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119화
제21장 팔찌(4)
신경외과 병동 숙직실에서 준후는 수술복을 챙겨 입고 의사 가운을 걸쳤다.
거울 앞에 서자 평소보다 스스로가 듬직해 보였다.
[신경외과 서준후]
가운 가슴팍에 적힌 신경외과라는 단어 때문일 것이다.
인턴 수련 시절.
준후의 가운에 적힌 단어는 그저 의사였다.
수많은 과를 떠돌던 준후는 이제 새로운 보금자리이자 머물 곳을 찾았다.
터벅. 터벅.
숙직실을 지나 당직실로 향하는 동안.
준후는 어쩌다 마주친 환자와 보호자에게 눈인사를 했다.
병실에 있는 환자와 보호자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기도 했다.
회진 전이었지만 병동은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인턴들은 바쁘게 인턴 잡을 하고 있었고.
환자들은 침상 등받이에 기댄 채 잠을 쫓고 있었다.
은은했던 수면등의 빛은 사라졌으며.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밝은 조명이 병실 내부를 비추었다.
신경외과 병동은 중년 이상의 환자가 많았다.
생로병사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현장이랄까.
노화하는 인간은 병을 피할 수 없었다.
젊은 환자는 보통 외상 환자였다.
병동을 관찰하며 준후는 앞으로 신경외과에서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했다.
신경외과의 분과는 크게 세 종류가 있었다.
첫째로 뇌를 다루는 뇌 파트.
뇌 파트는 뇌종양 질환과 뇌혈관 질환으로 두 분야의 갈래가 있었다.
둘째로 척추와 경추를 다루는, 어찌 보면 정형외과와 닮은 척추 파트.
셋째로 복합통증증후군(CRPS), 뇌전증(간질), 파킨슨병들을 다루는 정위 신경 클리닉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공의 자격증을 획득하고 나면 수지접합수술을 할 수 있는 수부외과.
전문 외상센터에서 근무할 수 있는 외상 외과의로 전직할 수도 있었다.
신경외과의의 길은 한 마디로 무궁무진했던 것이다.
보통은 신경외과의는 이 중 한 가지를 전공으로 삼아 깊게 파고들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뇌종양 전문의는 뇌종양 수술만 하고.
뇌혈관 수술이나 다른 수술은 집도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준후는 욕심이 많았다.
신경외과에 모든 분과를 정복하고 싶었다.
더 많이 알수록 더 많은 환자를 살릴 수 있을 테니까.
그 어떤 위기 상황에도 끄떡없을 테니까.
무림을 경험했다면 그 정도는 해줘야 한다고 준후는 본인의 기준치를 높게 잡았다.
똑. 똑. 똑.
드르르륵.
준후는 노크를 하고 당직실로 들어갔다.
레지던트로 신경외과에 근무하는 첫째 날이었다.
* * *
“준후야, 왔어?”
레지던트 2년 차 민경이 준후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며 반겼다.
민경 옆에는 못 보던 얼굴이 있었다.
타 대학 출신이자 준후와 함께 신경외과 근무를 하게 될 동기로 보였다.
가운으로 확인한 동기의 이름은 경수.
올해 신경외과 지원자는 준후와 경수 단 두 명뿐이었다.
그래도 흉부외과나 산부인과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이야, 레지던트 가운 잘 어울린다?”
“그러게요. 앞에 신경외과만 붙었을 뿐인데.”
준후는 피식 웃으며 민경의 맞은편에 앉았다.
행동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마치 집 거실을 돌아다니듯.
저번 달, 그러니까 인턴 수련 마지막 달에 준후는 신경외과에서 픽스턴을 가졌다.
인턴이 전공을 선택하면 해당 과에 적응시키기 위해 전공과에서 마지막 수련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경과는 초면이 아니었다.
한 달을 같이 지낸 사이였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이쪽은 준후, 네 동기인 서경수라고 해. 경수야 이쪽은 준후. 동갑이니까 서로 말 편하게 해.”
“반갑다. 경수야.”
“반갑다.”
준후와 경수가 서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경수한테 1년 차 업무 알려주고 있었거든? 복습한다 생각하고 너도 한 번 더 들어.”
“복습 좋죠.”
민경이 1년 차 업무를 설명하는 동안.
준후는 경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경수는 인상이 날카로웠다.
턱도 날카롭고, 눈매도 날카롭고, 눈빛도 날카로웠다.
민경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네’를 반복했는데 성격은 무뚝뚝하고 차가워 보였다.
“이쯤 하면 설명은 다 된 것 같고. 난 잠깐 나가 볼게. 둘이 좋은 시간 보내 봐.”
민경이 씽긋 웃으며 자리를 비웠다.
민경이 떠나자 당직실 분위기는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경수는 곧바로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바빠? 아직 주치의 맡은 환자도 없는데?”
“OCS(처방전달 시스템) 익혀두려고. 내가 쓰던 거랑 인터페이스가 다르니까.”
경수의 시선은 여전히 모니터에 고정되어 있었다.
경수가 타 대학 출신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준후였다.
“어디서 왔는지 물어봐도 돼?”
“배성대.”
배성대 의대는 지방에서 한 손가락 꼽히는 의대였다.
“배성대면 배성 대학교 병원에 지원해도 됐을 텐데. 신원대에 지원한 이유가 뭐야?”
“신원대가 더 좋아 보여서.”
“신경외과는 왜 선택했고?”
준후는 꾸준히 질문을 이어나갔다.
병원을 옮기지 않는다면.
경수와 평생을 보내게 될지도 모르는 준후였다.
일종의 반려자(?)라고 할까.
그러다 보니 경수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다.
“그런 것까지 일일이 보고 해야 하나?”
경수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불편하면 대답 안 해도 돼. 동기니까 서로 많이 알아두면 좋겠다 싶어서 물어본 것뿐이야.”
“…….”
“나한테 궁금한 건 없어?”
“없…… 지는 않네.”
경수가 경멸하는 눈빛으로 준후를 쳐다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준후가 손목에 찬 게르마늄 팔찌를 응시했다.
“의사라는 놈이 그런 유사과학을 믿는 건가? 솔직히 한심해 보인다.”
“아. 이 팔찌?”
“그래.”
“유사과학 때문에 차고 있는 건 아니야.”
“그러면?”
코웃음을 치는 경수.
“친한 형한테 선물로 받은 거야. 유품이지.”
팔찌를 한 손으로 쓰다듬으며.
준후는 뭉클한 감정을 느꼈다.
뇌사 판정을 받은 성호와 작별할 때.
준후는 다짐했다.
성호가 시작도 못 한 신경외과의의 꿈을 자신이 이어받겠다고.
팔찌는 성호와 준후를 이어주는 매개체이자.
준후가 세계 최고의 신경외과의가 되겠다는 맹세를 한 증표이기도 했다.
“이상한 낭만이 있나 보군. 그런 말랑말랑한 마인드로 신경외과에서 제대로 버티겠어?”
“초면이라도 말은 좀 가려서 하지?”
준후의 목소리에 은은한 노기가 깃들었다.
“왜? 내가 틀린 말 했나?”
“남의 사연이나 추억을 네 잣대로 속단하지 마. 너야말로 그런 마인드로 신경외과에서 버티겠어?”
“…….”
“차갑게 남을 깔보면서 본인이 이성적이라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그런 식이면 너야말로 오래 못 버텨.”
준후의 지적에 경수는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얼굴에는 불쾌한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아무래도 너랑은 친해지기 힘들 것 같군.”
“피차일반이야.”
이후로 준후는 경수와 업무에 관련된 이야기만 나눴다.
이번 달 당직과 휴무일을 정했다.
“문제 있으면 연락해. 컨퍼런스 룸 좀 다녀올 테니까.”
“어디 갈 생각인데?”
“인턴들 컨퍼런스 준비하는 것 좀 도와주게.”
“위인 나셨네. 위인.”
경수의 빈정거림을 뒤로하고 준후는 컨퍼런스 룸으로 향했다.
하나뿐인 동기가 저 모양이라.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경수는 왜 저렇게 냉소적인 성격일까.
신경외과를 전공으로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두 가지를 알아야만.
서경수라는 인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까지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 * *
“선배. 감사해요. 덕분에 준비가 빨랐어요.”
신경외과 인턴 은하가 준후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은하는 신원대 출신으로 준후보다 1살 어렸다.
의대 재학 시절.
종종 마주친 적이 있어 이름과 얼굴은 기억하고 있었다.
“병동 잡 하느라 바빴을 텐데. 너희도 숨은 쉬어야지.”
“선배. 최고!”
“감사합니다. 선배.”
은하가 엄지를 치켜세웠고.
은하 옆에 있던 짝턴(짝궁 인턴) 선호도 다시 한번 준후에게 감사를 표했다.
“휴게실에서 커피라도 한잔하고 와.”
“그래도 될까요? 눈치가 보여서…….”
“뭐라고 그러는 사람 있으면 내 핑계대. 그리고 일도 다 했는데 무슨 상관이야?”
“준후 선배가 봐준다니까, 가자. 람쥐.”
“람쥐?”
선호의 말에 준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은하 별명이 다람쥐거든요. 줄여서 람쥐라고 불러요. 선배가 보기에도 도토리 잘 줍게 생겼죠?”
“야! 선배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네?”
“람쥐를 람쥐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하냐?”
티격태격하는 선호와 은하를 지켜보며 준후는 피식 웃었다.
둘은 케미가 좋았다.
그리고 의사 업무를 하는 데 있어서 케미만큼 중요한 것도 없었다.
병동 일도.
수술도 혼자서는 할 수 없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준후는 두 사람이 조금 부럽기도 했다.
준후의 짝궁은 경수였다.
붙임성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시간이 흘러 컨퍼런스가 진행되었다.
입원 환자 브리핑.
케이스 스터디.
수술 환자 스케줄 정리 등등.
컨퍼런스가 끝난 후에는 의국 식구들이 다 같이 회진도 돌았다.
회진이 끝난 후에야 비로소 시작되는 신경외과 업무.
당직실로 돌아온 준후는 바쁘게 차트부터 입력했다.
회진을 돌면서 교수님이 언급한 오더 및 치료 방향을 적어나갔다.
타다다닥.
타다다닥.
준후의 손가락이 불을 뿜었다.
타자 치는 속도가 워낙 빨라서.
손가락 구경을 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끊기지 않는 키보드 소리는 따발총 같았다.
차트 입력은 레지던트 1년 차 업무의 8할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주치의가 되면서 돌봐야 할 환자들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병동 환자 관리는 대부분 1년 차의 몫이고.
중환자실 환자는 2년 차의 몫이고.
3-4년 차는 수술 어시스트 및 집도에 집중했다.
“어휴. 저 변태 같은 속도는 여전하네.”
중환자실 라운딩을 마치고 당직실에 복귀한 민경이 준후를 보며 한 말이었다.
“준후 너 영타가 몇이나 나온다고 했지?”
“2,000이요.”
“2,000? 너 사람 맞니?”
“사람은 사람인데 선배 말대로 변태죠. 오더 입력하는 변태.”
준후는 웃으면서 타자를 계속 입력했다.
준후의 타자력은 전보다 한층 더 상승했다. 양수 호박 기술을 9성까지 성취한 덕분이었다.
“선배 것도 대신 입력해드릴까요?”
준후가 모처럼 손을 멈췄다.
휴식을 취하는 게 아니라.
밀린 차팅을 단 10분 만에 다 끝냈던 것이다.
다른 레지던트라면 최소 1시간에서 2시간은 걸릴 일이었다.
“난 됐고. 도와줄 거면 경수나 도와줘.”
민경의 대답에 준후가 경수를 쳐다보았다.
경수도 준후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준후의 차팅 속도를 보고 경악했던 것이다.
“바쁘면 나눠서 할까?”
“아…… 아니. 내 업무는 내가 알아서 하지.”
“힘들면 부담 갖지 말고 이야기해. 혼자 끙끙 앓으면 탈 나니까.”
경수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경수를 돕는 일에 준후는 거부감이 없었다.
경수의 컨디션이 좋아야.
경수가 맡은 환자들도 편하기 때문이다.
즉 경수를 돕는 일은 환자를 위한 일이었다.
번개처럼 오전 차팅을 끝내고.
준후는 신경외과 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펄럭.
펄럭.
거침없이 넘어가는 책장.
준후는 책 읽는 속도도 빨랐다.
초식 동작과 심결이 적힌 무공서를 보듯 교재를 독파해 나갔다.
머릿속으로 뇌와 뇌신경, 뇌혈관의 구조를 그리며 독서했던 것이다.
준후의 필살기 중 하나인 입체 독서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준후는 점혈법으로 언어를 관장하는 브로카와 베르니케 영역을 자극했다.
그 결과 책 내용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일 수 있었다.
최근 준후는 신경해부학을 탐독하는 중인데 신경해부학은 1년 차 학습 교재로.
준후는 벌써 3번째 복습 중이었다.
누구보다 빠른 업무 처리와 남은 시간에 쌓는 의학지식.
이는 다른 레지던트들이 감히 준후에게 범접할 수 없는 이유였다.
띠리리링~
불현듯 울리는 전화벨.
레지던트 1년 차가 된 준후는 망설임 없이 전화를 받았다.
“신경외과입니다.”
-…….
“네. 알겠습니다. 지금 차트 확인하고 내려갈게요.”
“응급실에 환자 왔대?”
“네. 제가 갈게요.”
민경의 질문에 준후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검색창에 응급실에서 알려준 환자 번호를 입력하고 환자의 차트를 살폈다.
좁아지는 미간.
이마에 늘어나는 주름.
검사상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 몇 군데가 석연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