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110화
제19장 대회(5)
깊어가는 새벽.
캄캄한 방 안.
준후는 잠들어 있지 않았다.
경건하게 가부좌를 튼 채 운기조식을 펼치고 있었다.
쓰으으읍.
후우우우.
심결을 되뇌며 호흡할 때마다.
전신 혈맥을 돌고 온 자연진기가 단전에 축적되었다.
준후가 보유한 내공은 1갑자가 채 되지 않았다.
심법은 탁월했지만.
내공 쌓기보다는 의학 지식을 쌓는데 더 공을 들였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내공은 다다익선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지금이야 간단한 검사와 점혈하는 데만 사용하지만.
내공이 많아지면 치료에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
평소 10-30분 정도 운기조식을 하던 준후는 모처럼 2시간 가까이 운기조식을 펼쳤다.
눈을 뜨고 자세를 풀었을 때는.
복근 운동을 한 것처럼 아랫배가 단단하고 묵직했다.
준후는 방바닥에서 침대로 자리를 옮겼다.
침대 등받이에 허리를 기댄 채 다시 눈을 감았다.
시야가 다시 캄캄해졌다.
눈을 감은 것과 뜬 것의 차이가 없었다.
준후는 까만 어둠을 도화지 삼았다.
그 위에 그동안 암기해둔 집도의의들의 수술을 그려보았다.
위절제술, 위암 로봇 수술.
췌장암 수술, 대장암 수술, 간암 수술.
장 중첩증 수술, 복부 외상 수술 등등.
암기한 집도의들의 동작들이.
준후에게는 하나의 길고 정교한 초식처럼 보였다.
수술을 초식으로 이해하는 방식은 준후를 한층 빠르게 성장시켰다.
집도의 동작을 좀 더 꼼꼼하게 뜯어보고.
수술에 담긴 이치와 원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다.
각종 수술들을 초식으로 머릿속에 그려보고 준후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따라 해보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현란하게 움직이는 준후의 두 손.
가상의 수술 도구로.
가상의 장기와 혈관, 신경들을 째고 봉합하고 소작하고 등등.
누가 보면 필시 미쳤다고 할 행동이 준후에게는 무척 자연스러웠다.
무림에서는 종종 하던 수련법이었다.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이미지 트레이닝이라고 해야 할까.
상상 집도까지 마치자 동이 텄다.
커튼 사이로 노란 햇살이 비춰왔다.
준후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 조명을 켜고 책상에 앉았다.
소화기 외과 전공서를 독파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지식들이 차곡차곡 머리에 쌓여갔다.
출근 당일이었지만 준후의 학구열은 뜨거웠다.
준후는 스스로를 극한까지 몰아붙이고 있었다.
더 강해지고 싶어서.
더 많은 사람을 구하고 싶어서.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의 슬픔과 그 앞에서 아무것도 못 했다는 무력감을 피하고 싶어서.
준후는 한(恨)도 많고 욕심도 많은 의사였다.
똑. 똑. 똑.
불쑥 들려오는 노크 소리.
“들어오세요.”
“우리 준후, 아침부터 공부하니? 곧 출근인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문틈으로 얼굴을 내민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물었다.
“좋은 의사가 되려면 이 정도는 해야죠. 거뜬해요.”
“원 녀석도. 그럼 식사 준비되면 부를게.”
“네. 어머니.”
준후는 다시 교재에 시선을 돌렸다.
사실 준후도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운기조식과 영양제 조합으로 말도 안 되는 체력과 집중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를 바꿔 말하면 남들보다 몇 배로 고생하고 있다는 뜻도 되었다.
회복한 체력과 집중력을 다시 환자를 보고 처치를 하고 공부하는 데 사용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최고의 외과의를 꿈꾼 순간부터.
이 정도 고난은 각오하고 있었다.
* * *
소화기 외과 당직실의 분위기는 냉랭했다.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나란히 앉아서 업무 중인 대진과 미호는 단 한 마디도 주고받지 않았다.
서로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마치 원수처럼.
드르르륵.
미호가 말없이 당직실을 나간 후에야 냉전이 끝났다.
“와. 분위기 숨 막히던데. 언제부터 이랬어요?”
당직실 청소를 하던 준후가 대진에게 말을 걸었다.
“글쎄? 어제부터?”
대진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일에 관련된 거 아니면 미호랑 대화 안 하려고. 계속 이용당할 순 없잖아?”
“이야, 선배 각오 단단히 하신 모양인데요?”
준후는 엄지를 치켜세웠다.
착한 아이 증후군.
삶은 비커 증후군으로 미호에게 이용만 당했던 대진이었다.
심지어 과로로 인해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졌던 대진이었다.
그런 대진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미호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분명 축하할 일이었다.
준후가 봤을 때 미호가 무너지는 건 이제 시간문제였다.
“듣기로는 너도 어제 장난 아니었다던데? 야신도 됐다가 메시도 됐다면서?”
대진이 어제 축구 경기로 화제를 돌렸다.
“조금 재수 없게 들리겠지만 제가 운동신경이 남다르잖아요.”
“재수 없을 것까지야. 너야 워낙 팔방미인이니까.”
“칭찬해 주시니까 괜히 더 부끄럽네요. 차라리 재수 없다고 해주세요.”
“그럴까?”
두 사람이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드르륵, 당직실 문이 열렸다.
짝턴 유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준후! 한턱 쏴!”
“아침부터 뭔 소리인데?”
“뉴튜브 봤어? 쇼츠 영상 올리고 대박 쳤잖아. 동영상 조회수랑 구독자 수 미쳤던데.”
어째 준후보다 유정이 더 흥분한 눈치였다.
“알아. 계속 확인하고 있었어.”
“다 알면서 입 싹 닫을 생각이었어? 쇼츠 영상 추천한 사람이 나라는 거 기억하지?”
“암요. 뭘 원하십니까?”
“큰 건 안 바라. 전에 말한 것처럼 방탄 커피 한 세트만 사줘.”
“한 세트로 되겠어? 화끈하게 다섯 세트 쏜다.”
준후는 호기롭게 대답했다.
안 그래도 출근길에 뉴튜브 채널을 살폈는데 이번 달 예상 수익이 무려 100만 원이었다.
뉴튜브 시작 3개월 만에 이룬 성과치고는 훌륭했다.
채널이 조금만 더 커진다면.
수익이 꾸준하게 유지된다면.
가정 형편이 어려운 환자와 보호자를 돕겠다는 목표를 이루는 것도 꿈이 아니었다.
그런데 뉴튜브를 화제로 대화를 나누던 중.
유정이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준후야, 너 그거 들었어?”
“뭔데?”
“어제 공고 떴어. 인턴 배 봉합 대회 개최한다고.”
“인턴 배 봉합 대회? 그런 게 있었나?”
준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금시초문인 뉴스였다.
“나도 몰랐는데? 작년까지만 해도 그런 거 없었어.”
대진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올해부터 생긴 거래요. 외과 지원율이 낮아서 생겼다나? 병원 게시판에도 글이 올라왔고 사내 메일로도 통보됐어요.”
“역시 유정이네. 정보통이야.”
“원래 아는 게 힘이죠.”
유정이 거만하게 팔짱을 낀 채 말했다.
기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준후는 병원에서 사용하는 개인 메일을 열어보았다.
과연 어제 자로 메일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
메일은 평소처럼 시시콜콜한 병원 소식을 전하고 있었는데.
끝부분에 봉합 대회에 대한 정보가 있었다.
[제1회 인턴 배 봉합 대회]
-참가 대상: 병원에서 근무하는 모든 인턴.
-대회 일자: 6월 15일.
-심사 범위 : 단순단속 봉합, 수평 매트리스 봉합, 수직 매트리스 봉합, 연속봉합.
-심사 규정: 심사 범위에 해당하는 봉합을 가장 빠르고 가장 정확하게 하는 3인을 뽑아 수상.
-금상: 100만 원의 인센티브, 연차 2일 추가.
…….
메일을 다 훑어보고서 준후는 가만히 턱을 쓸어내렸다.
무림으로 치면 일종의 비무 대회를 개최하는 셈인가?
갑자기 흥미가 생겼다.
* * *
그 날 저녁.
병동 잡과 수술 어시스트로 바쁘게 하루를 보냈던 준후에게 모처럼 여유가 생겼다.
준후는 그 길로 CSR(중앙공급실)을 방문했다.
봉합 모형과 수술 도구를 받아들고 당직실로 돌아왔다.
“봉합 대회 참여하게?”
업무를 보던 대진이 준후 손에 들린 물품을 쳐다보며 물었다.
“네.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
“인턴 잡 하면서 연습 시간까지 따로 빼기는 힘들 것 같은데. 괜찮겠어?”
“틈틈이 하면 돼요. 마침 오늘은 당직이니까 밤새워서 연습해도 되고요.”
“어휴, 너도 독종이다. 독종.”
대진이 진저리치며 말을 이었다.
“이러다가 나 다음으로 네가 쓰러지는 거 아니야?”
“그럴 일은…… 아마 없을걸요?”
준후가 의자에 앉아서 책상에 모형과 물품을 내려놓았다.
이번 봉합 대회를 준후는 좋은 성장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준후의 봉합 솜씨는 메스 사용 솜씨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떨어져 있었다.
메스를 사용하는 원리는 검을 사용하는 원리와 비슷해서 익숙한 반면.
봉합은 그렇지 못했다.
봉합의 경우 따로 수련한 적이 없기도 했고 말이다.
“내가 좀 도와줄까?”
대진이 의자에 달린 바퀴를 밀며 준후 쪽으로 다가갔다.
“그동안 도움받은 것도 있는데 이럴 때라도 선배 노릇 해야지.”
“그럼 저야 감사하죠.”
“일단 시범부터 보여줄게.”
대진이 호기롭게 나섰다.
메스로 모형에 절개창을 낸 후.
단순단속 봉합, 수평 매트리스 봉합, 수직 매트리스 봉합, 연속봉합을 차례대로 펼쳤다.
봉합을 마치고서 대진은 뿌듯함을 감추지 못했다.
드디어 선배로서 체면을 세웠구나.
다른 건 몰라도 봉합이라면 내 장기지. 암.
“날 쫓아올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해 봐. 처음부터 무리할 필요 없으니까.”
“네. 선배.”
그러나 준후의 봉합이 시작된 순간.
대진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럴 수는 없었고 이래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준후의 봉합이 심각할 정도로 탁월했다.
준후는 오른손에 쥔 포셉으로 절개창을 단단하게 고정했고.
왼손에 쥔 니들홀더로는 봉합침을 조였다.
끼기기긱.
푹!
봉합침이 모형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준후의 손속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흔들림도 없었다.
모형의 살갗이 찢어지지 않는 걸 보면 힘 조절도 완벽했다.
스으으윽.
이윽고 상처 양쪽 면을 봉합침이 관통했다.
봉합침이 삽입된 자리는 좌우가 완벽하게 대칭이었다.
휘리리릭.
매듭짓는 솜씨도 훌륭했다.
초심자는 손이 엉키고 실이 엉키기 마련이건만.
준후는 마술을 부리듯.
현란하게 손을 움직이더니 매듭 하나를 뚝딱 완성시켰다.
봉합에도 가속도가 붙을 수 있다는 걸 대진은 처음 알았다.
준후의 손이 갈수록 빨라졌던 것이다.
봉합을 하면서 실시간으로 봉합에 능숙해지는 느낌이랄까.
찰칵!
찰칵!
당직실에는 어느새 준후가 가위로 매듭을 자르는 소리만 들려왔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대진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단순단속 봉합이야 가장 쉬운 봉합이라서 잘할 수도 있지만 준후가 다른 봉합까지 능숙하게 해내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다소 복잡한 매트리스 봉합.
매듭을 가장 마지막에 짓고 봉합사를 단 한 번만 자르는 연속 봉합까지.
준후는 일사천리로 다양한 봉합들을 소화했다.
심지어 대진보다 더 깔끔하게 또 빠른 속도로!
이거 모처럼 선배 노릇 하려다가 된통 망신만 당하고 있잖아?
대진은 문득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대진이 원하던 그림은 이런 그림이 아니었다.
-아니지, 준후야. 매듭은 그렇게 짓는 게 아니고 이렇게 짓는 거라고.
-어떻게요?
-잘 봐. 엄지를 축으로 사용해서 이렇게…….
-역시 선배네요. 근데 눈에 안 익어서 그런데 한 번만 더 보여주시면 안 될까요?
대진이 원하던 그림은 바로 이런 그림이었다.
학구열에 눈을 빛내며 질문하는 준후와 그런 준후를 자상하게 가르쳐주는 자신 말이다.
하지만 준후의 말도 안 되는 봉합 솜씨는 대진의 장밋빛 상상을 박살 냈다.
준후는 대진보다 명백하게 봉합을 잘했다.
“하하하. 우리 준후 봉합 잘하네. 가르칠 게 없겠다.”
대진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머쓱하게 웃었다.
“다른 과에서 따로 연습했나? 아니면 내가 안 볼 때 연습을 했거나?”
“아뇨. 연습은 처음이에요. 그동안 병동 잡 할 때도 몇 번 안 해봤고요. 전부 단순단속 봉합으로요.”
“그…… 그렇구나.”
대진의 목소리에 떨떠름함이 묻어났다.
하지만 이어지는 준후의 말이 결정타였다.
대진은 하마터면 뒷목을 잡고 쓰러질 뻔했다.
“아 참. 지금 왼손 쓰고 있거든요? 오른손 쓰면 지금보다 봉합이 훨씬 빠르고 정교해질 거 같아요.”
준후의 미소가 아이처럼 해맑았다.
그래서 더 가슴이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