.

쿵!

대진의 육신이 짚단처럼 맥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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