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106화
제19장 대회(1)
드르르륵.
당직실에 돌아온 대진은 왼쪽 가슴에 손을 얹었다.
쿵. 쿵. 쿵.
심장이 거칠게 요동쳤다.
채 가시지 않은 흥분감에 팔이 희미하게 떨렸다.
심정지의 신호는 아니었다.
미호의 부탁을 처음 거절한 데 따라오는 후유증 같은 것이었다.
착한 아이 증후군에 걸린 내가 거절을 할 수 있을까.
비커 속의 개구리인 내가 거절을 할 수 있을까.
대진은 스스로를 계속 의심했다.
그래서 미호가 응급실을 대신 가달라고 부탁했을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또 어쩔 수 없이 부탁을 들어주겠구나, 하고 좌절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지난 며칠간 꾸준히 병문안을 와준 준후의 조언들이 떠올랐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조언은 화불위인견.
-꽃은 사람을 위해 피어나지 않는다.
대진은 누군가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대진은 스스로의 꿈과 행복을 찾기 위해 태어났다.
꽃이 사람을 위해 피어나지 않는 것처럼.
그 말을 마음속으로 되새기니.
조금 용기가 샘솟았다.
미호에게 저항할 힘이 생겨났다.
그 결과 평생 못할 줄 알았던 거절에 성공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지극히 사소한 행동이었지만 대진 스스로에게는 역사적인 행동을 해낸 것이다.
“선배. 진짜 멋있던데요? 네가 가라 응급실, 뭐예요?”
어느새 당직실로 들어온 준후가 방긋 웃으며 대진에게 물었다.
“쪽팔리게. 설마 다 보고 있었어?”
“정확히 말하면 근처에서 듣고 있었죠.”
준후가 대진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안타깝게도 준후는 대진의 활약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두 사람이 대화 중인 것을 멀리서 확인하고.
내공으로 청각을 증폭시켜 대화만 엿들었다.
“뭔가 멋있게 거절하고 싶었는데 갑자기 영화 대사가 떠오르더라고. 그래서 질러 버렸지.”
“잘하셨어요. 제가 다 통쾌했거든요.”
“나도 후련하긴 해.”
대진이 가슴에 얹었던 손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떨림과 흥분은 이제 멈추었다.
뒤늦게 밀려오는 성취감에 뿌듯했다.
“고맙다. 준후야. 네 덕분에 내가 정신을 차리게 됐으니까. 이젠 거절을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원래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부터는 쉬운 법이죠. 근데 딱 한 가지가 아쉽네요.”
“뭐가?”
“선배가 거절했을 때 미호 선배의 똥 씹은 표정을 봤어야 하는 건데 말이죠.”
준후의 농담에 대진이 킬킬 웃었다.
“근데 난 앞으로 미호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거야?”
대진이 화제를 돌렸다.
인생 처음으로 거절다운 거절을 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앞으로도 미호의 부탁을 계속 거절만 해야 하는지 궁금했다.
“앞으로는 구별을 하셔야죠.”
“구별?”
“네. 구별이요. 거절해야 할 부탁과 들어줘야 할 부탁을 구별할 줄 아셔야 해요.”
준후는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남의 부탁을 무조건 거절하는 게 만병통치약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생활이란 근본적으로 직장 동료와 감정과 생각, 일을 끊임없이 주고받는 것이었기에.
동료나 후배, 상사의 부탁을 거절만 한다면 고립된 섬이 되어버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 사람이 정말 곤란한 상황인지, 아닌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게 요령이죠. 말로 설명하기 힘든.”
“으음…… 어렵네. 어려워.”
“선배는 잘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복귀 기념 마사지해드릴까요?”
“싫어.”
“네?”
대진의 대쪽 같은 거절에 준후는 화들짝 놀랐다.
그런데 거절을 한 대진도 놀란 표정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람.
해설은 대진에게 들을 수 있었다.
“아. 미안. 항상 거절할 준비를 하고 있었더니 나도 모르게 싫다는 말이 튀어나왔네.”
대진이 머쓱하게 웃었고.
준후는 배를 움켜쥔 채 박장대소했다.
이젠 반대로 싫어증에 걸린 건가.
* * *
준후는 인턴 잡을 하면서 미호를 유심히 관찰했다.
대진이 복귀했음에도 일을 대신해 주지 않으니 미호는 극심한 고통을 받는 중이었다.
이제는 선배들에게 박살 나는 게 업무인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동네북이라는 별명을 지어줘도 아깝지 않은 수준이었다.
미호의 가식과 위선.
1년 차 에이스라는 거짓 착각을 까발리려고 했던 준후의 계획은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하지만 준후는 그런 미호에게 일말의 동정도 느끼지 않았다.
측은지심이란 자고로 정상인에게 느껴야 할 감정이었다.
죗값을 치르는 악인에게 느껴야 할 감정은 아니었다.
“서준후, 이거 다 네 짓이지. 날 엿 먹이려고 작정한 거지?”
오후 6시쯤 병동 복도에서 마주친 미호가 준후를 붙잡아 노골적으로 물었다.
미호는 단지 일을 못할 뿐.
영악한 두뇌의 소유자였다.
현 사태의 배후가 준후라는 것을 알아차렸으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할 건데요?”
준후가 가시 돋친 말투로 되물었다.
“……내가 잘못했어. 대진이가 과로사로 쓰러진 것도 나 때문이고. 선배들한테 네 험담을 한 것도 나야. 네가 일을 잘하니까 샘이 나서 그랬어.”
“…….”
“내가 잘못한 거 알았으니까. 이제 용서해 주라. 나도 너무 힘들어.”
뜻밖의 반응.
구미호처럼 표독스러웠던 평소의 미호는 온데간데없었다.
준후 앞에 있는 미호는 바람에 휘청거리는 연약한 꽃과 같았다.
갈굼을 하도 당했더니 유순해진 걸까.
“이제 대진 선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겠어요? 선배는 고작 나흘 힘들었지만 대진 선배는 3개월 동안 힘들었다고요.”
“응. 조금은 알 것 같아. 그러니까 용서해 주는 거지?”
“아니요. 용서 안 할 건데요?”
준후는 매몰차게 거절했다.
목소리는 한 겨울바람처럼 쌀쌀했다.
“준후야. 내가 이 정도 했으면 너도 나를 좀 이해해 줘야 하는 거 아니니?”
미호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변했다.
약간 화가 난 듯했다.
“내가 사과했잖아. 더 이상 뭘 어떻게 더 하라고?”
“슬슬 또 본색을 드러내죠?”
준후를 팔짱을 끼었다.
“내가 선배 같은 사람을 얼마나 많이 상대했는지 선배는 모를 겁니다.”
“…….”
“선배 같은 사람은 본인이 사과하면 모든 게 끝난 줄 알아요. 근데 그게 얼마나 이기적인 건 줄 아세요?”
“사과가 왜 이기적인데? 이기적인 사람은 사과도 안 해!”
미호도 앙칼지게 맞불을 놓았다.
느슨했던 대화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팽팽해졌다.
“사과는 말입니다. 하는 사람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받아주는 사람이 중요한 겁니다.”
“…….”
“본인 죄책감이나 괴로움을 피하려고 하는 사과는 사과가 아니에요. 받는 사람이 느낄 수 있을 만큼 진정성이 있어야 사과지.”
“참나. 얘 이야기하는 것 좀 봐?”
미호가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금세 평소의 표독스러운 미호로 돌아온 것이다.
“그럼 내가 삼보일배나 석고대죄라도 해야 하는 거니? 그래야 네 속이 후련하겠어?”
“과장하지 마세요. 내 말은 달랑 미안하다는 사과 한 번으로 본인의 죄를 씻으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준후는 따끔하게 미호를 꾸짖었다.
애초에 준후는 미호가 개과천선했을 거라고는 손톱만큼도 믿지 않았다.
미호가 갱생 가능한 인물이라면.
대진이 심정지로 쓰러지는 상황까지 가지도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어휴, 짜증 나. 진짜. 너 보기보다 속이 배배 꼬였구나?”
“내가 원래 당신 같은 부류한테는 천적이지.”
“뭐? 당신? 너 지금 선배보고 당신이라고 했어?”
“그래. 당신. 당신은 모르는 모양인데. 나한테 찍히고 다리 쭉 뻗고 잔 사람은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었어.”
준후는 싸늘한 표정으로 말을 계속했다.
“두고 봐. 진짜 힘든 게 뭔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줄 테니까.”
* * *
그 날 저녁.
드르르륵.
준후는 소화기 외과의 한 병실에서 처치를 하고 나오는 중이었다.
“진짜 답답하다. 답답해. 3개월 차에 아직 파라(복수 천자)도 못해서 되겠어?”
“…….”
“인턴이 하는 걸 레지던트가 못하면 어떻게 하냐? 차라리 네가 인턴 할래?”
“…….”
“이게 벌써 세 번째다. 응? 너 언제 정신 차릴 거냐고. 대답 안 해? 언제까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을 건데.”
등 뒤에서 상혁이 미호를 갈구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 상황은 이랬다.
상혁의 감독하에 미호가 파라를 2번 연속 실패했고.
때마침 복도를 지나가던 준후는 미호 대신 단번에 파라를 성공시켰다.
미호의 처치에 껴든 이유라면 간단했다.
미호의 무능력을 좀 더 부각하기 위해서였다.
상대가 악인이라면 처참할 정도로 짓밟는다.
이는 준후가 무림에서 세운 대원칙 중 하나였다.
정의를 구현하고 준후는 컨퍼런스 룸으로 들어갔다.
가운 주머니에 넣어둔 샌드위치와 커피를 꺼냈다.
늦은 저녁을 먹기 전.
준후는 뉴튜브 촬영 세팅부터 했다.
음식과 자신의 얼굴이 잘 드러나는 위치에 휴대폰 거치대를 세팅하고.
거치대에 휴대폰에 올려놓은 후 동영상 촬영 버튼을 눌렀다.
준후는 말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동영상은 준후가 식사하는 모습만을 담백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자막도 없고.
말도 없고.
자신의 심심한 동영상을 사람들이 왜 볼까 싶었지만 준후의 채널은 꾸준히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얼마 전 공부 영상 알고리즘에 탑승한 덕분이었다.
“뭐야? 나 빼놓고 밥 먹기?”
촬영 도중 당직실에 짝턴(짝궁 인턴) 유정이 난입했다.
유정은 준후를 향해 다가오다가 촬영 중인 것을 알고 슬그머니 앵글에서 빠졌다.
준후가 촬영을 마칠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
“촬영 끝. 이제 와도 돼.”
준후는 휴대폰을 회수했다.
동영상 촬영을 중단하고 거치대도 치웠다.
“준후 너도 참 바쁘게 산다. 인턴 일도 빡센데 뉴튜브 촬영까지 하고.”
유정이 질렸다는 표정으로 준후 맞은편에 앉았다.
유정은 준후가 뉴튜브 촬영한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생각보다 안 힘들어. 그냥 찍어서 올리기만 하면 돼. 편집도 아예 안 하거든.”
“그건 나도 알아. 네 채널 구독하고 영상도 몇 개 봤으니까. 근데 요새 좀 잘 나가더라?”
유정이 준후의 채널을 언급했다.
닥터 서튜브의 구독자는 3,000명.
동영상의 평균 조회수는 2,000에 달했다.
채널 개설 일자를 감안하면 가파른 상승세였다.
“이제 수익창출도 될 것 같은데? 맞지?”
“그렇긴 한데 아직 갈 길이 멀어. 지금 수준이면 한 달에 5만 원도 안 나올걸?”
“우리 준후 의외로 돈을 밝히는 타입이었구나. 이러다 뉴튜브 빵 터지면 의사 관두는 거 아니야?”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 말아 줄래?”
준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돈 때문에 뉴튜브를 시작한 건 맞았다.
하지만 그 돈은 자신을 위해 쓸 돈이 아니었다.
뉴튜브 수익금은 꾸준히 모아두었다가 가정 형편이 어려운 환자와 보호자를 도울 계획이었다.
병원에 사회 복지팀이 존재했지만 제대로 된 지원을 못 받는 이들이 넘쳐났으니까.
“멋지네. 참 의사야. 참 의사.”
준후의 설명을 듣고 유정이 박수까지 쳤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돈까지 없어 봐. 그게 얼마나 참담하고 끔찍한 기분인지 넌 모를 거야.”
“넌 알고?”
“난 알아.”
준후의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적일도의 습격으로 아버지와 서씨세가의 무인들 대다수가 목숨을 잃은 후.
서씨세가는 퇴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두창에 걸렸음에도, 물론 무림에서는 두창이라는 질병을 자세히 몰랐지만, 탕약과 침술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해 사경을 헤맸던 적이 있었다.
그때만 생각하면 준후는 아직도 치가 떨렸다.
“어쨌거나 내가 좋은 소스 하나 줄까?”
“무슨 소스?”
“네 채널, 떡상 시킬 소스.”
유정이 빙긋 웃으며 설명한 것은 쇼츠 영상이었다.
쇼츠 영상이란 말 그대로 5초에서 30초 정도 되는 지극히 짧은 영상이었다.
“나도 보긴 봤는데 그게 떡상이랑 무슨 상관이야? 수익도 거의 안 난다고 들었는데.”
준후가 의문을 제기했다.
“쇼츠로 유입된 구독자들이 네 영상을 보니까 그렇지.”
“그런가? 난 잘 모르겠는데. 쇼츠로 올릴 콘텐츠도 딱히 없고.”
“없긴 왜 없어? 요즘 유행하는 챌린지만 따라 해도 대박 칠걸?”
유정이 어느새 흥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 아직도 네가 의대 OT에서 장기자랑 했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나거든? 남자 아이돌 댄스 챌린지 같은 거 해도 좋고.”
“…….”
“아니면 트월킹이나 코카인 댄스 같은 거 따라 해도 좋고.”
유정이 다양한 쇼츠 영상을 보여주며 준후의 환심을 샀다.
채널만 떡상 할 수 있다면.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은 환자와 보호자면 도울 수 있다면.
물불 가릴 때가 아니지.
준후는 유정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해보지. 뭐.”
“암, 그렇게 나와야 서준후지. 말 나온 김에 당장 하나 찍어보자. 요즘 제일 핫한 걸로.”
유정이 인터스텔라라는 남자 아이돌 그룹의 타이틀곡인 천궁도 챌린지 영상을 보여주었다.
“어때? 따라 할 수 있겠어?”
유정이 물었고 준후는 싱겁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야 식은 죽 먹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