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109화 (109/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109화

제19장 대회(4)

다리를 접질린 성호는 후반전 내내 벤치를 지켰다.

그런 성호가 주목하고 있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준후였다.

골키퍼로 대활약을 했다만 과연 준후가 공격에서도 활약할 수 있을까.

의심과 의문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하지만 성호의 불안은 단 5분 만에 해소되었다.

불안은 삽시간에 감탄으로 바뀌었다. 준후가 5분 만에 단독으로 두 골이나 퍼부었던 것이다.

미쳤다.

준후의 축구 실력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그랬다.

수비수가 지천으로 깔린 상대 수비 지역을 준후는 송곳처럼 날카롭게 찌르고 들어갔다.

드리블이 현란하지는 않았지만.

치고 달리는 속도가 번개였다.

그 어떤 수비수도 준후를 막지 못했다.

사람도 아니고 번개를 어떻게 막겠는가.

준후의 활약은 비단 공격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특유의 스피드를 이용해 아군 수비 진형까지 내려와 수비에 가담했다.

그렇게 공격과 방어를 다 맡았음에도 피곤한 기색조차 없었다.

준후 덕분에.

팀은 골을 먹힐 위기를 번번이 벗어났다.

“성호야. 너 준후 씨랑 친하다고 했지?”

벤치에서 같이 휴식 중인 호열이 물었다.

호열은 방사선과 레지던트 4년 차로 축구 동호회에서 인연을 맺었다.

형 동생으로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친한 정도가 아니죠. 나름 베스트 프렌드입니다.”

“준후 씨, 아마추어였어? 우리랑 차원이 다른데?”

“제가 알기로 딱히 선수 출신은 아닌 걸로 알아요.”

“그럼 축구 천재라도 되는 건가? 우리 편이긴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

“의대 다닐 때부터 피지컬이 좋긴 했어요.”

성호는 옛 기억을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

“운동이나 춤 같은 건 다 잘하더라고요.”

“저 얼굴에, 저 피지컬에, 인턴답지 않은 의료 솜씨에. 거의 존재 자체가 반칙 아니냐?”

“그러게요.”

성호도 동의하는 바였다.

준후는 존재 자체가 반칙인 친구였다.

어떤 일이든 못하거나 모자람이 없었으니까.

그래서인지 몰라도.

의대 시절 성호는 준후를 단 한 번 질투한 적이 없었다.

질투도 급이 맞아야 하는 법.

준후와 자신 정도 차이가 나면 질투가 아닌 동경을 하게 되는 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후와 오래 시간을 지낸 성호는 준후의 불안요소를 알았다.

모처럼 만난 김에 오늘 회식 자리에서 그 부분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도 좋을 듯했다.

성호는 벤치 의자에 기대어 느긋하게 경기를 구경했다.

준후 덕분에 의대 라이벌 매치에서 질 거라는 걱정은 눈곱만치도 들지 않았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후반이 15분 남은 시점.

신원대는 4:0으로 고전대를 찍어 누르고 있었다.

* * *

“나 원 참. 축구 게임도 아니고 후반에만 4:0이 뭐냐. 4:0이”

고전대 수비수 명관은 허탈함에 혀를 찼다.

신원대 측에서 골키퍼 준후를 공격에 투입시킨 순간.

경기의 흐름이 뒤바뀌었다.

승부의 저울이 신원대 쪽으로 확 쏠렸다.

준후가 공격과 수비에서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했던 것이다.

언젠가부터 경기는 준후의 갈라쇼가 되어버렸다.

“선배.”

“왜?”

“저 새끼만 담그면 그래도 역전할 수 있지 않을까요?”

고전대 수비수이자 등 번호가 34번인 두영이 명관에게 물었다.

거친 몸싸움으로.

성호를 벤치로 쫓아낸 주인공이 바로 두영이었다.

“벌써 4:0인데? 시간도 15분밖에 안 남았는데?”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하지 않겠어요? 이대로 자존심을 구길 순 없잖아요. 회식비도 걸렸는데.”

두영의 시선은 붙박이처럼 준후에게 붙어 있었다.

방금 골을 터뜨린 준후는 수비에 가담 중이었다.

“그래도 담근다는 표현은 좀 그렇지 않냐? 설마 전반에 상대 공격수도 네가…….”

두영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침묵으로도 충분히 대답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반칙도 하나의 전술이라고 두영은 생각했다.

편법도 법의 일부라고 두영은 생각했다.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면 뭐든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제가 한번 해볼게요.”

“하긴 뭘 해. 얌전히 자리나 지켜. 의사가 환자를 만들어서야 되겠어?”

“원래 의사와 환자는 한 끗 차이 아닙니까?”

두영이 가볍게 몸을 풀었다.

준후가 센터 라인을 넘어.

자신이 수비를 맡은 좌측으로 전진하는 중이었다.

다행히 준후도 슈퍼맨은 아닌 것 같았다.

공을 몰고 오는 속도가 예전 같지 않았다.

지금 속도라면 두영이 충분히 따라붙을 수 있었다.

두영은 덩치를 내세워 준후의 앞을 가로막았다.

툭.

준후가 두영의 우측으로 공을 찬 후 달려나갔다.

두영은 안간힘을 써서 준후와 거리를 좁힌 후 반칙을 시도했다.

그동안 잘도 설쳤겠다?

어디 뜨거운 맛 좀 봐!

두영은 준후가 자빠지도록 어깨로 준후의 옆구리를 들이 받아버렸다.

그런데 웬걸?

정작 넘어진 건 두영이었다.

뭐랄까, 용수철에 닿은 느낌이랄까.

기묘한 반탄력이 느껴지면서.

오히려 두영이 튕겨 나가버린 것이다.

“크으으으.”

두영은 신음을 흘리며 준후를 올려다보았다.

슬쩍 자신을 돌아보는 준후의 얼굴에 경멸하는 기색이 드러났다.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분위기마저 풍겼다.

이 쥐새끼가 진짜 열 받게 하네.

두영은 황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을 제쳤음에도 준후는 골대로 쇄도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중거리 슈팅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직 기회가 남은 것이다.

두영은 준후의 연약한 발목을 똑바로 응시했다.

쎄에에엑.

푸른 잔디 위에 몸을 미끄러뜨리며 두영은 백태클을 시도했다.

위험한 행동이지만 상관없었다.

애초에 부상을 입힐 의도였으니까.

다치는 건 준후지 두영이 아니었으니까.

“아아아아악!”

자지러지는 비명이 필드 위를 뒤흔들었다.

놀랍게도 비명의 주인공은 준후가 아닌 두영이었다.

두영은 양손으로 발목을 붙잡은 채.

고통에 신음했다.

백태클을 한 건 두영인데 다친 사람도 두영이었던 것이다.

두영은 분명 정확하게 준후의 발목을 노렸다.

하지만 준후의 발목이 무쇠처럼 단단해서 오히려 태클을 시도하던 자신의 발목이 꺾이고 말았다.

삐이이익!

심판의 호루라기 소리가 요란했다.

경기는 중단되었고 양 팀 선수들이 두영에게 달려왔다.

두영과 가장 먼저 접촉한 사람은 당연하게 준후였다.

준후가 가장 가까이에 있었으니까.

준후는 두영의 머리맡으로 다가와 싸늘한 눈길로 두영을 내려다보았다.

“축구를 하다 보면 몸싸움도 할 수 있고 다칠 수도 있는 거지. 안 그래?”

* * *

그 날 오후.

신원대 축구 동호회원들은 인근 고깃집에서 회식을 가졌다.

치이이익.

테이블마다 고기 익어하는 소리가 맛깔났다.

육향을 품은 고소한 연기가 진동하면서 없던 식욕도 생겨났다.

소주까지 곁들인 회식 분위기는 유쾌했다.

신원대 동호회가 고진대와의 라이벌 매치에서 6:0으로 대승을 거둔 덕분이었다.

“이야, 준후 씨 대박이던데? 전반에는 야신이었고 후반에는 메시였단 말이지.”

“오늘 고기는 준후 씨가 쏘는 겁니다.”

“준후 씨 아무리 봐도 아마 축구 선수 같은데 말이야. 본업이 축구 선수야? 아니면 의사야?”

사방에서 쏟아지는 칭찬에 준후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사실 준후는 주목받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과한 칭찬을 받다 보면 쑥스럽고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주변 사람에게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고.

술잔도 몇 번 기울이다가 식당 바깥으로 나왔다.

봄 날씨는 여전히 화창했다.

하늘은 푸르렀고.

솜사탕을 뭉쳐놓은 것 같은 구름이 둥실둥실 떠다녔다.

돌이켜 보건대 축구 경기에 참석한 건 잘한 일이었다.

외과의가 천직이라고는 해도.

하루 종일 병원 안에서만 생활하다 보니 답답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모처럼 활동적으로 몸을 움직이자.

운기조식으로는 풀 수 없었던 답답함이 말끔히 사라졌다.

자업자득이지.

남을 다치게 해 놓고 자기만 무사하길 바라면 되겠어?

준후는 고전대 34번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34번의 부상은 준후가 하나부터 열까지 짜놓은 시나리오의 결과물이었다.

준후는 알았다.

자신이 활약하면 성호에게 그랬듯 34번이 자신에게 위험한 반칙을 할 거라는 사실을.

그래서 일부러 보법을 밟지 않고 적당한 속도로 돌파를 시도했다.

가장 먼저 빛을 발한 건 반탄공이었다.

반탄공.

이 무공은 몸에 반(反) 자결이 담긴 내공을 두르는 무공인데.

신체에 접촉한 상대를 반작용으로 튕겨내는 효과가 있었다.

34번은 준후가 반탄공을 사용한 줄도 모르게 바보같이 육탄공세를 펼쳤고.

그 결과 형편없이 나동그라졌다.

준후가 선보인 두 번째 무공은 철괴공이었다.

철괴공.

이는 육체를 무쇠처럼 단단하게 강화하는 무공이었다.

백태클을 했음에도 34번의 발목이 꺾인 건 철괴공의 힘이었다.

“야, 주인공이 자리를 비우면 어떻게 하냐?”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술기운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성호가 준후 옆에 섰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싶어서.”

“병원에만 있다가 오랜만에 외출하니까 좋지?”

“좋네. 많이.”

살랑거리는 봄바람을 만끽하며 준후가 미소 지었다.

“술김에 잠깐 진지한 이야기 좀 할까 하는데 괜찮아?”

“형이 이불 안 찰 자신만 있다면 얼마든지.”

“이불 찰 일 없다. 내 이야기가 아니라 네 이야기니까.”

“내 이야기?”

준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갑자기 없던 호기심이 생겼다.

“내가 왜 의대 다닐 때부터 지겹도록 너한테 연애하라고 하는 줄 아냐?”

“철이 없어서?”

“이 자식…… 혼나고 싶어?”

성호가 피식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너랑 오랜 시간 지낸 입장에서 그런 느낌이 들었다.”

“무슨 느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난 네가 위태로워 보였어. 뭐랄까 너무 많은 짐을 짊어진 것처럼 보였달까.”

“…….”

“혼자서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 같은 것도 있는 것 같았고.”

성호의 지적에 준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실제 준후의 속마음이 그랬다.

준후는 세계 최고의 외과의가 되고 싶었고.

적어도 자신이 진료하는 환자는 무조건 건강하게 살리고 싶었고.

동료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며.

또 자신은 동료를 조건 없이 돕고 싶었다.

무림에서 맺혔던 한을.

현대에서 풀려고 했던 것이다.

“난 말이야. 지금까지 네가 나한테 고민 상담하거나 하소연하는 걸 놀랍게도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어.”

“그건…….”

“그건 나한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고 말하고 싶겠지.”

준후가 하고 싶은 말을 성호가 가로챘다.

성호는 언제 자신의 이런 부분까지 간파하고 있었던 걸까.

새삼 성호가 낯설게 보이는 준후였다.

“그런데 말이야. 동료나 친구라는 건 어려움을 같이 함께 나누는 사이잖아.”

“…….”

“그러니까 너도 앞으로는 걱정이나 불안함 같은 거 마음속에 담아두지 마.”

“…….”

“나나 아영이, 아니면 다른 선배들한테도 시원하게 속내를 말해줬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속마음을 표현 안 해서 내가 위태로워 보인다는 거야?”

준후는 성호의 말을 요약했다.

“맞아.”

성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큰 태풍을 이겨낼 수 있는 건 거목이 아니라 풀이래. 거목은 태풍을 이겨내려다가 부러지고 풀은 누웠다가 일어나니까.”

“…….”

“그래서 내 말은 네가 때때로 동료들을 베개 삼아 누웠으면 좋겠다는 거지.”

성호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아물지 못한 준후의 옛 상처를 자극하는 부분이 있었다.

혼자서.

그리고 완벽하게.

이 두 가지는 지금의 준후를 성장시킨 원동력이었지만 동시에 준후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장본인이기도 했다.

무림의 원수 적일도.

그 악귀를 토벌하러 가던 날.

준후가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면 동료들은 목숨을 건졌을지 몰랐다.

어쩌면 준후도 죽지 않았을지 몰랐다.

“근데 그게 연애랑 무슨 상관인데?”

준후가 아픈 상처를 추스르며 물었다.

“아무래도 애인이 생기면 속을 털어놓기 편하잖아. 하루에 있었던 시시콜콜한 감정이나 생각도 공유할 수 있고.”

“듣고 보니 나름 일리가 있네.”

“당연하지. 이래 봬도 내가 너랑 자그마치 6년을 붙어 다녔다.”

“좋은 말. 고마워. 형. 나한테 이런 말해준 사람은 형이 처음이야.”

준후는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몽실몽실하고 따뜻한 감정이 뱃속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가르침은 충분히 이해했군. 제자여, 이만 하산 하거라.”

성호의 넉살에 준후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오늘 축구 경기에 참여하길 참 잘했다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