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102화
제18장 임계점(2)
형석은 물끄러미 친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친구의 얼굴은 핏기없이 창백했다.
복부에는 피 묻은 붕대가 둘둘 감겼다.
생기발랄하던 평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손목에 꽂힌 수액줄과 혈액팩으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병상 주변은 몹시 시끄러웠다.
하지만 형석의 귀에는 규칙적인 기계음만 들렸다.
삐이이.
삐이이.
과도가 복부에 꽂힌 친구를 내려다보면서도 형석은 의외로 끔찍하다는 생각은 못 했다.
뭐랄까.
지금 보는 광경이 꿈결 같았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라도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형석은 불쑥 그런 생각을 했다.
119에 실려 올 때부터 병원 응급실에서 응급처치를 받은 지금까지.
형석에게는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친구 복부에 꽂힌 과도를 왜 구급대원이나 의사들이 제거하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형석의 상식으로는 과도를 뽑는 게 옳은 것처럼 보였다.
저 날카롭고 차가운 쇠붙이를 제거한다면 친구의 고통을 한결 덜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슨 이유가 있겠지.
구급대원이나 의사가 바보도 아니고.
……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
구급대원이나 의사가 제 할 일을 안 하고 있다는 생각도 형석은 들었다.
사람이라면 말이다.
누구나 두렵고 무서운 일을 뒤로 미루려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그 순간부터였다.
형석의 눈에 오로지 과도만 보이기 시작한 것은.
친구의 배가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같이 움직이는 과도가 꼭 원수처럼 보였다.
저걸 뽑아야만 친구의 상태가 나아질 것 같았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칼에 찔린 사람이 스스로 칼을 뽑곤 했다. 그런 장면도 나름 의학적인 고증이 있으니까 촬영했던 게 아닐까?
내가 한다.
아니, 나라도 한다.
마음을 굳게 먹은 형석의 눈빛이 돌변했다.
형석은 비장한 각오로 친구의 복부에 꽂힌 과도를 향해 두 손을 뻗었다.
성격이 조금 다르다만 칼을 다루는 데는 자신이 있었다.
정육점에서만 20년 넘게 일을 해오지 않았던가.
스으으윽.
그런데 형석의 손이 과도에 닿기 직전이었다.
-그 손 놓으세요!
쩌렁쩌렁한 외침이 형석을 제지했다.
놀란 형석은 눈을 깜빡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형석을 신경 쓰지 않았고 아무도 형석을 호출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체 누가 소리를 쳤단 말인가.
방금 들은 목소리를 환청으로 여기며 형석은 다시 과도를 손에 쥐려고 했다.
그러자 또 똑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 손 놓으시라고요!
형석은 알 수 없는 목소리에 얼이 빠졌다.
다친 건 친구인데 왜 본인의 정신이 미쳐 버렸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시 한번 주위를 살피는데.
아까 진료를 봤던 잘생긴 의사가 이쪽으로 다급하게 질주하고 있었다.
이름이 서준후라고 했던가.
“과도에 함부로 손대면 안 됩니다. 그러면 환자분이 더 위험해져요.”
순간 형석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일까.
방금 환청으로 들었던 목소리와 준후의 목소리가 똑같은 것 같은 기분은.
에이. 설마.
환청이겠지?
* * *
다행히도 준후는 제때 나서서 보호자의 돌발 행동을 막아냈다.
비법은 바로 전음에 있었다.
전음.
이것은 내공을 활용해 상대에게 은밀히 목소리를 전달하는 수법이었다.
현대로 치면 텔레파시와 비슷한 무공이었다.
거리와 장해물 때문에 직접 보호자를 제지할 수 없고.
또 사자후는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할 위험이 있었기에.
준후는 전음을 선택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준후의 선택은 옳았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으며.
보호자의 행동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있었다.
“원래 칼이 몸에 꽂혀 있으면 빼야 하는 것 아닙니까?”
형석이 준후에게 물었다.
“칼을 뽑으면 출혈이 심해집니다. 칼을 뽑는 과정에서 혈관이 다칠 수도 있고요.”
“영화나 드라마에선 잘만 뽑던데…….”
“그건 극이라서 연출된 장면일 뿐입니다. 현실에서는 절대 그러면 안 됩니다.”
준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보호자 때문에 큰 사고가 터질 뻔했지만 준후는 딱히 보호자를 미워하지 않았다.
사람마다 갖추고 있는 의학 지식은 천차만별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상식인 사실이.
누군가에는 비상식이었고.
누군가가 알고 있는 것을, 다른 누군가는 모를 수도 있었다.
“친구분을 돕고 싶은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앞으로는 행동하기 전에 병원 스태프에게 물어봐 주세요.”
“…….”
“전문가는 저희입니다.”
“아. 네. 죄송합니다. 선생님.”
형석이 고개 숙이며 사과했다.
“근데 수술은 금방 받을 수 있습니까?”
“지금 알아보는 중입니…….”
준후 말문을 마치기도 전에 콜폰이 울렸다.
번호를 확인하니 당직실이었다.
“네. 선배.”
-수술방하고 마취과 선생님은 예약 잡았는데 우리 과는 정규 스케줄이 꽉 차서 당장 수술에 들어갈 수 있는 교수님이 없어.
미호의 말에 준후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한단 말인가.
수술 스케줄을 대체 얼마나 안 잡아봤길래 이 정도 교통정리를 못 한단 말인가.
“그럼 외상 외과 연락해서 스케줄 잡으세요. 외상 외과도 수술 가능해요.”
-아…… 그걸 깜빡했네. 알았어.
통화를 끝난 후 준후는 형석을 바라보았다.
“수술방 잡혔다고 합니다. 일단 같이 올라가시죠.”
* * *
-1층입니다.
건조한 엘리베이터 안내 음성이 들렸다.
준후는 환자가 누운 침상을 밀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보호자가 따랐다.
준후의 불안한 시선은 아까부터 환자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혹시라도 환자에게 심정지가 올까 봐 조마조마했던 것이다.
“선생님. 수술만 받으면 진수, 살 수 있겠죠?”
보호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장담은 할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죽마고우란 새끼가 어쩜 그럴 수가 있는지.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보호자가 빠드득 이를 갈았다.
보호자의 말에 따르면.
과도를 사용한 가해자는 놀랍게도 환자와 막역한 사이라고 했다.
사람은 나쁘지 않았는데.
몇 년 전부터 노름 도박에 빠지더니 성격이 변했다고 한다.
그리고 급기야 오늘.
환자가 빌린 돈을 돌려달라고 했더니 가해자는 오히려 돈을 더 빌려달라며 큰소리를 쳤고.
딱 한 번만 따면 빚을 다 갚을 수 있다며 호언장담했다고 한다.
이에 환자는 가해자를 한심하다며 꾸짖었고.
가해자는 격분한 나머지.
과도로 환자를 무자비하게 찔러댔다고 한다.
“혹시 가해자는 어떻게 됐습니까? 경찰에 잡혔나요?”
“아니요. 난동을 부리고 사라졌습니다. 돈도 없는 놈이니 조만간 잡히겠죠.”
“보호자분께서도 많이 놀라셨을 것 같습니다.”
준후는 보호자를 달랬다.
눈앞에서 친구가 끔찍한 칼부림을 당하지 않았던가.
보호자의 충격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다.
무림에서 준후도 그랬다.
아버지가 적일도의 손에 쓰러지고 동료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갈 때마다 가슴이 찢어졌다.
“잘 모르겠네요. 아직 현실감이 안 느껴져서.”
“…….”
“저는 그저 그 미친놈이 경찰에 붙잡히고 진수가 무사하길 바랄 뿐입니다.”
“…….”
“진수랑 알고 지낸 지 몇 년밖에 안 됐지만 참 착실한 친구입니다.”
“…….”
“저랑 같은 시장에서 국밥집을 운영하는데 하루도 빠짐없이 장사를 했다고요.”
“…….”
“돈 모아서 나중에 장가갈 아들내미한테 보태주는 것만 생각하던 바보 같은 녀석이에요.”
보호자의 목소리가 어느새 촉촉해졌다.
억울하게 사경을 헤매는 친구를 보고 있자니 울컥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보호자에게 사연을 듣기 전부터 준후는 이미 환자에게 잔뜩 감정이입을 한 상태였다.
환자를 보고 있자니.
무림에서 검상(劍傷, 검으로 난 상처)으로 세상을 떠난, 많은 동료가 생각났기에.
비록 그때는 한없이 무기력했지만 지금의 준후는 그때와 달랐다.
준후는 현대 의학이라는 막강한 무기를 갖추고 있었다.
“보호자분. 아까 했던 말은 취소해도 될까요?”
“무슨 말이죠?”
“환자의 생명은 장담할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씀드렸는데요.”
“네. 그렇게 말씀하셨죠.”
“환자분 반드시 살려내겠습니다. 제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준후의 목소리는 비장했다.
환자의 생명을 장담할 수 없다고 했던 말이 일종의 빠져나갈 구멍을 만드는 것처럼 비겁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물론 의사라고 해서 환자를 백 퍼센트 살린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준후는 환자의 생명을 장담할 수 없다는 말 속에 담긴 말의 뉘앙스와 사고방식이 문득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환자는 무조건 살린다.
저승사자가 찾아온다면.
엉덩이라도 걷어차서 내쫓겠다는 마음가짐을 굳혔다.
그런 마음가짐을 갖춰야만 환자를 살려낼 수 있을 테니까.
그 어떤 고난이 닥쳐도 환자를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포기와 무기력.
이는 준후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준후가 끊임없이 성장하도록 내모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진수를 잘 부탁합니다.”
보호자가 소매로 눈시울을 훔치며 말했다.
준후도 순간 감정이 북받쳤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감정 표현은 수술이 끝났을 때.
환자를 무사히 회복시켰을 때 기쁜 마음으로 하고 싶었다.
-5층입니다.
보호자와 대화하며 도착한 5층.
준후는 보법까지 밟아가며 복도를 질주했다.
수술실 앞에는 이미 4년 차 치프 재석이 대기 중이었다.
아마도 퍼스트(제1보조)를 재석이 맡을 모양인 듯했다.
“빨리도 왔네. 내가 수술 동의서 받을 테니까 넌 수술방에 들어가. 네가 세컨드다.”
“네. 치프.”
수술실에 입장한 준후는 갱의실로 이동했다.
벅. 벅. 벅.
포비돈 용액이 묻은 솔로 손가락과 손톱, 팔뚝을 벅벅 문질렀다.
수술 가운을 걸치고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장갑, 마스크 등도 착용했다.
위이이잉.
천장에서 쏟아지는 소독 가스를 뒤집어쓰고 도착한 수술방.
준후는 눈부신 속도로 수술 세팅을 했다.
필요한 처치 물품을 드레싱 카트에 싣고 수술대에 올려놓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5분이었다.
인턴 근무 3개월 차.
이제 수술방은 준후의 안방이나 다름없을 만큼 익숙한 곳이 됐다.
곧이어 환자와 재석이 수술방에 도착했다. 마취의도 금방 그 뒤를 따랐다.
환자 감시 장치 연결.
중심 정맥관 연결.
전신 마취 등등의 과정이 매끄럽게 이어졌다.
“하늘이 돕고 있나 보네. 생각보다 상태가 나쁘지 않은걸?”
재석이 환자 감시 장치를 모니터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환자의 외상을 감안하면.
활력 징후와 심전도는 의외로 안정적이었다.
여기서 안정적이란 말은 환자의 상태가 좋다는 뜻은 아니고 악화 속도가 완만하다는 뜻이었다.
그야 당연하죠.
제가 미리 지혈 점혈법을 써뒀으니까.
재석의 말을 듣고 준후는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준후가 지혈 점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환자는 더욱 위독했을 것이다.
복강은 이미 혈액으로 가득 찼으리라.
지혈 점혈은 그 자체로 해결책이 되지는 않았지만 외과의에게는 황금 같은 시간을 벌어주는 효자였다.
“수술 준비 끝났어?”
때마침 집도의가 수술방으로 들어왔다.
집도의의 이름은 이영환.
준후가 수술방에 올라오면서 미호와 통화한 바에 따르면.
소화기 외과 레지던트 출신의 외상 외과 2년 차 펠로우였다.
“네. 선배만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거 만만치 않겠네. 너희 둘 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
영환이 수술대에 옆에 서서 환자를 살피더니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쪽은 인턴이지? 수술 준비부터 해볼래?”
“네. 선생님.”
준후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당장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준후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