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116화 (115/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116화

제21장 팔찌(1)

“고생했다. 준후야.”

준후가 당직실로 복귀하자 수철이 감사 인사를 했다.

“아뇨. 이 정도야, 뭐. 봉합 잘했냐고는 안 물어보세요?”

“어련히 잘했겠지. 그리고 만약 네가 제대로 못 했으면 보호자가 벌써 전화하고 난리 쳤을걸?”

수철이 준후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준후가 성형외과에서 2주간 수련하면서 보여준 활약 덕택이었다.

주변 동료에게 인정받는 것은 언제나 뿌듯한 일.

준후의 입가에서 어느새 미소가 피어났다.

“계속시키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소아 병동 라운딩도 좀 갔다 올래?”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제 일인데요.”

준후는 서랍장에서 비밀 병기를 챙겨 가운 주머니에 넣었다.

스카이 브릿지를 통해 어린이 병원으로 이동했다.

어린이 병원은 본원과 분위기부터 달랐다.

인테리어가 아기자기했다.

벽지는 원색으로 알록달록했고 접수대, 건물 기둥에는 꽃과 나무, 동물 캐릭터 등이 그려져 있었다.

소아 환자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기 위한 병원의 고육지책이었다.

하지만 준후의 눈에는 어린이 병원의 화려한 인테리어가 오히려 서글프게 보였다.

억지로 밝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 같아서.

4층 소아 성형외과 병동.

목적지에 도착해서 준후는 드레싱 카트를 끌고 병동을 돌았다.

병동 잡을 시작했다.

드레싱을 하고 붕대를 갈아주고.

실밥을 뽑아주고 ABGA 채혈을 하고 등등.

환자의 대부분은 3세에서 10세 사이의 소아였다.

안면 기형, 선천성 족부 기형.

구순구개열, 외상 후 흉터 등등.

다양한 사연과 다양한 질환을 가진 소아들이 수술을 받았으며.

또는 수술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수술 후 회복 중이었다.

소아 병동만 찾으면 준후는 유독 가슴이 아렸다.

올곧고 행복하게 자라기도 바쁜 아이들이었다.

그런 아이들이 질병으로 고통받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견디기 힘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소아외과는 다른 분야보다 서전의 숫자가 극심하게 부족했다.

수술이 까다롭고 대학병원에서만 할 수 있으며.

들이는 공에 비해 보상도 적었던 탓이었다.

환자와 스태프들.

즉 둘 다 고통받는 곳이 바로 소아외과 병동이었다.

“으아아앙. 싫어요. 아파요. 안 할래요.”

준후가 한 병실에 들어서기 무섭게 준후를 발견한 아이 하나가 울었다.

8세의 최성진.

귀가 덜 발달 되는 소이증 수술을 어제 받은 아이였다.

준후는 아이의 귀를 소독하기 위해 병실을 찾았다.

“성진아. 뚝! 빨리 치료받고 퇴원해야지.”

보호자가 아이를 타일렀다.

막 병실에 들어온 준후를 힐끔 쳐다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인사 대신이었다.

준후도 간단한 목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너무 따갑고 쓰라려요. 치료받기 싫어요.”

아이는 막무가내였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 치료를 거부했다.

익히 예상했던 바라 준후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전에 아이를 드레싱 했던 짝턴 지호는 이렇게 말했다.

-소아 병동 가면 너도 고생 좀 할 거다. 성진이라는 애가 있는데 성깔이 보통이 아니야.

“성진이, 너 자꾸 이럴래? 엄마 화내는 거 보고 싶어?”

보호자가 완력으로 이불을 걷어내려고 했지만 준후는 그런 보호자를 만류했다.

“저한테 맡겨주세요. 성진아.”

“왜요?”

“이불 바깥으로 나오면 선생님이 재미있는 거 보여줄게.”

“거짓말이잖아요. 선생님들은 맨날 거짓말만 하고.”

담요 안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이 거짓말하는 거면 도로 이불 뒤집어써도 돼.”

“정말요?”

“그럼.”

준후의 말에 아이가 담요 바깥으로 머리만 빼꼼 내밀었다.

비장의 무기가 활약할 시간인가.

준후는 가운 주머니에서 작은 고무 공 10개를 꺼냈다.

한 달 전에 구입한 저글링 전용 공이었다.

휙. 휙. 휙. 휙.

준후는 양손으로 저글링을 했다.

날랜 손놀림과 함께 10개의 공이 밤새도록 돌아가는 관람차처럼 빙빙 돌았다.

실로 장관이었다.

서너 개의 공도 아니고 무려 열 개의 공으로 저글링을 하는 중이었으니까.

준후의 쇼(?)는 금방 다른 환자와 보호자들의 눈길까지 끌었다.

다들 넋을 잃은 채 준후를 쳐다보기 바빴다.

공이 돌고.

환자와 보호자의 눈이 돌고.

환자와 보호자의 고개도 같이 돌아갔다.

이 정도야 껌이지.

준후는 속으로 웃었다.

정형외과 수련 때부터 익히기 시작한 양수 호박 기술.

양손으로 가위바위보를 하는 수련이 저번 달에 끝났다.

이제 준후는 양손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었다.

그래서 저글링 같은 묘기도 부릴 수 있었다.

“와. 선생님! 서커스도 할 줄 알아요?”

준후가 저글링을 끝내자 아이가 감탄했다.

갑옷처럼 칭칭 두르고 있던 담요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어때? 신기하지? 성진이도 배우고 싶지 않아?”

“네! 배우고 싶어요.”

“그럼 선생님한테 잘 치료받으면 가르쳐줄게. 어때?”

“으…… 치료받을게요.”

저글링으로 환심을 산 후에야.

준후는 간신히 드레싱의 기회를 얻었다.

아이 머리에 두른 붕대를 풀자.

형태가 온전하지 않은 아이의 왼쪽 귀가 드러났다.

또래와 다른 귀 때문에.

아이는 얼마나 놀림을 받고 마음에 상처를 받았을까.

특히 성진이는 귀 때문에 청력도 나쁘다고 들었는데.

팟. 팟. 팟.

본격적인 드레싱에 앞서.

준후는 아이의 귀 주변을 검지로 점혈했다.

드레싱은 그다음이었다.

스으으윽.

스으으윽.

소독액이 묻은 솜이 동심원을 그리며 나아갔다.

드레싱은 2분 만에 끝났다.

준후는 아이의 머리에 다시 붕대를 감아주었다.

“선생님. 근데요.”

“응. 왜?”

“이상하게 선생님이 소독하니까 하나도 안 아파요.”

“그러니? 성진이가 저글링을 너무 배우고 싶었던 것 같은데?”

준후는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안 아플 수밖에…….

미리 진통 점혈을 해 놨으니까.

“자. 받으렴. 처음에는 두 개로만 해보자.”

준후는 고무공 두 개를 성진에게 건넸다.

저글링하는 요령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사실 저글링 자체가 의미 있는 건 아니었다.

중요한 건 희망이었다.

희망이란 인간이 자체적으로 창조할 수 있는 최고의 진통제였다.

손에서 공을 굴리기 시작하면서.

아이의 표정은 과연 행복에 물들어갔다.

“선생님. 감사해요. 이렇게까지 신경을 다 써주시고.”

“다른 분들보다 재주가 하나 더 있었을 뿐입니다. 그럼 이만.”

준후는 병실을 나와 드레싱 카트를 스테이션에 반납하고 성형외과 병동으로 복귀했다.

때마침 울리는 콜폰.

번호를 확인하고 준후는 통화를 연결했다.

-준후야. 나 대진이다. 오랜만이네. 슬슬 픽스턴 할 때 됐는데 소화기 외과 안 올래?

대진의 연락에 준후는 생각해 보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 걸려온 또 한 통의 전화.

이번 주인공은 정형외과의 현진이었다.

-준후스. 내가 왜 전화했는지 알지? 정형외과 꼭 지원해라. 안 하면 망치 들고 찾아간다?

그 후로도 여러 통의 러브콜이 왔다.

준후가 외과 지원자라는 것을 알고 각 외과에서 스카우트 전쟁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준후는 어느 과에도 속 시원한 대답을 주지 못했다.

* * *

5층 휴게실.

수술 스크럽을 마친 준후는 휴게실에서 우연히 성호와 마주쳤다.

성호와 캔 커피를 마시며 잡담을 나누었다.

성호는 3수생 형이자 의대 동기이자 병원 동호회에서 함께 축구 경기도 뛴 사이였다.

“야. 너 요새 뉴튜브 잘 나가더라? 수익은 얼마나 돼?”

“요즘은 줄긴 했는데 한 달에 200만 원 정도?”

준후가 대답했다.

멋모르고 시작한 준후의 뉴튜브는 이제 구독자가 30만.

동영상 평균 조회 수가 무려 15만에 달했다.

채널 떡상의 비결에는 두 가지 비결이 있었다.

하나 아이돌 안무 쇼츠 영상.

다른 하나는 해나였다.

해나는 준후가 진료비를 대신 내주었던 어르신의 손녀였다.

해나는 지애의 도움을 받아 소속사에 들어간 후.

트로트 대회 유아부에 출연했는데.

거기서 3등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지금까지 저를 도와주신 고마운 선생님이 있습니다. 서준후 의사 선생님이에요. 선생님은 저희 할머니 병원비도 내주셨고요. 항상 제가 잘할 수 있다며 용기를 주셨어요.

해나의 수상 소감 덕분에.

준후의 뉴튜브는 두 번째 전성기를 맞았다.

TV 방송의 위력도 아직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뭐야? 그렇게 잘 벌면서 지금까지 입을 싹 씻었어?”

“모아둔 돈은 별로 없어.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을 도왔거든.”

“형편은 나도 어려운데?”

“형은 제발 빠져줄래?”

성호의 농담을 준후도 농담으로 받았다.

준후는 캔 커피를 홀짝거리고.

전공 선택으로 화제를 돌렸다.

“형은 전공 정했어?”

“얼마 전에 정했다. 신경외과 가려고.”

“신경외과? 형이?”

준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평소 성호가 외과는 절대 안 가겠다며 못을 박았기 때문이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어? 신경외과면 외과 중에서도 빡센 곳인데?”

“말을 못 했는데 몇 주 전에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져서 수술받으셨어.”

“…….”

“그때 뭔가 가슴이 찌릿하더라. 내가 중요한 걸 외면하고 있었다는 느낌도 들고.”

성호의 고백을 준후는 쉽게 공감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자신의 어머니 역시 뇌동맥류 파열로 입원 치료를 받았다.

그때만 떠올리면 지금도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는 아찔했다.

“고생 많았겠네. 그래도 소식은 미리 알려주지.”

“그래서 지금 알려주잖아. 수술이 잘 끝나서 지금은 건강하게 회복 중이셔.”

성호가 준후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 준후 너만 남았네. 아영이는 흉부외과고 나는 신경외과고.”

“그러게.”

“아직 시간 남았잖아. 천천히 생각해 봐. 하늘이 네 전공을 점지해 줄 수도 있어.”

“갑자기 웬 하늘 타령? 팔찌도 그런 맥락이야?”

준후는 피식 웃으며 검지로 성호의 손목을 가리켰다.

성호는 손목에는 게르마늄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건강에 좋다며.

인체 건강에 유익한 원적외선을 방출한다며.

게르마늄 팔찌가 한때 유행했는데 그건 전부 사기였다.

그건 전부 상술이었다.

“이거…… 엄마가 건강하라면서 챙겨 준건데…….”

성호의 말에 준후는 괜히 뜨끔했다.

이런…….

여기서 어머니가 나올 줄이야.

“과학적으로 증명은 안 됐지만 효과가 있을 수도 있지. 세상은 신비한 곳이잖아? 심리적인 효과도 기대할 수 있고.”

“서준후, 태세 전환 오진다?”

“태세 전환이 아니라 형이 내 말을 끝까지 안 들은 거지.”

“그럼 너도 쓰든가.”

성호가 가운 주머니에서 또 하나의 게르마늄 팔찌를 내밀었다.

뭐야?

도라에몽 주머니도 아니고.

왜 팔찌가 하나 더 튀어나오는 건데?

“어머니가 양 손목에 차라고 주셨는데 너무 눈에 띄어서 차마 그렇게는 못 하겠더라.”

“…….”

“왜 싫어?”

“…….”

“세상은 신비롭고 과학적으로 증명이 안 됐지만 효과가 있을 수도 있는데? 게다가 심리적인 효과도 기대할 수 있고?”

성호가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준후의 논리를 고스란히 써 먹었던 것이다.

준후는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성호가 보는 앞에서 게르마늄 팔찌를 착용했다.

의사가 돼서 이런 유사과학에 관련된 팔찌를 착용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준후였다.

“이야. 잘 어울린다. 찰떡이네.”

“그…… 그런 것 같네.”

“나 오늘 대전 내려가는데 뭐 필요한 거 있어?”

“내일 오프구나. 아버님 만나러 가는 거지?”

“맞아.”

“필요한 건 없고 아버님이나 잘 뵙고 와.”

“짜식. 그럴 것 같더라. 성실당 빵이라도 사다 줄게.”

잡담은 그렇게 끝났다.

성호와 헤어진 후.

준후는 게르마늄 팔찌를 슬쩍 빼서 가운 주머니에 넣었다.

* * *

그 날 저녁.

성호는 자가용을 몰고 대전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현재 시각은 새벽 1시.

국도는 칠흑같이 어둡고 을씨년스럽게 고요했다.

병원을 나서기 전.

피곤해서 KTX를 탈까 고민했던 성호였지만 결국 자가용을 선택했다.

모처럼 드라이브하며 바람을 쐬고 싶었다.

도로에 차가 없었으므로.

자동차는 거침없이 나아갔다.

도심과 달리 뻥 뚫린 도로를 질주하는 기분이 성호는 좋았다.

미리 틀어 놓은.

요즘 유행하는 댄스곡에 어깨춤이 절로 나왔다.

오랜만에 만끽하는 자유였다.

운전을 하던 중 성호는 문득 준후를 떠올렸다.

준후는 전공을 선택하지 못해.

퍽 괴로워하는 눈치였다.

분명 욕심도 많고 재능도 많아서 그런 것이리라.

준후는 의대에 다닐 때부터 그런 아이였다.

환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이.

훌륭한 외과의가 되기 위해 전력으로 노력하는 아이.

넌 어디를 가도 상관없어.

어디서든 잘할 거니까.

성호는 준후에게 그런 충고를 하려다가 말았다.

너무 흔해 빠지고.

너무 낯 간지러운 멘트 같아서.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말을 해줄 걸 그랬나 싶었다.

“어라?”

성호의 입가에서 문득 흘러나오는 얼빠진 소리.

반대편 차선에서 달려오는 트럭이 심상치 않았다.

뭔가 휘청거리는 느낌인데?

음주운전인가?

아니면 졸음운전?

불안함을 느낀 성호는 1차선에서 2차선으로 차선을 변경했다.

하지만 트럭은 그런 성호를 비웃기라도 하듯 중앙선을 침범해 성호의 자동차를 들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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