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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117화 (116/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117화

제21장 팔찌(2)

다음 날 오후.

점심시간을 맞아 준후는 구내식당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음식이란 단지 생존에 필요한 것이다.

끼니를 때울 수 있으면 그만이다.

무림에서 준후는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끼니 대부분을 라면, 샌드위치로 때우다 보니 오늘따라 유독 음식다운 음식이 당겼다.

돈가스. 된장국. 샐러드. 김치. 어묵 볶음.

식판에 음식을 그득 담아.

준후는 테이블에서 식사를 했다.

병동 잡을 마치고 1년 차에게 잠깐 허락을 받고 온 거라 같이 식사할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좋았다.

온기가 느껴지는 음식.

정성이 느껴지는 음식.

가공되지 않은 맛이 느껴지는 음식에 기분이 좋아졌다.

“급하게 먹다가 체하겠다.”

낯익은 목소리에 준후는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 아영이 앉았다.

아영도 혼자서 구내식당을 찾아왔다.

“아영이 너도 오늘은 여유 있나 보네?”

“응. 생각보다 오더가 없더라고.”

준후는 아영과 점심을 함께 하고 1층 야외 휴게실로 이동했다.

후식으로 캔 커피를 마셨다.

한겨울.

날씨는 쌀쌀했지만 바깥바람을 쐴 수 있어서 좋았다.

“난 요새 아영이 네가 참 부럽더라.”

“갑자기?”

“전공이 확실하잖아. 난 아직 전공을 못 정했거든.”

준후는 자연스레 고민을 털어놓았다. 전공에 대한 갈피를 못 잡은 지도 벌써 1주째였다.

생각은 갈수록 깊어졌고.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뻗어 나갔다.

준후는 여전히 헤매고 있었다.

준후는 여전히 방황하고 있었다.

“내 생각에 준후, 너는 욕심이 너무 많아서 그런 것 같아.”

“욕심?”

아영의 해석이 뜻밖이라 준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든 외과에 다 능통하고 싶으니까 딱 한 과를 못 고르는 게 아닐까?”

“으음……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준후, 너라면 트리플 보드 외과의도 가능하잖아?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지금 제일 마음이 가는 곳을 골라 봐.”

“…….”

“한 과목에서 전문의를 딴 다음에 또 다른 과목 전문의를 따도 되는 거니까.”

똑순이답게 아영은 조언도 똑 부러졌다.

선배들은 본인 과에 오라고 다들 난리를 치고 있건만.

아영은 해석이 달랐다.

우선 준후의 근본적인 욕망을 꿰뚫어 보았으며.

트리플 보드를 언급하며 준후의 부담까지 덜어주었다.

“그것도 아니면 수련했던 과 중에서 선택하는 건 어때?”

“수련했던 과라…….”

준후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캔 커피를 홀짝거렸다.

인턴 생활 10개월 차.

준후가 지금까지 수련한 외과는 딱 세 곳이었다.

정형외과.

소화기 외과.

성형외과.

아쉽게도 신경외과와 흉부외과는 가보지 못했다.

앞으로 남은 1달의 수련 기간 동안 갈 일도 없었고.

인턴이 수련하는 과목은 랜덤이라서 인턴이 직접 고를 수가 없었다.

정형외과. 소화기 외과. 성형외과.

셋으로 범위를 좁히면.

확실히 결정하기는 편하겠어.

“그동안 들었던 조언 중에 아영이 네 조언이 제일 마음에 든다. 고마워.”

“도움이 됐다니 기뻐.”

아영이 배시시 웃었다.

아영의 웃는 모습이 참 예쁘다고 준후는 스치듯 생각했다.

“슬슬 올라갈…….”

준후는 말문을 다 잇지 못했다.

가운 속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진동은 콜폰이 아닌 휴대폰에서 느껴졌다.

“……!”

휴대폰 문자를 확인하고 준후는 두 눈을 의심했다.

말도 안 돼.

이거 거짓말이지? 장난이지?

“준후야, 너도 문자 받았어?”

아영도 문자를 확인하고 휘둥그레진 눈으로 준후를 쳐다보았다.

준후는 넋 나간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 * *

준후는 문자를 받은 날이 어떻게 지난 건지도 몰랐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하루가 지나 있었다.

준후는 선배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연차를 냈다.

황급히 대전행 KTX에 몸을 실었다.

준후의 곁에는 아영이 앉아 있었다.

“…….”

“…….”

도란도란 대화가 꽃 피어야 할 상황이었지만 두 사람 다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어제 받은 충격적인 문자 때문이었다.

[성호 엄마입니다. 부득이하게 성호 번호로 연락했어요. 사실 어제저녁에 우리 성호가…….]

준후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차창을 바라보았다.

그 위에 어제 받은 장문의 문자 내용을 떠올려 보았다.

내용은 이랬다.

성호가 차를 몰고 대전으로 내려가다가 반대편 차선에서 달려오던 트럭과 충돌했다는 것이다.

문자를 읽던 당시.

준후는 한 문장, 한 문장에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다가 수술이 잘 끝났다는 부분에서 크게 안도했는데.

이는 섣부른 착각이었다.

마지막 문장은 적일도가 휘두른 검처럼 준후의 가슴을 사정없이 베어버렸다.

[우리 성호, 뇌사래요.]

뇌사라고 했다.

성호가 뇌사라고 했다.

의사로서 뇌사라는 단어는 몇 번 접했지만.

뇌사 옆에 성호의 이름을 붙이니 한없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게 정녕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성호와 일상적인 잡담을 나눴는데.

웃고 떠들고.

팔찌도 선물 받았는데.

성호가 갑자기 뇌사라니…….

이건 하늘의 농간이자 심술이자 착오인 게 분명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준후는 성호의 뇌사 소식을 계속 부정하고 있었다.

두 눈으로 성호의 상태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믿지 않을 작정이었다.

의사들이 뇌사 판정에서 실수를 하지 않았을까.

너무 섣부른 판단을 내린 건 아닐까.

준후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음에도.

준후는 자신의 몸이 허공에 붕 뜬 것 같았다.

현실감은 여전히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이건 악몽이야.

* * *

대전에 위치한 지역 외상센터 병원.

준후는 아영과 로비를 통과해 중환자실로 이동했다.

대기실 의자에 한 쌍의 중년 부부가 앉아 있었다.

“혹시 성호형 부모님이신가요?”

“아. 네. 맞아요. 혹시 성호 친구분들인가요?”

성호의 어머니가 준후를 쳐다보며 물었다.

어머니의 눈동자는 빨갰다.

눈 밑으로는 눈물 자국이 번져 있었다.

“고마워요. 병원에서 일하느라 바쁠 텐데 한걸음에 와줘서.”

“…….”

“어쩐지 두 사람한테는 연락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연락 드렸어요.”

“감사합니다.”

준후는 비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부모님을 통해 준후는 문자 바깥에 있던 사건의 진상도 들었다.

성호를 뇌사로 내몬 가장 큰 원인.

그것은 바로 허술한 외상 의료 시스템 때문이라고 했다.

지방이기 때문일까.

교통사고 당시.

성호가 급하게 뇌수술을 받을 대학병원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성호는 종합병원 몇 곳을 떠돌다가.

교통사고 발생 2시간 만에야 간신히 외상 의료 센터로 이송되었다고 한다.

골든 타임이 지났기에 그때는 신경외과 의사조차 손 써볼 겨를이 없었다고 한다.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었고.

촌극도 이런 촌극이 없었다.

성호 부모님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준후의 가슴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혹시 성호 형을 볼 수 있을까요?”

“간호사한테 말하면 될 거예요.”

“네. 일단 성호 형을 보고 자세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준후는 일부러 성호의 부모님을 위로하지 않았다.

아직 성호의 뇌사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성호의 뇌사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호사에게 통 사정을 해서.

준후는 아영과 중환자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성호는 입구 쪽 베드에 누워 있었다.

준후가 처음 보는 모습으로.

뇌수술을 받은 탓에.

성호는 머리가 스님처럼 파르라니 깎여 있었다.

산소마스크를 착용했으며.

중심정맥관과 연결된 다양한 수액줄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말 그대로 산송장 같았다.

목구멍으로 치솟아 오르는 탄식을 억지로 삼키며.

준후는 성호의 손을 잡았다.

성호의 손은 아직 따뜻했다.

“선생님. 뇌사 판정은 확실한 겁니까?”

준후는 곁에 있던 간호사에게 물었다.

“네. 뇌사 판정 위원회 선생님들께서 아침에 판정을 내리셨어요.”

“그분들이 실수했을 가능성은요? 뇌사가 아니라 식물인간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준후는 공격적으로 물었다.

뇌사와 식물인간은 달랐다.

뇌사 상태에서는 자발적 호흡 및 회복이 불가능했다.

기계 장치로 사람을 억지로 살려 놓는 것이라고 보면 됐다.

반면 식물인간은 자발호흡이 가능했다.

더러 의식을 회복하는 케이스가 있었다.

“저희 선생님들은 다 전문가입니다. 의심하실 필요가 없어요. 친구분이 안타까운 일을 당해 상심이 크신 줄은 알지만…….”

“사람을 못 살리는 사람이 무슨 전문가라는 겁니까?”

준후는 자신도 모르게 간호사에게 화를 냈다.

간호사가 죄가 없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그랬다.

두려웠던 것이다.

성호가 정말 뇌사라는 사실이.

성호를 맥없이 떠나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준후야. 이러지 마. 너답지 않아.”

잠자코 있던 아영이 준후를 만류했다.

“……내가 너무 흥분했나 봐. 죄송합니다. 선생님. 사과드릴게요.”

“아니요. 이해해요. 근데 면회 시간은 오래 드릴 수가 없는데…….”

“금방 나가겠습니다.”

간호사가 자리를 비운 후.

준후는 조심스럽게 성호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성호의 눈동자에서 느낄 수 있었던 특유의 장난기는 없었다.

성호의 동공은 고정·확대되어 있었다.

뇌간반사가 상실된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성호의 뇌사는 틀림없어 보였다.

하지만 준후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가 없었다.

형.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이런 식으로 떠나면 안 되는 거잖아.

이별에도 예의와 절차가 있는 거잖아.

고작 하루 만에 이럴 순 없다고.

준후는 성호의 머리에 오른손을 올렸다.

단전에 있던 내공을 끌어올려 성호의 뇌 쪽으로 흘려보냈다.

내공에는 자연 치유 능력이 있었다.

그렇다면 내공으로 뇌사를 회복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고민할 필요도 없이.

준후는 단전에 있는 내공을 몽땅 성호의 뇌에 집중시켰다.

살아나라고.

눈을 뜨고.

예전처럼 말을 하라고.

난 이런 결과 용납할 수 없어.

내공 치료를 시작한 준후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

온몸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털썩!

“꺄아아악! 준후야!”

무리하게 진기를 운용하던 준후는 그만 혼절하고 말았다.

* * *

“으으으으.”

준후는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뿌연 시야로 주변을 둘러보니 응급실이었다.

“준후야 정신이 좀 들어?”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걱정스러운 표정의 아영이 보였다.

“성호 형은 어때?”

“갑자기 성호 오빠는 왜?”

“혹시 뇌사 상태에서 벗어나진 않았어?”

“그럴 리가…… 없잖아.”

아영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아…….

순간 준후의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탄식.

내공으로 뇌사를 치료하겠다는 발상은 실패로 돌아갔다.

내공은 분명 초월적인 힘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기적이 가능한 건 아니었다.

최후의 수단까지 물거품이 됐기 때문일까.

준후는 구멍이 뚫린 것처럼 가슴이 허전했다. 앞으로 이 구멍을 메울 자신도 없었다.

“준후야. 너 정말 괜찮은 거지? 오늘은 너답지 않게 불안해 보여. 간호사한테 화를 냈던 것도 그렇고. 성호 오빠 머리에 갑자기 손을 얹은 것도 그렇고.”

“…….”

“물론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미안.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네.”

준후는 이마에 손을 얹으며 쓰게 웃었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외과의를 꿈꿨건만.

소중한 사람이 뇌사 판정을 받았다.

물론 준후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었지만 그런데도 고통스러운 건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성호의 뇌사가.

준후가 무림에서 잃어버린 동료들의 목숨까지 떠오르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준후는 몇 배로 더 아팠다.

의식을 차린 준후는 곧바로 응급실 퇴원 수속을 밟았다.

지금 아픈 건 육신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그 어떤 수액도, 주사도 준후를 편하게 해줄 수는 없었다.

“잠깐 바람 좀 쐴까?”

“그러자.”

준후는 아영의 제안을 순순히 따랐다.

본관을 나와 병원에 마련된 공원을 거닐면서 준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대전의 하늘은 어두웠다.

어느새 싸락눈을 쏟아내고 있었다.

성호와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눴던 어제도 눈이 왔었는데.

대전의 눈은 서울의 눈보다 한 박자 느렸다.

-그러니까 너도 앞으로는 걱정이나 불안함 같은 거 마음속에 담아두지 말고 나나 아영이나 다른 선배들한테 말해줬으면 좋겠다.

-진짜 큰 태풍을 이겨낼 수 있는 건 거목이 아니라 풀이래. 거목은 태풍을 이겨내려다가 부러지고 풀은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니까.

준후는 문득 어제 성호가 해줬던 조언을 떠올렸다.

성호는 멀리 떠나고 없었지만.

성호의 말은 아직 준후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아영아. 너도 힘들지?”

“……응. 가슴이 너무 답답해. 화가 나기도 하고. 서럽기도 하고.”

아영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힘들어. 이런 적은 처음인 것 같아.”

준후는 아영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약한 모습을 내보였다.

혼자서는 도무지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아영에게 기대고 싶었다.

“괜찮아. 준후야. 괜찮아.”

아영이 준후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준후는 그제야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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