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104화
제18장 임계점(4)
통화를 끊고 준후는 수술대로 돌아갔다.
전화를 받으러 갈 때와 달리 발걸음이 무거웠다.
“야, 너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그게…… 좀 곤란한 일이 생겼습니다.”
준후가 힘겹게 운을 뗐다.
방금 간호사에게 들은 이야기를 요약해서 전해주었다.
공사장에서 안전 발판 붕괴로 추락한 인부 4명이 동시에 응급실로 들어왔다.
그런데 외과 일손이 달려서 영환이 복부 자상 환자 수술을 마치고 빨리 다른 수술에 들어갈 수 있냐고 물었던 것이다.
“골치 아프게 됐네. 아직 수술이 끝난 건 아닌데.”
영환이 미간을 찌푸리며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현재 수술 진척도는 80퍼센트.
나머지 20퍼센트가 그리 어려운 단계는 아니지만 재석과 준후만으로 감당하기 벅차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뒤는 저희한테 맡기고 가세요. 선배.”
“나도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괜찮겠어?”
“안 괜찮으면 괜찮게 만들어야죠. 애초에 저희 과 수술을 도와주러 오셨는데 더 붙잡을 수도 없고.”
“중간에 수술방을 나간다고 해도 집도의는 여전히 나야.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영환이 불안함을 내비쳤다.
재석과 준후만으로 진행되는 수술에 문제가 생긴다고 해도.
결국 책임은 본인이 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럼 너희 둘을 믿어본다. 제발 날 실망시키지 마.”
“선생님. 저 드릴 말씀이 있다고 했습니다만…….”
준후가 모처럼 대화에 껴들었다.
영환을 이대로 보내면 안 되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미안한데 재석이한테 이야기할래? 재석이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거야.”
다른 수술이 마음에 걸렸는지 영환은 황급히 수술방을 떠나 버렸다.
일이 꼬이려면 이렇게도 꼬이는구나.
준후는 낙심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꼬인 상황이나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것 또한 외과의의 중요한 덕목이었다.
간절히 돌파구를 찾다 보면.
반드시 돌파구를 발견하게 되리라.
“치프. 소독 간호사 한 분 더 콜 하겠습니다. 정규 수술 스케줄도 꽉 찼고 응급환자도 들어와서 인턴 어시스트는 추가하기 힘드니까요.”
“그래야지. 근데 너, 갑자기 기합이 팍 들어간 느낌이다?”
“영환 선생님이 믿어주셨는데 그만한 결과를 보여드리고 싶어서요.”
“오케이. 일단 자리부터 바꾸자.”
영환이 집도의 자리로 이동하고.
준후가 영환이 서 있던 자리로 이동했다.
두 사람의 양옆에는 각각 소독 간호사가 붙었다.
2차전이 시작되기 전.
준후는 맞은편에 선 재석을 응시했다.
지금 준후가 선 자리는 인턴이 결코 설 수 없는 자리였다.
집도의 맞은편.
그러니까 퍼스트 어시스트는 보통 레지던트 2년 차는 되어야 설 수 있는 자리였으니까.
하지만 준후는 전혀 부담감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는 사실에 들떴다.
제대로 보여주겠어.
그동안 내가 갈고닦은 실력을.
* * *
준후의 어시스트는 빈틈이 없었다.
무림에서 준후의 별호는 무결검이었는데.
결점이 없을 만큼 검술이 탄탄하다는 의미에서 주변 사람들이 붙여준 것이었다.
무결검의 면모는 현대의 수술방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시야 확보 및 오염 방지를 위한 이리게이션(세척).
집도의 봉합을 원활하게 돕기 위한 홀딩.
출혈 부위의 썩션과 지혈 등등.
준후는 물심양면으로 재석을 도왔고.
준후의 도움으로 재석은 한결 편하게 집도를 이어나갔다.
순조로운 수술.
마지막 남은 장기인 간에 대한 복구마저 착착 이뤄지고 있었다.
출혈을 일으켰던 혈관들이 차례차례 정복되었고.
과도에 찢겨 너덜거리던 간 우엽의 하단 부분도 단단하게 봉합되었다.
찰칵!
경쾌한 가위질 소리.
간을 봉합한 마지막 매듭이 준후의 손길에 잘려나갔다.
“덕분에 한숨 돌렸네. 고생 많았다. 준후야.”
재석이 허리를 펴며 후련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복막과 복부 절개창을 다시 꿰매주는 일만 남았다.
이번 수술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라면 당연히 준후였다.
준후의 어시스트는 결코 인턴답지 않았다.
집중력은 단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수술 과정을 넓게 아울렀으며.
왼손과 오른손에 통달한 손놀림은 재치가 넘쳤다.
“저. 치프. 수술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갑자기 뭔 소리야?”
“아까부터 비장을 살펴보고 있었는데요. 아무래도 비장이 심상치 않습니다.”
준후의 시선을 따라 재석도 비장을 내려다보았다.
비장은 위의 뒤쪽에 빼꼼 숨어 있었다. 본래 모습의 3분의 1만 드러내고 있었다.
“비장은 이번 수술과 아무런 상관없어. 과도에 찔린 것도 아니잖아.”
재석은 준후의 지적을 일축했다.
준후가 괜한 걱정을 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수술 초반에 출혈이 심했잖아요. 출혈이 심하면 비장 기능이 항진되면서 비대증이 나타날 수도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말을 마친 준후가 포셉으로 비장을 가리고 있던 위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제야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는 비장.
준후의 말을 들은 직후라서일까.
정말 비장이 비대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재석이었다.
“으음…… 듣고 보니 정말 조금 부풀어 오른 것 같기도 하네. 비장은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데?”
“40분 정도 됐습니다. 제 계산으로는 처음 크기에서 대략 1.7배 정도 커졌어요.”
준후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어시스트 하느라 바빴을 텐데 그걸 다 계산하고 있었어?”
“네. 아까 영환 선생님께 말씀드리려고 했던 것도 이 부분이었고요.”
준후의 관찰력은 놀라웠다.
사실 재석은 비장에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비장은 애초에 자상 부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준후는 달랐다.
수술 부위가 아닌 비장까지 예의주시했을뿐더러 비장의 변화까지 면밀하게 관측하고 있었다.
영환 선배도 비장 이야기는 안 하고 갔는데.
그럼 영환 선배도 못 본 걸 보고 있었다는 거잖아?
이쯤 되면 준후의 관찰력과 집중력은 초인 수준인 듯했다.
“찜찜하니까 확인은 해두는 게 좋겠다. 선생님. 환자 채혈해서 랩으로 보내주세요.”
“네.”
재석의 지시를 받은 간호사가 채혈을 한 뒤 샘플을 수술방 바깥으로 보냈다.
15분 후 나온 혈액검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적혈구와 백혈구, 혈소판 수치가 정상보다 한참 아래였다.
환자는 중증에 가까운 비장 비대증을 앓고 있었다.
준후의 눈썰미는 정확했고.
준후의 진단은 검사 결과보다 한발 빨랐다.
* * *
“하마터면 비대해진 비장을 두고 수술을 끝낼 뻔했네. 준후 너, 눈치가 100단이다?”
“그냥 운 좋게 얻어걸린 거죠.”
겸손하게 말했지만 준후의 등 뒤에는 엄청난 노력이 숨어 있었다.
어시스트를 하는 내내.
집중력을 쪼개서 사용하는 만화공을 펼쳤고.
또 시야를 증폭시키는 맹조공까지 사용했던 것이다.
-아까 환자의 생명은 장담할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씀드렸는데요.
-네. 그렇게 말씀하셨죠.
-환자분 반드시 살려내겠습니다. 제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수술방에 입장하기 전.
보호자와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준후는 집념을 불태웠다.
그래서 수술 중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펼쳤다.
그 결과가 비장 비대증을 발견하는 데까지 이른 비결이었다.
“치프. 비장 절제술 가능하신가요?”
준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물론 가능해. 열 번도 넘게 해봤다. 익숙해지면 그리 어렵지 않아. 20-30분 정도면 끝날 거야.”
“든든하네요. 치프.”
“그럼 나만 믿으라고. 10번 블레이드. 아아악!”
쨍그랑!
재석의 비명이 먼저 터지고.
그 뒤를 메스 추락하는 소리가 뒤쫓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참사에 준후는 눈만 깜빡거렸다.
이게 대체…….
“죄…… 죄송해요. 선생님.”
“제정신이에요? 지금 무슨 짓을…….”
재석을 돕던 소독 간호사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재석은 왼손으로 오른손 검지를 부여잡고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소독 간호사가 재석에게 메스를 건넸는데.
하필 실수로 날이 재석을 향하게 했던 것이다.
재석은 그것도 모르고 덥석 메스를 받다가 메스에 손가락이 베이고 말았고.
“아니! 이런 기초적인 걸 깜빡하면 어떻게 합니까? 지금 수술 망치려고 작정했어요!”
“정말 죄송해요. 제가 너무 긴장했나 봐요.”
“아니, 신규인 것도 이해하고 긴장한 것도 이해하는데.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잖아요. 하…… 씨…….”
재석이 버럭 신경질을 냈다.
수술방 분위기는 당장 폭발할 것처럼 위태롭고 흉흉해졌다.
비장 절제술이 가능한 재석이 손가락을 다쳤다?
이 자리에서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선배 괜찮으세요?”
준후는 황급히 자리를 벗어나 재석의 손가락을 살폈다.
하필이면 중지와 검지에 각각 1센티미터 너비의 창상(베인 상처)이 생겼다.
수술 장갑은 찢어졌고.
장갑 틈으로 붉은 핏방울이 맺혔다.
일상적인 상황이라면 그나마 대수롭지 않게 넘겼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이곳은 수술방이고 재석은 집도의였다.
“하…… 비장 절제술 못하겠는데? 손이 너무 따끔거려.”
재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너처럼 양손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일단 치료부터 받으세요.”
준후는 재석의 장갑부터 벗겼다.
손가락 상처를 소독한 후.
그 위에 붕대를 감고 반창고로 고정했다.
가벼운 상처라서 처치도 가벼웠다.
문제는 이 이후의 상황이었지만 말이다.
재석의 부상 이후.
수술방 분위기는 그야말로 초상집이었다.
실수를 한 소독 간호사를 어쩔 줄 몰랐고 재석은 화가 잔뜩 나서 씩씩거렸고.
그런 재석의 눈치를 보느라 다른 스태프들은 말문을 잃어버렸다.
“제가 다른 집도의 알아볼 테니까 선배는 복귀해서 쉬세요.”
“수술하던 영환 선배까지 다른 수술방에 불려갔어. 일손이 그렇게 부족한데 누가 날 대신 해?”
“그래도 그 손으로 집도를 할 순 없잖아요.”
준후는 재석이 무리하는 걸 원치 않았다.
제아무리 작은 부상이라도.
중요하고 위급한 일에는 큰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었다.
재석이 비장을 절제하다가 통증을 느끼고 메스를 잘못 놀린다면?
끔찍한 참사가 벌어질 게 분명했다.
“지금 당장 집도의를 불러올 순 없겠죠. 그래도 1시간 내로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럼 1시간 동안 환자를 방치하자고?”
재석이 따져 물었다.
“비장 비대증이 없었다면 1시간 정도는 수술이 지연돼도 괜찮았겠지. 하지만 비장 비대증을 발견한 이상 그건 안 돼.”
“…….”
“수술을 최대한 빨리 이어가야 한단 말이지.”
말을 마친 재석이 준후를 빤히 쳐다보았다.
“비장 절제술, 네가 해라.”
“제가요?”
재석의 파격적인 결정에 준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비장 절제술에 대한 의학 지식을 갖춘 것도 아니고.
비장 절제술 어시스트를 참관한 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준후는 비장 절제술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런데 중요한 수술을 직접 맡으라고?
제아무리 준후라도 부담감을 떨치기 힘들었다.
“내가 지금까지 지켜본 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어. 내가 지시하는 대로만 따라 하면 돼.”
“약물로 시간을 벌 수는 없나요?”
준후의 질문에 재석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다른 방법은 없어. 있었으면 애초에 너한테 맡길 생각도 안 했어.”
“결국 제가 집도하는 게 최선이란 말씀이죠?”
“맞아.”
재석의 대답은 짧고 간결했다.
준후는 물끄러미 환자의 비장을 내려다보았다.
비장은 아까보다 더 비대해져 있었다. 공기가 잔뜩 들어간 풍선처럼 보이기도 했다.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전직 검객이 메스 사용하는 일을 마다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쩌면 오늘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활인검을 펼쳐볼 기회를 얻은 건지도 몰랐다.
그래.
다른 사람은 못해도 나라면 할 수 있어.
각오를 굳힌 준후의 눈동자가 의욕으로 불타올랐다. 급기야 지금 상황이 운명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비장 절제술, 제가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