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118화
제21장 팔찌(3)
“젊은 총각하고 처녀가 일찍도 왔네. 오후에는 일이 없나 봐?”
준후와 아영이 술집에 들어서자 주인아주머니가 살갑게 말을 건넸다.
“아. 네.”
아영이 대답했다.
“날씨도 추우니까 이쪽으로 와. 따뜻하니까.”
아주머니를 따라 도착한 구석 자리는 말 그대로 따뜻했다.
손님을 위해 미리 데워놓은 자리는 아닐 테고.
방금까지 아주머니가 앉아서 쉬던 자리일 것이다.
그래도 아주머니의 정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소주 한 병 주시고. 안주는…… 제일 맛없는 안주는 뭐예요?”
“엥? 맛없는 안주?”
“네.”
“냉동으로 받는 튀김이 있기는 한데…… 기왕 술 먹을 거면 맛있는 거랑 먹어야지. 왜? 맛없는 안주랑 먹으려고 해?”
아주머니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죄짓는 기분이 든다고 해야 할까요. 오늘 좀 안 좋은 일이 있어서요.”
“성격 참 독특하네. 좋을 대로 해요.”
아주머니는 소주병과 잔을 내려놓고 부엌으로 이동했다.
아영은 준후에게 소주를 한 잔 따라주었다.
준후도 아영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잔을 비웠다.
아영은 침음성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오늘따라 소주가 너무 썼다.
목구멍에 쓴 약을 들이붓는 것 같았다.
소주는 기분에 따라 맛이 변하는 술이었다.
소주가 이렇게 쓴 걸 보면.
내 기분도 밑바닥까지 가라앉았구나.
……라고 아영은 생각했다.
다시 술로 채워지는 잔.
준후는 또다시 삽시간에 잔을 비웠다.
“…….”
“…….”
둘 사이의 대화는 거의 없었다.
술잔만 바쁘게 오고 갈 뿐이었다.
아영은 준후를 위로하기 위해 술집을 찾았지만 별다른 위로의 말은 건네지 않았다.
위로는 술에게 맡겼다.
많이 힘들어 보이네.
이런 모습은 진짜 처음 보는데.
고등학교 재학 시절부터 아영은 준후가 강철 같은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냉정하고 침착한 아이.
넘어지지도 쓰러지지도 않을 것 같은 아이.
실제로 준후는 계속 그런 면모를 보여 왔다.
어제 성호의 뇌사 소식을 접하기 전까지는.
같이 병원에 도착한 후.
준후는 힘없는 갈대처럼 휘청거렸다.
극심한 감정 기복을 보였다.
애꿎은 간호사와 말다툼을 벌이고.
급기야 성호의 머리에 손을 얹는 돌발 행동을 하다가 혼절해 버렸다.
성호의 뇌사가 준후에게 그만큼 충격이었던 것이다.
물론 아영도 슬펐다.
중환자실에서 기계에 의존해 숨만 쉬고 있는 성호를 봤을 때.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너무 비참한 기분이 들었고 하늘을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준후 때문에 내색은 못 했다.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준후가 기댈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슬픈 감정을 꾹꾹 눌러 두었다.
“의대에 다닐 때 정한이랑 같이 해서, 넷이 술 마시러 많이 다녔는데.”
준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앞으로 그럴 일은 없겠네.”
준후의 말은 가시가 되어 아영의 가슴을 찔렀다.
이제 성호와 술을 마실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
성호와 술을 마셨던 추억을 더듬는 것뿐이었다.
뇌사에 빠진 성호와는 더 이상 추억을 만들 수 없었다.
“그러게. 하늘도 참 무심하시지. 성호 오빠한테 왜 이런…….”
“아영아.”
“응. 내 걱정 말고 너도 술 마셔. 너도 괴롭잖아.”
준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준후의 눈빛이 아까보다 고요했다.
평소 아영이 알던 준후로 돌아오고 있는 듯했다.
“내가 폭주할까 봐 감정을 누르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럴 필요 없어. 이젠 네 차례야.”
준후가 말로 아영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아냐. 난 진짜 괜찮아.”
“괜찮을 리가 없어. 마음이 여린 걸로 따지면 아영이, 넌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도 세 손가락에 들어.”
“…….”
“지금 누구보다 슬플 사람이 너라고.”
“…….”
“이젠 네가 나한테 기대도 돼.”
철옹성으로 지키고 있던 마음의 성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한 번 무너진 성벽을 걷잡을 수가 없어서 아영은 어깨를 떨며 흐느꼈다.
눈물이 소주잔으로 떨어져 내렸다.
* * *
그 날 저녁.
준후는 만취한 아영을 모텔에 눕혀 놓고 다시 병원을 찾았다.
거칠고 산만했던 눈발은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준후의 마음처럼 평화를 되찾았다.
준후는 모텔 입구에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생과 사는 동전의 양면일세. 한쪽을 떼어놓으면 어느 한쪽도 성립할 수 없는 것이지.
-자네는 좀 더 초연해질 필요가 있어. 인간의 감정을 내려놓고 묵묵히 그것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하네.
-화경을 넘어 현경의 경지에 접어들고 싶다면 부디 내 미천한 충고를 기억하게나.
무림 제일검이라고 불리던 무당파의 장문인이 과거 해주었던 말을 준후는 문득 떠올렸다.
물론 좋은 말이었지만.
준후는 지금도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인간이 인간의 감정을 초월한다면 그게 인간일까.
예전이나 지금이나.
준후는 희노애락과 더불어 사는 인간이고 싶었다.
저는 인간에게 주어진 감정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감정이 존재한다면 감정이 존재하는 이유도 분명 있을 테니까요.
장문인과 달리, 저는 인간답게 강해질 겁니다.
터벅. 터벅.
준후는 모텔촌을 벗어나 다시 병원을 찾았다.
성호를 잃은 상실감이 아직 쓰라렸지만 참아냈다.
준후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걸 성호는 원치 않을 테니까.
보호자 대기실에.
성호의 부모님은 없었다.
저녁 식사를 위해 잠시 비운 모양이었다.
“선생님. 죄송한데 최성호 환자 면회 한 번만 더 부탁드립니다.”
“안 돼요. 아까도 소란 피우고 가셨잖아요.”
준후의 부탁에 ICU 간호사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일은 아직도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딱 1분이면 됩니다. 1분도 안 될까요?”
“…….”
“부끄러운 일은 이제 하지 않을 겁니다. 약속드려요.”
“그럼 진짜 딱 1분 만이에요?”
“네. 감사합니다.”
준후는 간호사를 설득해 중환자실 안으로 들어갔다.
돌아온 중환자실은 죽음의 기운으로 가득했다.
환자들 대부분은 의식이 없었다.
기계 장치와 수액 약품, 주사약으로 간신히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독한 소독약 냄새.
문드러진 살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삐이이이.
삐이이이.
환자 감시 장치의 기계음은 여전히 차갑고 무뚝뚝했다.
준후는 성호가 누운 베드로 이동해 성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그리고 힘없이 펴진 성호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형. 난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 형이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
“하지만 제일 억울한 사람은 역시 형이겠지?”
준후는 눈물이 터지는 것을 막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형은 다시 눈을 뜨지 못하겠지만 형의 의지는 살아 있을 거야. 내가 형의 뜻을 이어받을게.”
“…….”
“부디 하늘에서 지켜봐 줘. 형에게 부끄럽지 않은 외과의가 될 테니까.”
독백을 마친 준후는 곁을 지키고 있던 간호사에게 목례했다.
금방 중환자실을 빠져나왔다.
그로부터 3주 후.
평소 뜻에 따라 성호의 육신은 또 다른 생명들에게 나누어졌다.
화장된 유골은 납골당에 유치되었다.
그리고 또 한 달이 지났다.
* * *
출근 전.
준후는 방에서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준후의 자세도, 마음도 흐트러짐 없이 반듯했다.
깊은 들숨과 깊은 날숨.
호흡을 통해 얻은 자연진기는 전신혈맥을 떠돌다가 단전에 자리 잡았다.
이만하면 됐어.
눈을 뜨는 준후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그동안은 인턴 일이 워낙 바빠서 운기조식을 오래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투리 시간이 날 때마다 체력과 정신력을 회복하는 정도로만 운기조식을 해왔다.
그렇다고 해서 성과가 없었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꾸준한 수련을 통해.
준후는 오늘에서야 혈맥들을 막고 있던 탁기를 전부 몰아냈다.
덕분에 몸이 한결 가벼웠다.
내공의 순환도 훨씬 빠르고 자연스러워졌다.
준후는 가부좌를 풀고 방을 나섰다.
샤워를 하고 부모님과 아침 식사도 했다.
“오늘부터 레지던트라 더 바쁠 거예요. 집에 오기도 힘들고. 그래도 전화는 자주 드릴게요.”
“오냐. 우리 걱정은 하지 말고 준후 네 건강에 더 신경 쓰고.”
“힘든 일 있으면 혼자 끙끙 앓지 말고 연락해.”
“네. 사랑해요.”
부모님의 배웅 인사를 받으며 준후는 집을 나섰다.
계절은 아직 겨울이었다.
맞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칼날처럼 매서웠다.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뿜어졌다.
드디어 레지던트가 됐구나.
준후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레지던트가 되기를 준후는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인턴이 레지던트가 내리는 오더를 수동적으로 처리하는 입장이라면.
레지던트는 인턴보다 훨씬 능동적이었다.
인턴을 관리하고.
병동 환자의 주치의가 되고.
담당 교수와 상의해서 환자를 치료했다.
각종 처치 및 수술 어시스트 기회 또한 많았고 말이다.
할 일이 많아졌다는 사실이 준후는 오히려 좋았다.
맡은 일을 처리하면 할수록 더 성장하고 단련될 테니까.
“너무 빠른 거 아니야? 약속 15분 전인데?”
지하철역에 도착하자 먼저 기다리고 있던 아영이 보였다.
레지던트 첫 출근 날.
같은 동네에 사는 아영과 함께 병원에 가기로 약속한 것이다.
“그러는 준후, 너도 빨리 왔잖아. 피장파장 아닌가?”
“아영이 넌 30분 전에 도착했을 것 같으니까 그렇지.”
준후의 지적에 뜨끔했는지 아영이 시선을 피했다.
두 사람은 개찰구를 통과해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첫차 시간이었지만 의외로 지하철에 사람은 많았다.
잠이 덜 깬 사람들은 좌석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 바빴다.
“오늘부터 고생문이 훤하게 열렸네.”
아영이 한숨을 푹 쉬며 말을 이었다.
“흉부외과 지원자가 나뿐인 거 알아? 그것도 2년 만에 처음이래.”
“이야, 막내 중의 막내가 됐네?”
“응. 엄청 바쁠 것 같아. 오프는 꿈도 못 꾸겠어.”
“근데 의외로 괜찮을지도 몰라. 2년 만에 들어온 신입이니까 선배들이 얼마나 아끼겠어.”
“으음…… 어째 하나도 위로가 안 되는데?”
아영이 샐쭉한 표정으로 준후를 응시했다.
“하하하. 그렇지? 사실 진짜 위로는 따로 있어. 잠깐 뒤돌아봐.”
준후는 머쓱하게 웃고서 아영의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뭉친 근육을 풀어주고.
혈자리를 자극해 혈액순환이 원활하도록 도왔다. 추궁과혈이 가미된 어깨 마사지였다.
“힘들면 우리 과로 와. 내가 공짜로 안마해 줄게.”
“확실히 그건 위로가 되네. 아휴, 좋다. 역시 준후 네 손이 약손이라니까.”
기분이 풀렸는지 아영의 표정이 밝아졌다.
“준후, 너희 과는 레지던트 지원자 몇 명이야?”
“두 명.”
“생각보다 많네. 동기는 아는 사람이야?”
“타 대학 출신이라고 하더라. 나도 얼굴은 오늘 처음 봐.”
“그렇구나. 어쨌든 부럽다. 나도 동기가 있으면 든든할 텐데.”
아영과 잡담을 나누는 사이 지하철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역사를 빠져나와 5분쯤 걷자.
빅4 병원 중 하나인 신원대학교 병원 건물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도 파이팅.”
“아영이 너도.”
준후는 아영과 격려를 주고받은 후 헤어졌다.
아영은 본관 3층으로.
준후는 본관 7층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를 가로질렀다.
희멀건 동녘이 창가로 쏟아지고 있었다.
준후가 왼쪽 손목에 차고 있던 은색 게르마늄 팔찌가 동녘을 반사하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준후가 향하는 곳은.
신경외과 병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