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111화
제20장 대결(1)
준후는 남는 시간마다 모형으로 봉합 연습을 했다.
모형은 어느 순간부터 준후의 애착 인형이 되어버렸다.
그런 준후를 보고 유정은 시시껄렁한 농담을 던지곤 했다.
모형과 사귀냐고.
준후는 대답 대신 웃고 말았다.
봉합을 수련하는 시간이 준후는 즐거웠다.
양수 호박 기술 수련은 꾸준히 하고 있었지만 단순해서 금방 질렸는데.
봉합 연습은 질리지 않았다.
더 복잡하고.
더 정교한 손놀림이 필요해서 재미있었고.
연습 결과가 한눈에 보여서 좋았고.
게다가 대회라는 이벤트가 걸려 있어서 자극되었다.
준후의 성장세를 가팔랐다.
꾸준히 우상향을 그리고 있었다.
무림에서 검법, 수공, 지공 등을 익혔기에.
준후는 손으로 하는 처치는 다 자신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준후는 그동안 수술 스크럽을 들어가며.
교수들의 다양한 봉합들을 머릿속으로 암기하고 초식으로 정리해두었다.
그것들을 자신의 봉합에 활용하고 응용하니 성취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괴물이네, 괴물. 봉합 괴물.
-너 정도면 굳이 더 연습할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설렁설렁해.
-뭐야? 벌써 웬만한 레지던트 뺨치는 수준이구만.
선배들은 준후를 이해하지 못했다. 1등은 따놓은 것 같은데 왜 그리 열심히 하냐는 것이었다.
이는 준후를 몰라서 하는 소리였다.
준후에게 봉합 연습이란 장기 투자였다.
최고의 외과의가 되겠다는 미래를 위한 투자 말이다.
지금이야 고작 모형을 꿰매고 있다만 외과의가 되면 꿰매야 할 대상이 수도 없이 늘어난다.
장기, 혈관, 신경 등등.
또한 봉합의 성패에 환자의 목숨이 달려 있기도 했다.
절제가 외과의의 알파라면 봉합은 오메가였던 것이다.
그래서 준후는 미래까지 대비해서 훈련을 진행했다.
왼손으로도 수련을 하고.
오른손으로도 수련을 하고.
응급 상황을 가정해서 최대한 빨리 꿰매보기도 하고.
제일 굵은 1-0 봉합사를 써보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가는 2-0, 3-0 봉합사를 써보기도 하고 등등.
준후의 목표가 남달랐으므로.
준후의 수련 강도와 수련 시간 역시 남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준후는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 * *
깊어가는 새벽.
당직을 서고 있던 준후는 평소처럼 봉합 연습에 한창이었다.
사용 중인 봉합사는 2-0 vicryl(흡수성 봉합사).
끼기기긱.
찰칵.
니들홀더를 조이는 소리.
가위로 매듭 자르는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당직실에 퍼져 나갔다.
단순단속 봉합.
수평 매트리스 봉합과 수직 매트리스 봉합.
연속봉합 등을 한 번씩 시도해 보고 준후는 니들홀더와 포셉을 손에서 놓았다.
완성한 봉합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다른 사람들이 봤다면 그 완성도와 속도에 감탄했겠지만 준후는 자신의 봉합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상이 너무 높았던 탓이다.
준후는 무려 교수들의 봉합과 자신의 봉합을 비교하고 있었다.
정형외과의 신경 봉합술.
사지를 접합하는 수부외과의 봉합술 등등과 말이다.
최고를 꿈꾸고 있으니 최고들과 비교를 할 수밖에…….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굵기는 2-0 수준이구나.
모형이 아닌 실제 장기나 혈관, 신경을 봉합할 때는 돌발 상황이 터질 수도 있는데…….
아직 갈 길이 멀어.
준후는 냉정하게 자신의 현재 수준을 파악했다.
그리고 지난 봉합들을 복기했다.
무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연습이란 성공을 위한 반쪽이고 나머지 반쪽은 복기였다.
연습을 하고도 반성하거나 복습하지 않는다면 제자리걸음을 면하기 어려웠다.
준후의 시선이 문득 벽에 걸린 달력에 머물렀다.
오늘은 6월 15일.
대망의 인턴 배 봉합 대회가 개최되는 날이었다.
얼마나 많은 인턴이 참여할지.
인턴들의 수준이 어떨지는 준후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키워 온 실력만큼은 자신할 수 있었다.
드르르륵.
문이 열리고 화장실에 갔던 미호가 당직실로 복귀했다.
미호의 얼굴은 부쩍 수척해 보였는데 이는 비단 미호가 당직 중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대진이 미호의 노예에서 해방된 후.
미호는 계속 고통받고 있었다.
레지던트 1년 차 에이스라는 평판은 거품이었다는 게 드러난 데다가 지금의 미호는 일 못하는 미운 오리 새끼 취급을 받았다.
선배들에게 구박이란 구박은 다 받고 있었다.
하지만 준후는 미호를 동정하거나 연민하지 않았다.
죄인이나 악인은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의 고통이란 단지 죗값을 치르는 것에 불과했으니까.
“피곤할 텐데 잠깐 눈이라도 붙여.”
미호가 의자에 앉아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오늘 봉합 대회 있다고 하지 않았어? 컨디션 관리해야지.”
“별로 피곤하진 않네요.”
준후가 쌀쌀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봉합 연습을 하기 전.
영양제를 섭취하고 30분간 운기조식을 했던 준후였다.
지금의 몸 상태라면 막 자고 일어난 것처럼 쌩쌩했다.
“여전히 차갑구나. 넌.”
“저를 차갑게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고 계시죠?”
“알아. 그래서 지금 벌 받고 있잖아.”
미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너한테도 그렇고 대진이한테도 그렇고. 참 몹쓸 짓을 많이 했지. 다 내 잘못인데 뭘 어쩌겠어.”
“제가 밉지 않습니까?”
“미워했지만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후회하고 있어.”
미호가 고개를 숙인 채 말을 계속했다.
“동기고 후배면 같이 잘 지낼 생각을 했어야 하는데, 이용해먹을 생각만 했으니까. 난.”
미호는 진심으로 지난 과오를 뉘우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준후의 마음도 살짝 흔들렸다.
모든 악인이 갱생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99명 중 1명.
예외는 존재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 한 명이 미호일 수도 있었다.
한동안 봉합 연습에 매진해서 인지 몰라도.
미호와 벌어진 사이를 좁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예전에 했던 행동들은 미안해. 물론 사과는 안 받아줘도 되고.”
“…….”
“네가 말했잖아. 사과는 하는 사람이 중요한 게 아니고 받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다했는지 미호는 의자를 모니터 쪽으로 돌렸다.
바쁘게 차트를 입력했다.
준후는 그런 미호를 한동안 빤히 쳐다보았다.
* * *
아침이 밝으면서 병동도 깨어나기 시작했다.
준후는 유정과 순식간에 루틴 잡을 마치고 컨퍼런스 준비도 마쳤다.
이어지는 컨퍼런스와 회진에서.
특이한 상황은 없었다.
그리고 오전 댓바람부터 준후는 수술 스크럽에 들어갔다.
환자는 대장암 2기.
수술은 개복을 통한 횡행결장절제술.
준후는 제2보조로 빈틈없이 수술을 어시스트 했다.
수술 과정을 꼼꼼하게 머릿속에 담았고.
집도의와 제1어시스트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도 의심을 품고 질문을 던졌다.
질문과 의심.
이 두 가지는 지금의 준후를 만들어준 1등 공신인 마음가짐이었다.
수술 중 준후가 특히 눈여겨본 부분은 횡행결장과 S결장의 문합술이었다.
문합이란 봉합보다 한 단계 고차원적인 술기였다.
봉합이 좌우상하로 찢어진 상처를 꿰매는 것이라면.
문합은 절단된, 또는 따로 떨어진 두 개의 혈관이나 신경, 장기의 양 끝을 꿰매주는 술기였다.
문합은 보통 봉합보다 넓은 부위를 꿰매며 꿰매는 방식 또한 정교해야 했다.
3-0 vicryl.
단단문합술(end-to-end anastomosis, 끝과 끝 문합).
단순단속 봉합.
운침은 깊게 들어가고 봉합사로 주는 표면장력은 다소 타이트하게.
매듭 간의 간격은 2밀리미터.
매듭을 자르는 위치는 매듭으로부터 3밀리미터 윗부분.
준후는 집도의의 문합술을 초식으로 만들어 머릿속에 저장해두었다.
소화기 외과 전공을 한다면.
대장 외과 전공을 한다면.
본인이 횡행결정절제술을 직접 펼쳐야 할 테니까.
“다들 고생하고 마무리를 부탁하지.”
수술이 3시간째로 접어들 때쯤, 집도의가 수술방을 떠났다.
핵심 수술이 끝나고 복강과 복부를 닫는 일만 남았기 때문이다.
이제 수술방의 의사는 준후와 치프 밖에 남지 않았다.
“치프. 저 부탁 한 가지만 드려도 될까요?”
“응, 뭔데?”
“복부 봉합 제가 해보고 싶습니다.”
인턴 배 봉합 대회가 오늘이었다.
준후는 실전으로 손을 풀고 싶었다.
* * *
슬슬 올 때가 됐어.
미호는 당직실 벽에 걸린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아까 편의점에서 구입한 바커스 음료를 가운 주머니에서 꺼냈다.
딸칵!
뚜껑 열리는 소리가 경쾌했다.
미호는 바커스 음료를 5분의 1 정도 마시고 미리 챙겨 둔 딜코락스 시럽을 들이부었다.
끈적한 시럽이 유리병 안쪽으로 꿀렁꿀렁 잘도 넘어갔다.
빨대로 병 내부를 휘휘 휘젓고.
미호는 음료병의 뚜껑을 다시 닫았다.
음료는 새것처럼 멀쩡해졌다.
냉장고에 음료를 넣어놓는 미호의 입가에 어느새 음흉한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쯤이면 완전 방심하고 있겠지?
딱 걸렸어. 서준후.
너도 나처럼 피눈물 흘려 봐.
지난 몇 주간.
미호는 준후 앞에서 회개한 죄인처럼 굴었다.
하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다 오늘을 위한 빌드업이었다.
준후는 인턴 배 봉합 대회를 위해 피나는 연습을 해왔는데.
대회에서 본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그 실망감은 말도 못 할 것이다.
미호가 오랫동안 바라왔던 바가 바로 그것이었다.
준후의 봉합 대회 출전을 망치는 일.
쿵. 쿵. 쿵.
준후의 복귀를 기다리는 동안.
미호의 심장은 거세게 요동쳤다.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고 가끔 마주치는 동기나 선배들의 말은 바람처럼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거사를 치를 때가 찾아왔다.
드르르륵.
수술 스크럽을 끝낸 준후가 당직실로 돌아온 것이다.
“고생 많았어.”
미호는 일부러 짤막하게 말했다.
괜히 말을 길게 해서 오버했다간 눈치 빠른 준후가 자신의 속셈을 눈치챌 수도 있었다.
“아. 네. 다른 선배들은 자리에 없나요?”
“대진이는 ICU(중환자실) 라운딩 갔고 다른 선배들은 어시스트 중이야.”
“혼자 바쁘시겠네요.”
“뭐야? 지금 내 걱정해 주는 거?”
“걱정이라기보다는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한 거죠 뭐.”
“있는 사실이라도 말해줘서 고맙다.”
말을 하면서 미호는 실소를 간신히 참았다.
그동안 개심한 연기를 했던 게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아는 척도 안 했을 준후였다.
하긴 내가 이만큼 했으면.
너도 마음을 놓을 수밖에 없겠지.
후후후.
“목마를 텐데 음료나 한잔해.”
미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향했다.
아까 작업해둔 바커스 음료병을 꺼내 뚜껑을 돌리는 척했다.
그리고 음료를 자연스레 준후에게 내밀었다.
음료에는 딜코락스 시럽이 섞여 있었다.
변비 환자에게 사용하는 효과 좋은 변비 시럽이.
음료를 마시고 나면 준후는 봉합 대회를 구경도 못 할 것이다.
대회장이 아닌 화장실을 찾아야 하겠지.
의자 대신 변기에 앉아야 할 테고.
모형 대신 자기 똥만 봐야 할 것이다.
드디어 복수를 완성할 수 있다는 기대에 미호는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었다.
“선배, 오늘따라 서비스가 유독 좋네요?”
“너한테 조금이라도 점수를 따고 싶어서.”
“그럼 10점 만점에 1점만 드릴게요.”
“1점이 어디야?”
미호는 수줍은 척 웃었고.
준후는 미호가 내민 음료를 의심 없이 받아들었다.
음료를 든 준후의 팔이 서서히 올라갔다.
준후의 고개가 서서히 뒤로 젖혀졌다.
그래.
이대로 꿀꺽꿀꺽 삼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