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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105화 (105/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105화

제18장 임계점(5)

재석은 살면서 천재를 두 번 만나봤다.

초등학교 때 한 번 보고.

의대에 올라와서 한 번 더 봤다.

천재들의 공통점이라면 성취가 압도적이라는 점이었다.

천재들이 내놓는 성취를 보통 사람들은 쫓아갈 수가 없었다.

재석은 아직도 생생했다.

초등학교 때 반 친구가 암호 같았던 대학 수학 문제를 술술 풀어내던 모습이.

그때는 그게 대학 수학 문제라는 사실조차 몰랐지만.

재석이 봤을 때는 준후도 천재에 속했다.

준후는 배우지도 않은 처치들.

가르쳐주지도 않은 처지들을 혼자서 척척 해냈다.

애초에 인턴이 퍼스트를 선다는 일 자체가 말이 안 되지 않는가.

그래서인지 몰라도.

재석은 자신이 손가락을 다치고.

다른 집도의를 호출할 수 없는 응급한 상황에서. 한 명의 천재에게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다.

바로 준후에게 비장 절제술 집도를 맡기기로 한 것이다.

두려움과 불안함이 없다고 하면 당연히 거짓말이다.

혹시나 수술 도중 준후가 문제를 일으킨다면 자신이 모든 책임을 져야 할 테니까.

영환의 낯을 볼 면목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말이다.

두렵다고 위독한 환자를 방치할 수는 없었다.

참된 의사는 자신의 안위가 아닌 환자의 안위를 보존하는 사람이어야 했다.

“선생님. 정말 괜찮을까요? 너무 모험을 하시는 것 같은데요.”

마취의가 우려를 표했다.

대화에 껴들지는 않았지만 소독 간호사들도 같은 의견인 듯했다.

인턴인 준후에게 막중한 수술을 맡긴다는 사실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차라리 상처가 지혈되고 통증이 가셨을 때, 그때 선생님이 직접 집도하는 건 어떨까요?”

마취의가 제3의 의견을 제시했다.

“손가락을 움직여봤는데 잠깐 쉰다고 나아질 것 같지 않아요.”

재석이 손가락을 움직여보곤 미간을 찌푸렸다.

“이 상태면 애꿎은 혈관이나 신경을 건드리기 딱 좋습니다. 완전 파멸이죠.”

“그래도 이런 케이스는 본 적이 없는데. 역시 다른 집도의를 기다리는 편이…….”

“애석하지만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닙니다. 누가 언제 도우러 올지 장담할 수 없잖아요?”

“…….”

“제 판단이 못 미덥다는 건 알지만 눈 딱 감고 따라주시죠.”

재석은 자신의 결정을 믿었다.

그렇다면 의심하지 않고 앞으로 곧게 나아가는 것이 정답이었다.

“준후야. 긴장되냐?”

재석의 시선이 준후를 향했다.

준후는 아까부터 한마디도 없이 비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요. 어떻게 집도할지 생각 중이었습니다.”

준후의 대답은 담담했다.

본인이 맡은 막중한 책임감도.

주변에서 쏟아지는 우려에도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재석이 기대하던 모습이었다.

“일단 자리부터 바꾸자.”

“네.”

재석이 집도의 자리에서 물러나 퍼스트 자리로 이동했고 준후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집도의가 레지던트에서 인턴으로 바뀌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너무 겁먹을 필요 없어. 비장 절제술을 조금 업그레이드된 충수돌기 절제술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 거다.”

“네. 치프.”

재석은 비장 절제술의 개요를 준후에게 간략하게 전달했다.

* * *

수술 준비는 끝났다.

재석에게 들은 수술 요령은 뼛속에 새겼고.

손은 충분히 풀렸으며.

비장의 해부학적 지식도 되새김질해놓았다.

무림에서 검객으로 20여 년을 살아봤던 덕분일까.

준후는 집도에 거부감이나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상황이 위급하다고 해서 초조하지도 않았다.

감정이 흔들리기에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순간들을 너무 많이 경험해 본 준후였다.

“지금부터 비장 절제술을 시작하겠습니다. 10번 블레이드.”

준후는 소독 간호사가 건넨 메스를 손에 쥐었다.

시선이 비장과 연결된 동맥 혈관에 머물렀다.

혈관 위쪽에는 출혈을 막기 위한 혈관 겸자가 잠겨져 있었다

휘이이익.

서걱.

준후는 단 한 번의 손짓으로 동맥을 잘라냈다.

서씨세가 청운검법의 제2초식인 화풍감우의 이치를 담아서.

스태프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준후의 메스가 그린 곡선은 무지개처럼 유려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야.

메스로도 무림에서 배운 검법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어.

준후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실수도, 실패도 없을 거라는 자신감이 샘솟았다.

“와, 한 번에 잘랐네. 절단면도 깔끔하고.”

치이이익.

잘린 혈관을 보비(전기 소작기)로 지지면서 재석이 감탄했다.

재석은 다친 오른손으로 준후를 보조하고 있었다. 간단한 처치는 오른손으로 어느 정도 감당할 만했다.

“지금처럼만 해. 위나 간과 연결된 신경과 혈관은 건드리지 말고.”

“네. 치프.”

준후의 손속은 거침이 없었다.

서걱.

서걱.

서걱.

두 번은 없었다.

준후는 메스를 단 한 번만 휘둘러 비장의 혈관들을 잘라냈다.

메스가 혈관을 빗나가는 일 따위는 없었다.

애꿎은 신경과 혈관을 건드리는 일도 없었다.

무림에서 무결검이라는 별호를 얻었던 준후 아니던가.

메스를 손에 쥔 준후는 무림에서의 별호가 아깝지 않은 활약을 펼쳤다.

“…….”

“…….”

어느새 고요해진 수술방.

모든 스태프는 준후의 집도에 흠뻑 빠져 버렸다.

이제는 그 누구도 준후가 집도한다는 사실에 토를 달지 않았다.

걱정을 표하지도 않았다.

준후는 응당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렇게 비장 절제술을 시작한 지 10분 만에 비장과 연결된 동맥 혈관들은 모두 제거되었다.

제거해야 할 마지막 대상은.

복강과 비장을 연결하고 있는 비장 인대뿐이었다.

비장 인대는 누런색이었으며 두텁고 끈끈해 보였다.

“인대는 메스보다 보비로 제거하는 게 나을 텐데?”

재석이 모처럼 준후에게 훈수를 두었다.

“메스를 쓰면 톱질하듯이 썰어야 해. 시간도 오래 걸리고 힘도 더 들고. 장간막에 손상을 줄 수도 있어.”

“저는 메스가 더 빠를 것 같습니다. 제대로 사용만 할 수 있으면.”

“쓰읍…… 일단 한 번만 시도해 보고 안 되면 곧장 보비 써. 괜한 고집 부리지 말고.”

“네. 치프.”

재석의 조언에도 준후는 메스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준후는 검의 달인이었다.

검을 사용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자신이 있었다.

효풍잔월(曉風殘月).

준후가 메스를 가로로 휘둘렀다.

주변 장기에 손상을 줄 위험이 있어서 메스의 동선이 짧았지만.

메스에 충분한 힘을 싣기 부족했지만.

준후는 그 부분을 내공으로 충당했다.

번쩍!

준후의 메스가 그리는 궤적은 짧고 강렬했다.

두꺼운 비장 인대는 단번에 잘려나갔다.

인대의 절단면은 더 손을 볼 필요도 없이 깔끔했다.

툭!

인대가 잘리자 힘없이 축 늘어지는 비장.

준후는 복부에서 떨어진 비장을 곡반에 담았다.

그리고 그런 준후를 지켜보던 재석의 한 마디.

“어휴. 내가 졌다. 졌어.”

* * *

5층 휴게실.

준후는 재석과 캔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비장 절제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환자는 중환자실에서 무사히 회복 중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집도의 마지막 매듭을 지었다는 사실.

메스에 무공을 접목했다는 사실.

보호자와의 약속을 지켰다는 사실.

그 모든 것이 준후는 뿌듯했다.

준후가 외과의를 꿈꿨던 것은 분명 이런 충만함을 맛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또한 역설적으로 현대에 와서야.

활인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있는 준후였다.

“선배 절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가 아니었으면 아직도 수술방에서 다른 집도의를 기다리고 있었을 거예요.”

준후는 재석에게 공을 돌렸다.

집도를 한 건 자신이었지만 그 길을 열어준 건 재석이었다.

재석이 격려하지 않았다면.

준후조차 비장 절제술을 직접 할 생각은 못 했을 것이다.

“믿을 만하니까 믿은 거지. 내가 원래 사람 보는 눈이 좀 있거든.”

재석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네 실력은 기대 이상이었다. 괴물 같은 놈. 어떻게 절제술하는데 메스만 쓰냐?”

“…….”

“교수님들도 너처럼은 안 해.”

재석이 질렸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상하게 메스가 좋더라고요. 뭔가를 베어내고 감촉으로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잘 쓸 수만 있으면 메스가 좋긴 하지.”

수술 뒤풀이는 10분 정도 이어졌다.

수술이 성공했으므로 대화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고생했고 이따 보자.”

“네. 치프도 고생하셨습니다.”

“아 참. 그리고 오늘 네가 집도한 건 비밀로 해. 다른 스태프들은 내가 잘 입단속 시킬 테니까.”

“알겠습니다.”

재석이 먼저 휴게실을 떠나고.

준후는 영양제를 섭취한 후 10분 정도 운기 조식을 했다.

긴 수술로 지친 체력과 정신력을 보충하는 데는 그 짧은 시간이면 충분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영양제와 운기조식 조합은 사기였다.

활기를 잃은 육체.

날카로움을 잃은 집중력.

이 두 가지가 단번에 회복되었다.

다른 인턴들과 달리 준후는 피로를 모르고 살았다.

휴게실을 벗어난 준후는 소화기 외과 병동 대신 심장내과 병동을 찾았다.

“선배. 몸은 좀 어떠세요?”

한 병실로 들어간 준후가 환자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환자의 이름은 김대진.

소화기 외과 1년 차 레지던트이자 어제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선배였다.

“지금은 괜찮아. 주치의도 호전 중이라고 하고.”

대진이 준후를 올려다보며 말을 계속했다.

“한창 바쁠 시간일 텐데 날 보러 와준 거야?”

“네. 선배 심심할까 봐요.”

“아까 상혁 선배한테 이야기 다 들었다. 네가 내 업무를 대신 맡고 있다고. 고맙고 미안하다.”

“저 말고 선배 회복이나 집중하세요. 기왕 이렇게 된 거 다 잊고 푹 쉬셔야죠.”

대진을 내려다보는 준후의 눈빛에 안쓰러움이 묻어났다.

과로로 심정지가 올 정도면.

대진은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한편으로 이 사단의 원흉인 미호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선배. 제가 어제 말씀드린 건 생각해 봤어요?”

“아. 그거?”

대진이 볼을 긁적거리며 한참 머뭇거렸다.

“힘들지만 해볼게. 이젠 나도 정신 차릴 때가 됐으니까.”

“잘 생각하셨어요. 처음에만 힘들지 몇 번 하다 보면 익숙해질 겁니다.”

준후는 대진과 10분 정도 대화를 나눴다.

사실 말을 하기보다는 들어주는 쪽에 가까웠지만.

혼자 병실에 있으면서 대진은 그동안 본인의 행동들을 반성하고 성찰한 듯 보였다.

의국에 복귀할 때쯤이면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으리라.

대진과의 대화를 마치고 준후는 병실을 빠져나왔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 * *

대진이 없는 사흘이 미호에게는 지옥이었다.

선배들은 인턴인 준후와 미호의 업무 능력을 비교하면서 미호에게 면박을 주었다.

-야, 넌 어떻게 인턴보다 일을 못하냐? 명찰 떼라. 떼.

-3개월 동안 뭘 배웠어? 처치면 처치, 차팅이면 차팅. 둘 중 하나는 똑 부러지게 해야 할 거 아니야.

선배들의 면박과 핀잔이 가시처럼 미호의 가슴에 박혔다.

에이스 취급을 받던 자신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다니…….

이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 미호는 지지 않고 항변했다.

자신의 업무 능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고 변명만 했다.

요즘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래요.

몸만 좋아지면 얼마든지 예전처럼 잘할 수 있어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미호는 그저 대진이 복귀하기를 손꼽아 기다렸을 뿐이었다.

대진만 복귀한다면.

대진에게 자신의 업무를 떠넘길 수만 있다면.

잃어버렸던 평판과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운명의 그 날이 왔다.

심장내과에서 짧은 입원 생활을 마치고.

대진이 나흘 만에 돌아왔다.

미호는 당직실에서 대진의 복귀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그동안 몸 고생, 마음고생이 많았다며 대진을 위로하기도 했다.

미호의 환대에 대진은 어쩔 줄 몰라 했다.

과로로 쓰러지고도 어리숙한 건 그대로였다.

이래서 내가 대진이 너를 못 버린단 말이지.

미호는 속으로 조소했다.

“대진아.”

“응. 왜?”

“방금 응급실 콜 받았는데 네가 가주면 안 될까? 나는 지금 중환자실 라운딩 가야 해서.”

“…….”

“미안. 복귀하자마자 이런 부탁이나 해서.”

미호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웬걸?

대진의 반응이 예전과 달랐다.

“싫어.”

“……싫다고?”

미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예스밖에 모르던 예스맨이 지금 거절을 하고 있는 거야?

말도 안 돼!

이대로 물러서기는 자존심이 상했기에 미호는 한마디 보탰다.

“네가 없는 동안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고작 응급실 한 번 못 가주는 거야? 조금 실망이다.”

미호는 은근히 대진의 죄책감을 유도했다.

하지만 대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야, 주미호. 네가 가라. 응급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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