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112화
제20장 대결(2)
“아. 근데요. 선배. 궁금한 게 있는데요.”
준후가 음료를 마시려던 중 팔을 내렸다.
미호 입장에서는 애가 타는 행동이었다. 지금쯤 마셔야 봉합 대회 시작쯤 설사약의 효과가 나타날 텐데…….
“응. 뭔데?”
미호는 억지로 웃으며 되물었다.
“음료 뚜껑 딸 때 뚜껑 소리를 못 들었거든요?”
“…….”
“단순히 제가 못 들은 거겠죠?”
“당연하지. 자잘한 생활 소음을 어떻게 다 들어? 그랬다간 아무 일에도 집중 못 할걸?”
“…….”
“근데요. 선배.”
“또 왜?”
“바커스에서 이상한 냄새 나네요. 뭔가 인위적인 향이랄까?”
준후의 잇따른 지적에 미호는 삐질삐질 땀을 흘렸다.
준후의 감각이 제법 날카로웠다.
보통 동료가 음료수를 따주면 고맙다고 넙죽 받아먹기 마련인데.
뚜껑 따는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고?
바커스에 넣은 딜코락스 시럽 특유의 냄새까지 맡았다고?
혹시 준후가 자신의 계획을 눈치챈 것 아닐까 하는 불길함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바커스가 인공 음료니까 인위적인 향이 나겠지.”
미호는 최대한 태연한 척 대꾸했다.
일은 못해도 세 치 혀로 사람을 구워 먹는 것은 자신이 있었다.
“이거 선배가 마실래요?”
준후가 오히려 미호에게 음료를 내밀었다.
“왜? 내가 독 같은 거라도 탔을까 봐? 사람을 너무 파렴치한으로 모는 거 아니니?”
“느낌이 안 좋아서 그래요. 그래도 선배가 먼저 마시면 덜 불안할 것 같은데.”
“너 진짜 이런 식으로 나올 거야? 사람의 진심을 이런 식으로 짓밟아도 돼?”
미호는 오히려 역정을 냈다.
공든 탑이 무너지려는 상황,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게 화를 낼 일인지 모르겠네요. 음료에 문제가 없으면 본인이 마시면 그만 아닙니까?”
순간 준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온순했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삽시간에 사람이 바뀐 것 같았다.
이 녀석.
설마 음료에 장난친 걸 알고 일부러 이러는 건가?
“스스로 증명하세요. 음료에 문제가 없다는 걸.”
준후가 미호의 손에 억지로 음료를 쥐여주었다.
졸지에 역전된 상황.
음료를 안 마시면 구린 짓을 했다는 게 들통나고.
음료를 마시면 본인이 설사를 하고.
미호에겐 어느 쪽이든 가혹한 형벌이었다.
젠장!
일이 왜 이렇게 꼬여 버린 거야!
그냥 물 흐르듯 간단하게 넘어갈 일인데.
미호는 변비약이 섞인 음료병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벌컥. 벌컥.
음료의 절반을 단숨에 비웠다.
“이제 속이 후련하니? 음료수에 아무 문제 없다는 걸 믿겠어?”
“웃기고 있네. 믿긴 뭘 믿어.”
준후가 싸늘한 표정으로 대뜸 반말을 했다.
“속일 사람을 속여야지. 네 악랄함, 화장실에서 반성해라.”
준후가 뒤돌아서서 당직실을 나갔고.
미호는 그런 준후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뒤늦게 밀려오는 허탈함.
씁쓸하고 고통스러운 자괴감.
미호는 주저앉듯 의자에 앉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준후가 이미 자신의 머리 꼭대기 위에 있다는 사실을.
준후가 이미 자신의 계획을 눈치챘다는 사실을.
* * *
터벅. 터벅.
준후는 본관을 떠나 별관으로 향했다.
봉합 대회에 참석하는 길이었다.
내리쬐는 햇살은 따스했다.
살랑살랑 봄바람은 의사 가운과 준후의 머리카락을 희롱하고 떠나갔다.
병원 곳곳에 심어진 화단에 봄꽃은 활짝 피었고 나무들은 싱그러운 초록의 기운을 뽐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준후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미호를 향한 경계가 풀릴 때쯤, 미호가 준후에게 암수를 펼쳤다.
음료에 장난질을 친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미호가 건넨 음료를 넙죽 받아먹었겠지만 준후는 아니었다.
무림에서 워낙 험한 꼴을 많이 당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경계태세를 항상 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림 초출 당시.
준후는 산공독을 먹고 위기에 빠진 적이 있었다.
산공독이란 일시적으로 내공을 흩트려 놓는 독이었다.
그리고 10살짜리 꼬마 자객에게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있었다.
설마 10살짜리 꼬마가 살수라는 상상은 못 했으니까. (나중에 알고 보니 살수는 왜소증에 걸린 청년이었다.)
어쨌거나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기에.
준후는 미호가 음료수를 건넬 때 뚜껑 따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음료에서 나는 딜코락스 시럽 특유의 냄새도 맡았다.
상황을 역전시켜 미호가 설사약 음료를 먹도록 유도했다.
역시 악인은 갱생하는 게 아니야.
어쭙잖게 마음을 열어선 안 되겠어.
준후는 마음의 빗장을 오히려 단단하게 닫았다.
만약 100의 악인 중 99명의 악인이 갱생 불가능하고 단 1명만 갱생이 가능하다면.
준후는 갱생 가능한 그 1명을 그냥 무시할 생각이었다.
단 1명을 위해 99명에게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은 너무 피곤한 일이었다.
별관으로 이동하는 동안, 준후는 양손으로 가위바위보를 했다.
양수 호박 기술을 익혔던 것이다.
자투리 시간마저 알뜰하게 챙기는 준후였다.
* * *
준후가 별관 로비에 들어섰을 때.
낯익은 손길이 오른쪽 어깨에 닿았다.
준후는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아영아, 오랜만이다?”
과연 준후의 등 뒤에 아영이 서 있었다.
아영은 준후의 오른쪽 볼에 검지를 대고 있었다.
준후의 볼을 찌르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놀란 눈치였다.
“응? 나인 줄 어떻게 알았어?”
“알면 간단하지. 아영이 넌 뛸 때 참새처럼 총총거리면서 뛰거든.”
“…….”
“그런 뜀박질로 이 시간에 내 뒤에 붙을 사람은 너밖에 없지.”
“볼 찌르려고 한 건 어떻게 눈치챘는데?”
“어깨에 손이 닿았는데 손가락 하나가 안 느껴졌으니까.”
“넌 의사니? 아니면 셜록 홈즈니?”
아영이 질렸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낙담한 아영의 모습을 보니.
그냥 당해줄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준후였다.
“새로 한 머리 잘 어울린다.”
준후는 아영의 바뀐 헤어 스타일로 화제를 돌렸다.
의대에 다닐 때부터 생머리였던 아영이 웬일로 펌을 했다.
적당한 웨이브와 컬이 들어간 스타일이 아영과 찰떡궁합이었다.
“정말?”
아영이 쑥스러워하며 머릿결을 만지작거렸다.
“어제 오프였는데 손 좀 봤어. 이 머리 이름이 뭔지 알아?”
“글쎄…….”
“롱헤어 러블리 펌이래. 이름 한 번 요란하지?”
“요란하면 어때. 잘 어울리는데.”
준후는 아영과 잡담을 나누며 봉합 대회가 펼쳐지는 4층 대 회의실로 이동했다.
대회에 접수할 때부터.
준후는 아영과 마주칠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아영은 무려 고등학교 때부터 흉부외과 전공을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흉부외과에서 봉합술이 차지하는 비중은 두말하면 입이 아팠다.
OPCAB(무 인공심폐기 관상동맥 우회술)의 경우.
쿵쿵쿵, 뛰고 있는 심장 위에서 수술을 해야 하니까 말이다.
“연습은 충분히 했어?”
“모자라진 않는 것 같아. 결과야 뚜껑을 열어봐야겠지만.”
아영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이번 대회에서 승범 오빠가 다크호스가 될 것 같아.”
“…….”
“나랑 같이 성형외과에서 수련 중인데 엄청 열심히 연습하더라. 레지던트 선배들한테 교육까지 받아가면서.”
아영이 전해준 소식은 뜻밖이었다.
승범까지 이번 대회에 참가했을 줄이야.
4층 대 회의실에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ㅁ’자 모양의 테이블 위에는.
1부터 30까지의 숫자가 적힌 플라스틱 명패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봉합 대회에 참가하는 인턴이 30명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명패 뒤로는 상처가 난 모형.
봉합에 필요한 도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테이블과 조금 떨어진 곳에는 심사위원석으로 보이는 자리도 보였다.
30분 정도 일찍 왔기 때문일까.
준후와 아영 말고 다른 참가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회에 참석하는 분들이죠?”
회의실을 정리하던 직원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직원의 손에는 어느새 서류철이 들려 있었다.
“이름 불러주실래요?”
“저는 서준후입니다.”
“저는 이아영이요.”
“서준후 선생님은 3번 자리로 이동하시고. 이아영 선생님은 12번 자리로 이동해 주세요.”
“긴장되지는 않아? 마사지 좀 해줄까?”
준후가 아영에게 물었다.
아영은 똑순이였지만 성격이 대범한 편은 아니었다.
수능 시험 당시 과호흡 증후군을 앓기도 했고.
“마음만 받을게. 나 이제 괜찮아. 긴장 같은 거 잘 안 해. 예전의 내가 아니라구.”
아영이 걱정 말라는 듯 웃었다.
아영의 미소에 준후도 마음을 놓았다.
그동안 준후가 성장한 만큼 아영도 성장한 듯했다.
“준후, 파이팅.”
“아영이, 너도 파이팅.”
화기애애하게 응원을 주고받은 후 준후는 자리에 앉았다.
아직 시간 여유가 있었기에.
니들홀더와 포셉들을 미리 만져보았다.
손과 손가락이 날개를 단 듯 가벼웠다.
컨디션이 최상이었다.
대회 결과도 최상으로 나올 것 같았다.
* * *
“뭐야? 내 옆자리가 너였냐?”
빈정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한 청년이 준후 옆자리에 앉았다.
주인공은 승범이었다.
학교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카데바와 찍은 사진을 SNS에 올려 물의를 일으키고.
흉부외과 협진 때도 충돌했던.
준후와 사사건건 악연을 빚고 있는 승범이었다.
“야, 뭐라고 말 좀 해봐. 쫄았냐?”
“딱히 너랑 말 섞고 싶지 않은데?”
“하 이 새끼. 한 살 형한테 하는 말버릇 좀 보소?”
“형이면 형 대접받을 모습을 보여주던가.”
준후의 목소리에 냉기가 풀풀 날렸다.
준후는 승범 같은 타입이 딱 질색이었다.
거만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천둥벌거숭이는 주변에 폐만 끼칠 뿐이었다.
“됐고. 발릴 준비나 해라. 이번 대회 금상은 어차피 나니까.”
“자신감이 흘러넘치시네?”
준후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아까 아영에게 들은 대로였다.
특훈을 했는지 승범은 평소보다 훨씬 본인에게 도취되어 있었다.
“내가 이날을 위해 얼마나 이를 갈았는지 너 따위가 알 리가 있나.”
승범이 비아냥거리며 말을 이었다.
“학교 성적은 나보다 좋았을지 몰라도 봉합은 날 못 따라올걸?”
“그건 맞는 말이지. 물론 네 머릿속에서만.”
“하여간 입만 살아 가지고.”
승범과의 말싸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정시가 되면서 심사위원들이 자리에 앉았던 것이다.
심사위원은 총 세 명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세 손가락에 들어간다는 정형외과의 이동훈 교수.
이동훈 교수와는 준후도 안면이 있었다.
한 사람은 흉부외과 교수.
마지막 한 사람은 소화기 외과 과장이자 진료부원장이자 승범의 아버지인 유승용이었다.
“진료부원장 유승용입니다. 다들 반갑습니다.”
마이크를 쥔 승용이 테이블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일종의 개회사를 시작한 것이다.
인턴 잡이 바쁜 와중에도 대회에 참가해 줘서 고맙다.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마음껏 펼쳐봐라 등등.
개회사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개회사가 끝난 후에는 진행을 맡은 성형외과 치프가 대회 진행 방식을 설명했다.
모집 요강을 되풀이하는 수준이라 귀담아들을 것은 없었다.
“그럼 지금부터 제1회 인턴 배 봉합 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진행자가 마침내 대회 개시를 알렸다.
느슨했던 회의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팽팽해졌다.
참가자들의 눈빛은 결연했고 손짓은 다급했다.
준후는 니들홀더를 오른손에 쥐고 포셉은 왼손에 쥐었다.
왼손으로 적당히 대회에 참여한다?
그런 선택지는 없었다.
누구를 봐주는 일도 없었다.
오늘의 준후는 100퍼센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