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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100화 (100/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100화

제17장 사냥(5)

라운딩을 끝내고 준후는 당직실로 복귀하는 중이었다.

밤 12시.

병동 복도는 고요하고 적막했다.

수면등만이 어두운 병실을 달빛처럼 은은하게 비출 뿐이었다.

뭐, 이제 시작일 뿐이니까.

거절을 못 하는 대진의 성격을 개선하려는 1차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준후는 실망하거나 주눅 들지 않았다.

성격은 원래 쉽게 바뀌지는 않는 법이었다.

준후도 마찬가지였다.

과거 무림에서.

성선설을 신봉하던 자신이.

악인들도 착하게 갱생할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던 자신이.

그 사고방식을 바꾸는데도 몇 년씩이나 걸리지 않았던가.

대진도 처지는 비슷할 것이다.

드르르륵.

“…….”

당직실 문을 연 순간, 준후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바닥에 엎드린 채 쓰러져 있던 대진을 발견한 것이다.

당황하고 놀란 것은 잠시뿐.

준후는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대진에게 다가가 대진이 천장을 보고 똑바로 눕도록 만들었다.

의사의 미덕 중 하나인 부동심과 평정심을 준후는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

“선배. 괜찮아요?”

어깨를 흔들어보았으나 대진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흉곽의 움직임은 멈춰 있었으며 코 밑에 댄 손가락에서는 숨결을 느낄 수 없었다.

야단났다.

하트 어레스트(Heart arrest, 심정지)가 발생한 것이다.

“선생님. 엠부백(공기 주머니)하고 제세동기 좀 챙겨주세요. 대진 선배가 쓰러졌습니다!”

준후는 복도를 걷고 있던 간호사에게 상황을 전파하고 흉부 압박부터 시작했다.

퍽! 퍽! 퍽!

준후가 가슴을 압박할 때마다 대진의 몸이 펄떡펄떡 뛰어올랐다.

대진의 얼굴은 파리했으며.

축 늘어진 팔다리는 생기가 없었다.

삶과 죽음 중에서 대진은 죽음 쪽에 더 가까운 것처럼 보였다.

흉부 압박을 하는 동안.

준후는 일부러 대진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했다.

무언가 기분이 묘했다.

그동안 CPR을 많이 해봤지만 지인에게 펼친 것은 처음이니까.

어쩌면 의사와 환자의 경계는 종이 한 장 차이로 갈리는 건지도 몰랐다.

쓰러지면 누구나 환자다.

안 되겠어.

그 방법을 써보자.

준후는 흉부 압박을 1사이클을 마치고 난 후.

최근 업그레이드한 흉부 압박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팔의 압박력이 눈에 띄게 떨어졌다.

“선생님. 저희 왔습니다.”

“윤정이 너는 제세동기 세팅해. 나는 앰부백 짤 테니까.”

나이트 근무를 서던 간호사 두 명이 든든하게 지원군으로 따라붙었다.

“선생님. 교대할까요?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요?”

선영이 대진의 코와 입에 앰부백을 갖다 대며 물었다.

선영은 준후의 흉부 압박이 살짝 약하다고 느끼는 중이었다.

“아니요. 괜찮으니까 앰부백부터 짜주세요.”

“지쳐서 압력이 좀 약해 보이는데…… 정말 괜찮나요?”

“지친 게 아니라 제 방식입니다. 믿고 맡겨주세요.”

“알겠어요.”

준후가 흉부 압박을 하고, 선영이 앰부백을 짜고, 윤정은 대진의 상의를 벗긴 후 전극을 부착하기 시작했다.

심정지 발생 3분 만에.

응급 처치가 실행되었고 치료를 위한 모든 세팅까지 끝난 것이다.

-심장 리듬 분석 중. 제세동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선생님. 제세동이 필요 없다는데요? 이상하네? 기계가 고장 났나?”

제세동기를 맡은 윤정이 놀란 부엉이 눈으로 준후에게 물었다.

막 쓰러진 심정지 환자에게 제세동이 필요 없다니…….

이게 무슨 장난이지?

윤정은 괜히 제세동기를 툭툭 건드려보았다.

“대진 선배. 회복된 것 같습니다. 앰부백 치워주시고 전극도 정리해 주세요.”

준후가 오더를 내리고 대진의 상태를 재차 살폈다.

코 밑에서 느껴지는 또렷한 숨결.

다시 오르락내리락하기 시작한 흉곽.

벼랑 끝에 몰렸던 것처럼 위태로웠던 심정지 상황이 끝난 것이다.

그제야 당직실을 휘감았던 팽팽한 공기가 걷혔다.

“이런 말씀 드리기는 조금 그렇지만 뭔가 싱거운 느낌이네요. 제세동기도 사용 안 하고 CPR도 고작 3분 만에 끝나고.”

“그러게. 최소 10분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는데.”

선영이 말하고 윤정이 한 마디 덧붙였다.

방금 CPR은 분명 이례적이었다.

보통은 이렇게 빨리 끝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흉부 압박을 혼자 도맡았던 준후는 지친 기색이 없었다.

심장내과에 전화해서 사태를 번개처럼 마무리하고 있었다.

“잘생겼는데 일도 잘하네.”

선영이 속삭이듯 윤정에게 말했다.

“하지만 저렇게 잘난 서 선생님도 저를 애인으로 가지지는 못했죠.”

“지금 실없는 농담할 때니?”

“죄송해요. 분위기를 좀 풀어보고 싶었는데.”

“두 분 다 고생하셨습니다. 나머지는 저한테 맡겨주세요.”

준후가 대진을 부축해서 침대에 눕힌 후 두 사람에게 말했다.

그렇게 상황은 순식간에 종료되었다.

* * *

심장내과 병동.

준후는 침상에 누워 있는 대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진은 어느새 환자복으로 갈아입었으며 왼팔에 수액줄을 달고 있었다.

급하게 콜한 심장내과 레지던트에 따르면.

각종 검사 결과에 따르면.

대진은 급성심근경색으로 인한 급성 심장마비로 쓰러졌다고 했다.

그래서 하루 이틀 정도 입원해서 약물로 막힌 심장 혈관을 뚫어주는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쓰러진 근본적인 원인이라면 분명 과로일 것이다.

의사 인생을 통틀어 업무 강도가 높을 때가 레지던트 1년 차였다.

그런 1년 차에 미호의 업무까지 대신 맡았으니 대진의 몸이 성할 리 없었다.

그래도 회복이 빨라서 다행이야.

새로운 CPR도 효과가 있었단 말이지.

준후는 CPR을 하던 당시를 떠올렸다.

-지쳐서 압력이 좀 약해 보이는데…… 정말 괜찮나요?

선영이 준후의 흉부 압박을 걱정했던 순간이 있었는데.

그것이야말로 준후의 업그레이드된 CPR의 핵심이었다.

CPR이란 본래 순수하게 완력으로 가슴을 압박해서 심장에 고인 혈관을 전신으로 짜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준후는 그 역할을 내공으로 대신했다.

내공 흉부 압박술이라고 해야 할까.

완력이 아닌 내공으로 심장을 압박할 경우.

CPR로 인해 흔히 뒤따라오는 부작용인 갈비뼈 골절을 피할 수 있었다.

즉 환자의 경과를 한층 더 끌어 올릴 수 있는 것이다.

“선배. 지금은 좀 어때요?”

준후가 안쓰러운 목소리로 대진에게 물었다.

“…….”

“선배 깨어 있는 거 다 알아요. 억지로 자는 척하면 그게 더 힘들 걸요?”

“……알고 있었구나. 민망하네.”

준후의 지적에 잠든 척하고 있던 대진이 눈을 떴다.

“지금은 괜찮아. 가슴이 조금 뻐근한 것만 빼면. 이거 졸지에 폐를 끼쳤네?”

대진이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이 와중에도 다른 사람 걱정을 하세요? 이젠 선배 걱정만 하세요. 제발.”

“어쨌거나 준후야, 고맙고 미안하다. 내가 너무 미련해서 이 꼴이 되어버렸어. 정말 난 비커 속의 개구리였나 봐.”

“선배는 잘못 없어요. 전 알아요.”

“내가 내 몸을 관리 못 해서 이 지경이 된 건데?”

준후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대진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사실 개구리는 죄가 없었다.

진짜 죄는 개구리를 비커에 가두고 서서히 비커 속의 온도를 높인 누군가에게 있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푹 쉬고 복귀하세요. 선배가 복귀할 때쯤이면 많은 게 달라져 있을 거예요.”

“무슨 꿍꿍이인데?”

“제가 모처럼 진짜 열 받았거든요? 선배를 이렇게 만든 사람한테 본때를 보여줘야죠.”

“혹시…… 미호?”

“네. 전 지금부터 미호 선배랑 전쟁을 치를 거예요. 대신 선배도 조금 도와주셔야 해요.”

준후는 대진에게 계획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대진이 편히 쉴 수 있도록 병실을 나왔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때마침 모든 사태의 원흉인 미호가 맞은편 복도에서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대진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한 모양이었다.

“대진이는 좀 어때?”

“대진 선배가 쓰러졌다니까 이제 좀 걱정이 되나 보죠? 아니 긴장이 된다고 해야 하나?”

“…….”

“일을 대신해 줄 호구가 사라졌으니까 말이에요.”

“건방진 소리 할래? 아무것도 모르는 인턴 주제에.”

미호가 앙칼진 목소리로 맞받아쳤다. 도끼눈으로 준후를 노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마인(魔人)들과 목숨을 걸고 싸웠던 준후 아니던가.

고작 미호의 으름장에 주눅 들 리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건 선배입니다. 지금 누구를 건드렸는지 감이 안 오시죠?”

“보자 보자 하니까 못하는 말이 없네? 야! 대진이가 쓰러진 게 왜 내 잘못이야?”

“…….”

“본인이 힘들면 내 부탁을 알아서 거절했어야지. 그걸 왜 내 책임으로 덮어씌우냐고.”

“사기꾼이 좋아하는 전형적인 멘트네요. 사기를 당한 쪽이 잘못했다는 멘트요.”

준후는 미호의 뻔뻔함에 치를 떨었다.

무릎 꿇고 두 손을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국에 오히려 성질을 부리다니…….

미호는 애초에 싹부터 글러 먹었다.

“뭘 믿고 나대는지 모르겠지만 너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그건 내가 하고 싶은 소리입니다.”

준후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두고 보시죠. 지옥 구경을 하는 사람이 과연 누구인지.”

* * *

다음 날 오전.

소화기 외과 오전 컨퍼런스와 회진이 끝났다. 준후는 3년 차 상혁을 찾아가 자신의 뜻을 전했다.

“선배. 대진 선배가 하던 업무, 제가 맡아도 될까요?”

“응? 1년 차 업무를 네가 감당할 수 있겠어? 인턴 일도 벅찰 텐데.”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하잖아요. 2년 차 선배들도 다 바빠 보이던데?”

“그거야 그렇긴 한데…….”

상혁이 턱을 쓸어내리며 망설였다.

“일단 해봐. 대신 일 꼬이면 얄짤 없이 자른다?”

“그럼요. 당연하죠.”

상혁의 허락을 받고 준후는 당직실로 이동했다.

대진의 아이디로 회진 때 떨어진 오더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타다다다닥.

키보드 위에서 준후의 손가락은 피아니스트처럼 현란했다.

키보드 소리는 리드미컬했으며.

산더미처럼 쌓였던 오더는 순식간에 사라져갔다.

준후는 다른 인턴들과 달리 레지던트 1년 차 업무 정도는 소화가 가능했다.

정형외과에서 1년 차 선배를 도우며 경험치를 쌓았던 것이다.

거기에 무림에서 쌓은 손놀림이 더해지자 업무 속도는 경이로웠다.

심지어 준후는 본인이 입력한 오더를 본인이 처치하는 기염까지 토했다.

혼자서 레지던트도 하고 인턴도 했던 것이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았기에.

준후는 틈틈이 소화기 외과 포켓북으로 의학지식을 쌓는 여유를 선보였다.

한 편 그런 준후와는 정반대의 처지에 놓인 인물이 있었다.

바로 미호였다.

대진이 쓰러지면서 오프가 잘린 미호는 똥 씹은 표정으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준후와 비교했을 때.

미호의 업무 처리 속도는 현격하게 느렸다.

준후가 오더를 입력하고 처치까지 끝내고 포켓북을 보는 동안.

미호는 회진 때 메모한 오더조차 다 입력하지 못했다.

평소라면 대진에게 본인 일을 떠넘겼겠지만 대진이 없으니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오전 10시.

드르르륵.

수술 어시스트를 마친 상혁이 당직실로 들어왔다. 준후에게 다가가 준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뭐야? 믿고 맡겨 달라더니 농땡이 부리겠다는 거였어?”

상혁의 말투에 가시가 돋쳤다.

준후가 일을 하는 대신 포켓북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일을 다 하고도 시간이 남아서요.”

“입퇴원 기록지, 경과 기록지, 퇴원 요약지 작성 다 끝냈어? 오늘 작성할 게 꽤 많을 텐데?”

“확인해 보실래요?”

준후가 여유롭게 환자들의 차트를 모니터에 띄웠다.

차트를 꼼꼼하게 살피던 상혁은 이내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정말 준후의 말이 맞았던 것이다.

점심시간까지 간신히 끝낼까 말까 한 업무를 준후는 이미 다 처리해 놓은 상태였다.

손가락에 날개라도 달렸나?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설령 3년 차인 상혁이 지금 1년 차 업무를 소화한다고 해도 이만한 속도로 일을 끝낼 수는 없거늘.

“미호야. 혹시 네가 준후 업무 도와줬니?”

“그럴 리가요. 본인 업무도 처리 못 하는데 누가 누구를 도와주겠어요.”

미호에게 물었지만 정작 대답은 준후가 했다.

어쨌거나 상혁은 미호에게 다가가 미호가 작업 중인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순간 찌푸려지는 미간.

떡이 걸린 것처럼 답답해지는 가슴.

“미호야. 너 아직 여기까지 밖에 못했어?”

“그게 몸이 안 좋아서…….”

“컨디션이 안 좋아도 이건 너무 심하잖아. 하루 종일 회진 오더만 입력할래?”

“죄…… 죄송합니다.”

“인턴인 준후도 저 정도 하는데 뭐 보고 느끼는 게 없어?”

상혁은 모처럼 미호를 따끔하게 혼냈다.

얼핏 평범해 보일지 모르는 꾸중이었지만 이는 근 두 달 내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름 대사건이었던 것이다.

-근데 선배. 미호 선배 일 잘하는 거 맞아요?”

-제가 지켜봤을 때는요. 미호 선배가 대진 선배한테 자기 일을 계속 떠넘기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상혁은 그제야 어제 준후가 휴게실에서 했던 말을 실감했다.

지금까지 미호가 레지던트 1년 차 에이스라고 생각했건만.

그게 착각일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대진이 쓰러진 다음 날부터 미호의 업무 능력이 이렇게까지 형편없어질 수가 없었다.

“파라(Paracentesis, 복수천자의 줄임말) 환자 있던데. 처치는 했는지 모르겠네요.”

상혁의 의심에 준후가 불을 붙였다.

“파라 환자가 있는데 아직 처치를 안 했다고? 야, 주미호, 준후 말이 진짜 맞아?”

상혁의 목소리에 은은한 노기가 깃들었다.

“그게 여기까지만 입력하고 할 생각이었어요.”

“멍청한 소리를. 일도 우선순위를 지켜가면서 해야지! 당장 파라부터 해. 봐줄 테니까 내 앞에서 해 봐.”

“네.”

상혁이 앞장서고 그 뒤를 미호가 죄인처럼 뒤따랐다. 이제 당직실에 남은 사람은 준후뿐이었다.

준후는 문 쪽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척척이었다.

미호를 혼내 줄 준후의 묘책은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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