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115화
제20장 대결(5)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세상은 어느새 하얀색으로 물들었다.
거리, 나무, 사람, 자동차. 건물.
눈은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게 공평하게 내려앉았다.
갑작스레 쏟아진 눈에 관리과 직원들만 난리가 났다.
직원들은 빗자루와 눈삽을 들고 골칫거리 눈을 치우느라 분주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구나.
성형외과 당직실.
준후는 창밖의 풍경을 지켜보며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아련한 향수가 느껴졌다.
비슷한 풍경을 1년 전에 경험한 적이 있었다.
해부학 교수 보성에게 해부학 개인 수업을 듣고 의대를 떠났던 날이었다.
농구를 하다가 팔이 빠진 대학생을 금나수로 맞춰주었던 날이었다.
하지만 병원에서 근무하기를.
인턴이 되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준후는 이제 없었다.
지금의 준후는 인턴의 끝자락이었다.
레지던트가 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뭐야? 겨울 남자 코스프레냐?”
업무를 보고 있던 수철이 농담조로 말을 걸었다.
“청승맞아 보였나요?”
“뭐, 청승까지야. 그건 그렇고 전공은 정했어?”
“아니요. 아직.”
“이제 2주밖에 안 남았어. 망설일 시간이 없다고.”
수철의 재촉에 준후는 머쓱하게 웃었다.
시간이 부족하다는 건 알았지만 아직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어느 과를 전공으로 삼아야 할지.
“준후야. 우리 한번 생각해 보자. 일단 무조건 외과로 갈 거지?”
“네.”
이 대답만큼은 1초의 망설임도 없는 준후였다.
“대학병원 남으면 고난이도 수술을 할 수 있고. 개원하면 돈을 벌 수 있는 과가 어디일 것 같아?”
“정형외과랑 성형외과겠죠?”
“자. 그럼 선택지가 두 개로 좁혀졌네?”
수철이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근데 네 섬세한 처치를 살릴 수 있는 과라면 역시 성형외과 아니겠냐?”
수철이 준후의 성형외과행을 유도했다.
하지만 성형외과가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알아도.
준후는 선뜻 결정을 못 했다.
“말씀은 고마운데 좀 더 생각해 볼게요.”
“일은 척척 끝내면서 이런 쪽으로는 은근히 우유부단하다?”
“뭐랄까. 어느 과도 확 끌리지가 않아서요. 휴. 저도 답답해 죽겠어요.”
띠리리링~
때마침 울리는 전화기.
전화를 받은 수철은 네네 하고 건성건성 대답하다가 통화를 끊었다.
“응급실에 7살짜리 라세레이션 환자(lacerlation, 열상, 찢어진 상처) 왔단다. 책상 모서리에 눈썹 위쪽이 찢어졌대.”
일반적인 상처는 응급실에서 자체적으로 봉합하지만.
환자의 얼굴에 상처가 있는 경우.
성형외과 콜이 뜨곤 했다.
봉합 부위가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다.
“우리 준후, 출동 가능?”
준후는 고개를 끄덕이고 가볍게 손목을 풀었다.
“물론이죠.”
* * *
응급실 신규 간호사 정서연은 한 의사를 주목하고 있었다.
방금 막 응급실에 도착한 의사는 키가 훤칠하고 잘 생겼다.
의사가 아니라 의학 드라마에 나오는 남자 배우 같았다.
아우라가 남달라서 그럴까.
그 의사가 등장하자 응급실에 있던 모든 여자 직원의 시선이 전부 그 의사에게 쏠렸다.
사람 보는 눈은 다 똑같구나.
입가에서 웃음이 새어 나오는 서연이었다.
“성형외과에서 왔습니다. 소아 라세레이션 환자가 있다고 하던데.”
그 의사가 서연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가운을 확인하니 의사의 이름이 서준후였다.
“아, 네. D구역 3번 베드입니다. 제가 처치 도구 챙겨서 갈게요.”
“네. 감사합니다.”
서연은 드레싱 카트에 봉합 도구를 챙겨 준후의 뒤를 쫓았다.
준후는 허리를 낮춰 아이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아이의 눈썹 위에 생긴 상처를 살피고 있었다.
열상은 눈썹과 이마 중간쯤 위치했는데 엄지 두 마디 정도로 길게 찢어져 있었다.
봉합은 결코 쉬워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 흉터 없이 꿰매주셔야 해요. 얼굴에 흉터가 남으면 곤란하다고요.”
동행한 보호자가 준후를 은근히 압박했다.
그래서일까.
서연은 보호자가 진상처럼 느껴졌다.
저렇게 상처가 길고 깊은데.
어떻게 흉터를 안 남기고 꿰맨단 말인가.
의사라고 해서 모든 치료가 가능한 건 아니었다.
“저도 해연이 얼굴에 흉터가 남는 걸 원치 않습니다.”
“그럼 잘해주실 거죠? 흉터 남으면 따지러 와요?”
“네. 그러시죠.”
준후가 자신 있게 대답하고 서연이 챙겨온 드레싱 카트를 훑었다.
“정 선생님. nylon 5-0을 6-0로 바꿔주실래요?”
“그럼 너무 힘들지 않을까요?”
서연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봉합사는 숫자가 커질수록 얇아진다.
얇아질수록 상처가 덜 남고 정교한 봉합이 가능하지만.
반대로 힘 조절을 잘못할 경우 봉합사가 쉽게 끊어지곤 했다.
환자에게 6-0 봉합사를 쓴다면.
준후는 고전을 면치 못할 것 같았다.
“제가 힘든 건 상관없습니다. 아이가 힘들지 않은 게 중요하죠. 어린아이 얼굴에 흉터가 있으면 그건 마음의 상처가 될 수도 있거든요.”
준후의 말은 따뜻했다.
바깥에서 펑펑 내리고 있는 눈을 녹여 버릴 정도로.
잘생겼는데 마음씨까지 곱다니.
이건 사기잖아?
“네. 선생님. 말씀대로 할게요.”
서연이 봉합사를 챙겨오자 부분 마취가 끝난 상태였다.
주사가 싫다며 아이가 한바탕 난리를 칠 줄 알았건만.
의외로 베드는 평화로웠다.
“해연아. 지금 어때? 아픈 데는 없지?”
“네. 선생님.”
“선생님이 흉터 없이 빨리 끝내줄게.”
수술 장갑을 착용한 준후가 봉합을 시작했다.
와. 대박이잖아!
준후의 봉합을 지켜보며 서연은 감탄하기 바빴다.
준후의 손놀림이 야무졌다.
떨림은 없었고 망설임도 없었다.
보호자가 도끼눈을 뜨고 지켜보고 있음에도 부담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 눈치였다.
봉합법도 특이했다.
준후는 서연이 알고 있는 봉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난생 처음 보는 봉합법을 시도 중이었다.
뭐랄까.
어폐가 있을 수도 있지만 봉합법이 예쁘다고 해야 할까.
“선생님. 뭐 하세요. 매듭 잘라주셔야죠.”
“아. 네. 죄송합니다.”
찰칵!
서연이 첫 번째 매듭을 잘랐다.
이어서 두 번째 매듭도 잘랐다.
가속도가 붙었는지 준후의 봉합은 갈수록 빨라졌다.
총 7바늘이 3분 만에 꿰매졌다.
봉합사가 끊어지거나 엉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꿰맨 자리는 워낙 깔끔해서 정말 흉터가 남지 않을 것 같았다.
“해연아 끝났다. 눈 떠도 돼?”
“정말요? 벌써 끝났어요?”
“그럼.”
“감사합니다. 선생님.”
아이가 해맑게 웃었고 준후도 해맑게 웃었다.
잔뜩 긴장해서 봉합을 지켜보고 있던 보호자의 표정도 풀렸다.
의술을 모르는 보호자의 눈에도 준후의 봉합이 범상치 않았던 것이다.
“감사하고 죄송해요. 선생님. 제가 괜히 윽박을 질러서…….”
“…….”
“뭔가 세게 나와야 선생님이 더 잘해주실 거라는 못된 생각을 했지 뭐예요.”
“아이 얼굴에 흉터가 생긴다고 하면 예민하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어요? 이해합니다.”
“…….”
“동네 의원에서 매일 소독 받다가 봉합사를 제거해달라고 하시면 됩니다. 보통은 5일이니 참고하세요.”
“네. 선생님. 감사해요.”
보호자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환자와 보호자가 떠나면서.
베드는 텅 비었고 준후와 서연만이 자리에 남았다.
“선생님. 진짜 최고네요. 6-0로 봉합하실 줄은 몰랐는데.”
서연은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5-0 봉합사와 6-0 봉합사.
숫자가 조금 달라진 것뿐이지만 그 차이는 사실 엄청났다.
5-0 봉합사가 머리카락 굵기라면.
6-0 봉합사는 머리카락 굵기보다 두 배는 더 얇았다.
그만큼 정교하고 세밀한 솜씨가 필요했다.
“해야죠. 환자와 보호자가 원하면.”
“근데 만약에 실패했으면 어쩌려고 그러셨어요?”
“그런 생각은 아예 안 해봤는데요?”
“네? 그럼 막무가내로…….”
“그런 뜻으로 오해하시면 곤란하죠.”
준후가 미소 띤 채 말을 이었다.
“실패할 것 같았으면 아예 시도도 안 했을 거란 뜻이에요.”
“…….”
“저는 실력을 키워서 환자에게 더 많은 걸 해주고 싶습니다.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고 놓쳐 버린 사람들이 너무 많았거든요.”
준후의 눈빛에 얼핏 애처로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무언가 깊은 사연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잘생기고.
처치도 잘하고.
따뜻한 마음씨를 가졌고.
심지어 말 못 할 상처를 가진 의사라니.
이거 완전히 의학 드라마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아니야?
서연은 갑자기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근데 선생님. 저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될까요?”
“얼마든지.”
“아까 무슨 봉합법으로 봉합하신 거예요? 저는 처음 봤는데.”
“연속매몰 봉합법입니다. 보통 성형외과에서 많이 사용해요. 흉터와 상처를 최소화하는 봉합법이죠.”
“아. 그렇구나.”
“고생하셨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선생님도 고생하셨습니다.”
서연은 멀어지는 준후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스테이션으로 돌아왔다.
준후와의 만남이 깊은 여운으로 남았다.
“선생님. 성형외과 서준후 선생님. 장난 아니던데요?”
“응급실에서는 유명해. 네가 신규라 모르는 거야.”
곁에서 근무 중이던 3년 차 간호사 미나가 말했다.
“더 재밌는 거 알려줄까?”
“뭔데요?”
서연이 귀를 쫑긋 세웠다.
“준후 선생님. 레지던트, 아니야. 인턴이야.”
“네? 인턴 선생님이 응급실에 내려와서 환자 얼굴을 봉합해요? 그래도 되는 거예요?”
“그래도 되더라고.”
미나가 피식 웃었다.
* * *
진료를 마친 준후는 성형외과 병동으로 바로 가지 않았다.
로비를 통과해 병원 출입구 앞에 섰다.
눈발은 여전히 거셌다.
바람도 매몰차게 불어왔다.
환자와 보호자, 직원들은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병원 안과 바깥을 드나들기 바빴다.
말턴(말년 인턴)임에도 준후는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아프다는 사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생로병사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처럼 보였다.
준후라고 다를 바 없었다.
이미 무림에서 한 번 죽었으며.
현대에서도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될 테니까.
중요한 건 죽기 전까지 어떤 삶을 살았느냐겠지.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면.
후회 없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테고.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해 준후는 이제 선택을 해야 했다.
세계 최고의 외과의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구체화해야 했다.
전공을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욕심 같아서야 모든 외과 분야를 정복하고 싶었지만. (트리플 보드 의사 등이 간혹 존재하니까.)
전공은 택해야 했다.
트리플 보드 외과의 역시 결국은 전공 범위를 넓혀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말이다.
가장 첫 번째로 전공 삼을 과목은 뭐가 있을까.
정형외과.
성형외과.
신경외과.
흉부외과.
소아외과.
소화기 외과 등등.
많은 과가 준후의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선택은 쉽지 않았다.
준후의 마음속에 맹렬한 불꽃을 일으키는 과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원하는 과목은 어디일까.
나를 이끌어줄 과목은 어디일까.
어떤 과목에서 큰 보람을 느낄 수 있을까.
질문은 많고 많았지만 되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사이 수많은 환자와 보호자, 스태프들이 준후를 지나쳐 본관을 드나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오직 준후만이.
갈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