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114화
제20장 대결(4)
“서준후. 이 악마 같은 놈아. 거기 안 서?”
준후가 아영과 대회의실을 나오는 도중.
성난 목소리가 준후를 붙잡았다.
익히 예상하고 있던 주인공.
승범이었다.
승범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준후를 노려보고 있었다.
“둘이 무슨 일 있어?”
둘 사이에 흐르는 긴장을 눈치채고.
아영이 불안해하며 물었다.
“대단한 건 아니야. 아영아 잠깐 휴게실에 가 있을래?”
“혼자서 괜찮겠어?”
“혼자여야 괜찮을 것 같아. 나 평소에 마시던 캔 커피로 한 잔 부탁해.”
준후는 아영의 어깨를 가볍게 떠밀어 휴게실로 보냈다.
그 모습을 보고 승범이 꼴 같지 않다는 듯 혀를 찼다.
“X랄 염병을 떠네. 아주.”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따라와.”
준후는 승범과 창가가 있는 복도 끝으로 이동했다.
회의실 근처에는 아직 인턴들이 많았다.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봉합 대회 종료 후 30분 뒤.
심사와 시상이 곧바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 치사한 새끼야. 사람 이야기도 안 들어보고 손목을 짓밟아? 너 때문에 봉합이 늦어졌잖아.”
승범이 오른손으로 왼손을 가리키며 화를 냈다.
승범의 왼쪽 손목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크룩스에 짓밟은 흔적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적반하장이 따로 없군. 내가 네 속셈을 모를 줄 알았어?”
“무슨 속셈?”
“일부러 포셉을 떨어뜨리고 책상 밑으로 들어가서 내 의자를 들어버리려고 한 거.”
준후는 승범의 계략을 따끔하게 지적했다.
승범은 대회 도중 준후를 힐끔힐끔 쳐다보기 바빴다.
떨어뜨릴 이유가 없는 포셉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실로 고의성의 다분한 행동.
경계를 늦추지 않은 덕분에.
준후는 승범의 계획을 간파할 수 있었다.
우선 천근추로 몸의 무게를 무겁게 했다.
승범이 의자에 몹쓸 짓을 하지 못하도록 원천 봉쇄하고.
승범과 눈을 마주친 뒤 승범의 손목도 밟았다.
만약 준후가 힘 조절을 하지 않았다면 승범의 손목은 박살이 났을 것이다.
봉합 대회 완주도 못 했을 것이다.
다만 준후가 자비를 베풀었던 이유.
그것은 승범이 손을 다치면.
승범과 같이 일하는 동료 인턴이나 레지던트에게 피해가 가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일손이 줄어드니까.
“우……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세상에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 너 피해망상 있어?”
승범이 오리발을 내밀었다.
하지만 당황한 기색은 다 숨기지는 못했다.
“바로 너요. 너. 넌 진짜 창의력 대장이다. 어쩜 그런 발상을 할 수가 있니?”
준후가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그 안에는 진심도 담겨 있었다.
공식적인 대회 중에.
의자 밑으로 들어가 라이벌의 의자를 뒤집을 생각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준후는 그런 상상도 해 봤다.
만약 승범의 성품이 올곧았으면 어땠을까.
나쁜 쪽으로만 굴러가는 머리가.
사람을 구하는 쪽으로 굴러가면 어떨까.
그렇게만 된다면 승범은 준후가 등을 맡고 기댈 든든한 동료가 될 텐데 하고 말이다.
물론 그럴 일은 하늘이 두 쪽 나도 없겠지만.
“가해자 새끼가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어버리네. X발, 네가 언제까지 승승장구할 것 같냐?”
“실력이 안 되니까 이젠 험담인가? 너답다.”
“재수 없는 새끼. 넌 깝치다가 분명 후회할 날이 올 거야.”
“X신 같은 저주는 그만하고 꺼져. 나머지 손목까지 부러지고 싶지 않으면.”
준후가 살기를 날리자 승범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분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고 자리를 벗어났다.
준후는 자리를 지킨 채 작아지는 승범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승범과의 악연은 과연 언제쯤 끝날지…….
준후조차 알 수 없었다.
* * *
대회 종료 30분 후.
인턴들은 다시 대회의실로 모였다.
“1등은 어차피 준후 너일 거고. 남은 건 2-3등 싸움이겠네?”
아영이 곁에 앉은 준후를 보며 말했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지. 아영이 너도 잘하던데?”
“나? 준후 너에 비하면 아직 멀었어.”
“당연히 나랑 비교하면 안 되고.”
준후의 농담에 아영이 웃었다.
봉합을 가장 먼저 끝내고 준후는 아영이 봉합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대회 준비를 잘해왔는지.
아영의 손놀림은 야무졌다.
운침, 결찰, 매듭의 과정이 물 흐르듯이 매끄러웠다.
예전처럼 긴장하는 모습도 딱히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아영은 좋은 흉부외과의가 될 수 있을 듯했다.
“지금부터 제1회 인턴 배 봉합 대회의 시상이 있겠습니다. 먼저 3등부터 발표하겠습니다.”
진행자의 멘트에 준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압도적인 실력을 뽐냈다고 해서.
안심이 되는 건 아니었다.
심사위원 중엔 승용이 있었다.
진료부원장인 승용에게는 꼴찌도 1등으로 만들 수 있는 권력이 존재했다.
“3등은 신경외과에서 수련 중인 최종훈 인턴입니다. 단상으로 올라오세요.”
짝. 짝. 짝.
3등 발표와 함께 박수갈채가 터졌다.
3등이 승용과 악수를 나누고 상패를 받아 테이블로 돌아왔다.
“다음은 2등입니다. 2등은…… 성형외과에 이아영 인턴입니다.”
“와! 준후야, 나 2등이야.”
“그럴 만했어. 축하해, 아영아.”
준후는 아영의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이제 남은 건 한 자리.
이번 대회의 대미를 장식한 우승자의 발표만이 남았다.
1위 시상 전.
준후는 문득 승범과 눈을 마주쳤는데.
승범은 비열하게 웃고 있었다.
준후를 향해 중지를 치켜들기도 했다.
“제1회 인턴 배 봉합 대회. 그 영광의 1등은…… 소화기 외과의 서준후 인턴입니다.”
준후가 호명되자 승범은 와락 얼굴을 구겼고.
준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심사위원이 못 보도록 승범에게 활짝 편 중지를 되갚아주었다.
“우심증 환자에게 CPR을 할 때부터 싹수를 알아봤는데.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준후를 마주한 승용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준후, 네가 압도적인 1등이다.”
“감사합니다. 부원장님.”
사방에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번쩍번쩍, 카메라 플래시도 터졌다.
병원 월보에 오늘 소식과 사진이 실릴 예정이었다.
“부원장님. 실례가 안 된다면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상패를 받기 전 준후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말해봐.”
“승범이도 있는데 어째서 제가 1등입니까?”
비록 1등의 영광을 거머쥐었지만.
준후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승용이라면 승범을 1등으로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텐데.
“자네는 아직 나를 모르는군. 아직 사람 보는 눈이 부족한 거지.”
“…….”
“나중에 이유를 깨달으면 그때 나를 찾아와. 그때 제대로 된 이야기가 될 테니까.”
승용의 말은 의미심장했고 수수께끼 같았다.
상대방의 의도와 속내를 읽지 못한 것은 처음이라 준후도 적잖이 당황했다.
뭐랄까.
승용이 자신의 머리 위에 있는 느낌이랄까.
준후는 상패를 받은 후 자리로 돌아왔다.
이상하게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 * *
소화기 외과로 복귀한 준후는 동료들의 축하를 한 몸에 받았다.
당연히 1등 할 줄 알았다.
상패 구경이나 좀 해 보자.
오늘은 크게 한턱 쏴라 등등의 이야기도 들었다.
축하의 장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은 미호뿐이었다.
미호는 당직실과 화장실을 정신없이 오가기 바빴다. 음료에 변비약을 탄 죗값을 톡톡히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대화는 10분 정도 지속되었다.
2-4년 차는 각자 업무를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당장은 할 일이 없었기에.
준후는 빤히 상패를 바라보았다.
금색 트로피가 준후의 얼굴을 금빛으로 반사하고 있었다.
봉합 대회는 분명 좋은 경험이었다.
그동안 메스를 쓰는 처치에만 익숙했는데.
덕분에 봉합에 눈을 떴다.
봉합에 재미를 붙이고 봉합에 숙련도도 높였다.
하지만 그 후유증도 만만치 않았으니…….
바로 집도에 대한 열망이었다.
봉합을 익히고 나니.
자신의 손으로 집도까지 해보고 싶어진 준후였다.
이제 인턴 잡은 준후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ABGA 채혈, 드레싱, 비위관삽관, 관장, 폴리 카테터 연결, 흉강·복강 천자술 등등.
인턴에게 필요한 모든 술기를 준후는 초식으로 변환시켰다.
그 언제라도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었다.
그 탓인지 몰라도.
더 상위에 있는 처치와 술기를 익히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띠리링~
상념을 깨우는 전화 소리.
전화와 가장 가까이 있던 준후가 전화를 받았다.
“네. 소화기 외과입니다.”
-선생님. 여기 응급실인데요. 환자 번호 1478910번이고요.
“…….”
-환자가 아뻬(Acute ‘Appe’ndicitis, 급성 충수돌기염)거든요. 우 하복 촉진해서 반사통 확인했고요. 복부 CT에도 염증 소견 있어요.
“알겠습니다. 수술 스케줄 잡고 내려갈게요.”
통화가 끊어졌다.
응급의학의의 노티를 듣고 준후는 환자의 차트를 확인했다.
아뻬는 생각보다 감별진단이 어려웠다.
장염, 요로결석, 게실염, 장중첩증 등과 증상이 겹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티 받은 환자는 준후가 보기에도 아뻬가 확실했다.
“선배. 방금 응급실 전화 받았는데요. 아뻬 환자 들어왔대요.”
준후는 때마침 당직실로 돌아온 대진에게 노티했다.
“아뻬? 하…… 엿 됐네.”
대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세요?”
“이번에 아뻬 환자 들어오면 내가 첫 집도하기로 되어 있거든. 아휴, 벌써부터 긴장된다.”
“…….”
“괜찮으면 네가 어시스트 들어올래?”
“저야 대환영이죠.”
“수술 수속은 내가 밟을 테니까 넌 응급실 가서 환자 데려와.”
“네. 선배.”
준후는 그 길로 응급실로 내려가 아뻬 환자가 누운 침상을 수술실로 이동시켰다.
수술실에 도착하자.
먼저 와 있던 대진이 수술 동의서를 받았다.
그 사이 준후는 수술방으로 들어가 번개처럼 수술 장비 세팅을 했다.
그렇게 20분쯤 지났을까.
대진이 집도의로 펼치는 대망의 첫 아뻬의 막이 열렸다.
환자는 전신 마취 상태로 수술대에 누워 있었다.
무영등 빛 때문인지.
환자의 피부가 유독 창백하게 보였다.
삐이이이.
삐이이이.
환자 감시 장치의 기계음은 규칙적이었다. 수술방 특유의 서늘한 공기는 살갗을 휘어 감았다.
독한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집도의는 대진.
제1어시스트이자 감독관은 3년 차 상혁.
소독 간호사는 대진 옆에 자리를 잡았고.
준후는 상혁의 옆에 자리 잡았다.
“많이 떨리지? 실수하면 어떻게 될까 걱정도 되고.”
상혁이 대진의 심정을 다 이해한다는 말투로 말했다.
“아까 전까지는 막 도망치고 싶었는데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어요.”
“오올~ 정말?”
“네. 준후가 마사지를 해준 다음부터 이상하게 침착해지더라고요.”
“긴장을 풀어주는 마시지도 있니?”
상혁이 준후를 바라보며 물었다.
“네. 제 마사지는 없는 것 빼고 다 있거든요.”
준후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긴장하는 대진을 위해 추궁과혈을 해주었는데 그 효과가 톡톡히 나타나고 있었다.
“아뻬 과정을 모르진 않을 테니 알아서 집도해 봐. 도중에 주의사항만 알려줄게.”
“네. 선배. 10번 주세요.”
대진이 비장한 표정으로 메스를 손에 쥐었다.
아뻬 수술은 무난했다.
스으으윽.
환자의 우하복부가 가로로 갈라졌다.
대진은 피부와 근육과 피하지방층을 차례대로 절개해나갔다.
이에 준후는 기다렸다는 듯.
견인기로 절개창을 상하로 벌린 후 고정형 견인기를 설치했다.
순간 수술 시야가 확 트였다.
주머니처럼 부풀어 있는 맹장.
그 끝에 꼬리처럼 붙어 있는 충수돌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서걱.
몇 번의 메스질로 충수돌기가 대장에서 분리되었다.
복부 봉합까지 포함해서.
아뻬 수술은 40분 만에 별 탈 없이 끝났다.
대진은 감격의 첫 집도 소감을 풀어놓았고.
준후는 이를 차분하게 들었다.
내색은 안 했지만 대진이 부러웠다.
대진은 직접 집도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니까.
준후도 미치도록 집도를 하고 싶었으니까.
외과의를 향한 준후의 열망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준후는 잠시 인턴이 아닌 레지던트가 되는 미래를 상상해 보았는데.
그 미래는 곧 현실이 되었다.
봄과 여름과 가을이 지나고 찾아온 겨울.
준후는 성형외과에서 수련 중이었다.
그리고 인턴 10개월 차.
다음 달에 레지던트 공개채용이 예정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