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120화
제21장 팔찌(5)
응급실로 향하는 준후의 발걸음은 경쾌했다.
진료하고 처치하는 일을 준후는 오래전부터 좋아해 왔다.
환자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어서 좋았고.
그 과정에서 다른 환자를 진료할 때 필요한 새로운 경험치를 얻을 수 있어서 좋았다.
오죽했으면 인턴 수련할 때도.
응급실 진료를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을까.
앞으로는 눈치(?) 보지 않고 응급실을 오갈 수 있다는 사실에 준후는 행복했다.
모처럼 찾은 응급실은 소란스럽고 분주했다.
스태프들은 숨 가쁘게 스테이션과 환자 사이를 오갔다.
준후의 시선을 가장 먼저 사로잡은 건 스태프들이 CPR을 하는 모습이었다.
응급의학의가 환자에게 다급히 흉부 압박을 하고 있었다.
퍽! 퍽! 퍽!
환자의 몸은 뭍에 올라온 생선처럼 펄떡거렸다.
곁에 있는 보호자는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그 와는 정반대의 광경도 있었다.
대기석에 앉은 어떤 환자와 보호자들은 지루한지 하품을 하고 있었다.
삶과 죽음.
숨 막히는 긴장감과 온몸이 노곤한 나른함.
서로 어울릴 수 없는 감정과 상황들이 동시에 펼쳐지는 곳이 바로 응급실이었다.
“선생님. 신경외과에서 왔는데요.”
“C구역 3번 베드로 가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스테이션 간호사와 대화를 마치고 준후는 곧 환자와 마주했다.
환자의 이름은 김기우.
나이는 23세.
그런데 환자의 복장의 범상치 않았다.
넓은 통바지에 해골이 그려진 긴팔을 입고 있었다.
목에는 체인처럼 치렁치렁한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특히 샛노란 머리가 단번에 시선을 끌었다.
동행한 보호자는 친구로 보였다.
친구 역시 껄렁껄렁하고 겉멋이 든 건 마찬가지였다.
“안녕하세요. 신경외과의 서준후라고 합니다.”
“아. 네.”
기우가 고개를 건들먹거리며 대답했다.
“두통과 구역질이 심하다고 들었습니다만…… 언제부터 어떻게 아프셨죠?”
“어제저녁부터 아프다가 오늘 아침에 확 심해지더라고요. 누가 창으로 관자놀이를 푹푹 쑤시는 것 같아요.”
“평소에도 두통이 있나요?”
“있는 편이긴 했어요. 가끔 약도 챙겨 먹고요.”
“평소 느끼는 두통과 오늘 느끼는 두통이 다른가요?”
“달라요. 평소 두통은 관자놀이가 아니라 이마 쪽에서 와요.”
“혹시 어디에 머리를 부딪치신 것 아니고요?”
“딱 보면 모릅니까? 멀쩡하잖아요.”
기우가 본인 머리를 가리키며 인상을 썼다.
기우는 머리만 노란 게 아니라 싹수도 노랬다.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느꼈던 외상성 충격이 나중에 뇌출혈의 원인으로 밝혀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
“교통사고 후유증이 나중에 발생하는 것처럼요. 그러니까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머리에 충격을 받은 적이 없다는 거죠?”
“……아. 네.”
기우가 준후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준후가 체외로 내공을 분출해서.
기우에게 위압감을 심었기 때문이다.
진상 환자를 길들이는 데는 내공만 한 효자가 없었다.
기우 입장에서는 지금 상황이 당황스러울 거라고 준후는 생각했다.
말투도 사근사근하고.
행동도 거칠지 않은데.
이상하게 꼼짝 못 하겠다는 느낌이 들 테니까.
준후는 계속해서 문진을 이어나갔다.
두통 및 뇌 질환의 가족력.
앓고 있는 질환.
복용하는 약 여부까지 꼼꼼하게 살폈다.
아쉽게도 문진만으로 충분한 데이터를 얻기는 부족했다.
“일단 환자분, 눈을 좀 보겠습니다.”
준후가 기우에게 다가간 순간.
독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내공으로 후각을 증폭하니 어렴풋이 쑥 냄새 같은 것도 섞여 있었다.
무림에서 준후가 익히 맡아본 냄새였다.
이 자식들 봐라?
예상했던 것보다 질이 안 좋네.
“환자분한테서 쑥 냄새가 나는데요?”
“뭐…… 뭔 소리예요? 향수 냄새밖에 안 나는데.”
“향수 냄새예요. 향수 냄새.”
기우가 펄쩍 뛰었고.
보호자는 기우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무슨 향수 쓰시는데요?”
“르나보 29요. 50ml에 40만 원짜리요.”
“알겠습니다. 눈 크게 떠보세요.”
딸칵!
준후는 펜 라이트를 켜서 환자의 눈동자를 비춰보았다.
눈동자가 빛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통해 신경계의 이상을 알아보는 검사였다.
동공 반사를 확인하면서.
준후는 단전에서 끌어올린 내공을 눈동자에 담았다.
안공(眼攻)이라 불리는 무공이었다.
안공을 사용하면 미세 현미경에 버금가는 시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즉 동공 반사에 이상이 있다면.
결코 준후의 눈을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준후는 환자의 동공에서 pin point(점)를 발견했다.
펜 라이트의 불빛이 닿는 순간.
환자의 동공이 축소되었던 것이다.
“이제 볼 만큼 봤죠? 좋은 두통약이나 처방해 주세요. 그럼 얌전히 갈 테니까.”
“누구 마음대로요? 가만히 있어요.”
핀 포인트를 확인한 이상.
환자를 순순히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준후는 내친김에 환자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환자의 머리에 내공을 불어넣었다.
이제는 준후의 전매특허가 된.
내공 혈관 조영술을 펼쳤던 것이다.
통배권의 원리로.
내가기공의 원리로.
두개골을 통과한 내공들이 거미줄처럼 퍼져 나갔다.
내경 동맥.
전대 뇌동맥.
좌 중대 뇌동맥.
우 중대 뇌동맥 등등.
내공은 신속하게 뇌혈관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준후의 꾸준한 수련 덕분에.
내공 뇌혈관 조영술은 채 1분도 되지 않아 끝났다.
조영제를 사용한 뇌혈관 조영술.
아니, 머리 CT 촬영 시간보다도 준후의 내공 조영술이 더 빨랐던 것이다.
“이 선생님. 진짜 웃기네. 갑자기 왜 남의 머리에 손을 얹고 난리야?”
준후가 검사를 마치고 물러나자 기우가 언성을 높였다.
“내가 뭐 대단한 거 해 달래요? 그냥 두통약만 달라고요.”
“환자분은 두통약으로 나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에요.”
“그럼 내가 무슨 대단한 병이라고 앓고 있다는 소리예요?”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단 CT 촬영부터 해보죠.”
“CT? 그거 비싼 검사 아니에요?”
“40만 원짜리 향수는 팍팍 쓰면서 몸 상태를 확인하는 검사비는 아깝습니까?”
준후가 반박하자 기우가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 돌팔이지? 자신이 없으니까 이 검사 저 검사 다 하는 거잖아.”
“내가 돌팔이인지 아닌지는 CT 검사로 확인하죠.”
“…….”
“만약에 CT에서 이상이 없으면 검사비는 돌려줄게요. 그럼 괜찮겠어요?”
“나중에 딴말하지 말아요. 진짜 다 엎어버릴 거니까.”
기우가 씩씩거리며 보호자와 자리를 떠났고.
준후는 멀어지는 기우의 뒷모습을 빤히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휴대폰으로 르나보 29라는 향수를 검색했다.
르나보 29는 시트러스 계열.
그러니까 쑥 냄새와는 전혀 상관없는 향수였다.
* * *
“X발. 의사랍시고 개 짱나게 하네. 얼굴만 반반하고 실력은 쥐뿔도 없어 보이는 게.”
기우는 씩씩거리며 응급실을 나왔다.
3층에 위치한 CT실로 이동했다.
“그래도 네가 참아. 그래도 대학병원 의사면 기본 실력은 있겠지.”
수철이 좋게좋게 기우를 타일렀다.
“너 지금 그 새끼 편드냐?”
“야. 그런 뜻이 아니잖아. 검사에서 이상 없으면 검사비도 돌려준다는데. 그만큼 자신 있다는 뜻 아니겠어?”
“보나 마나 배짱부리는 거…… 으으으윽.”
기우는 말을 채 다 잇지 못했다.
두꺼운 바늘이 양쪽 관자놀이를 꿰뚫는 것 같았다.
기우가 몸을 가누기 힘들어 휘청거리자 수철이 기우를 부축해 주었다.
“괜찮아?”
“X발. 하나도 안 괜찮아. 진작 병원 두통약 먹었으면 이럴 일도 없었는데. 잠깐 화장실 좀 가자.”
화장실을 찾은 기우는 무릎을 꿇은 채 변기에 구토를 했다.
두통 때문에 속도 뒤집혔다.
위장이 360도로 뱅뱅 회전하는 기분이었다.
“우리 어제 너무 빨았나 봐. 나도 컨디션 별로던데.”
“어제 같은 날 아니면 언제 또 그렇게 빨아보겠냐? 난 후회 없다.”
기우는 입가에 흐르는 침을 옷소매로 닦아냈다.
몸을 일으켜 다시 CT 촬영실로 이동했다.
* * *
“뭐야? 아직 안 올라갔어?”
스테이션을 지키고 있는 준후에게 민희가 말을 걸었다.
민희는 준후의 의대 동기이자 응급의학과 1년 차 레지던트였다.
신경외과에 콜을 하기 전.
기우를 진료했던 의사가 바로 민희였다.
“두통약 주고 적당히 보내면 되는 거 아니었나?”
“큰일 날 소리 하지 마. 잘못하면 개두술(머리를 여는 수술)까지 할 판이니까.”
“개두술씩이나? 그럴 리가 없는데?”
민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환자의 병력에 문제가 없었고.
환자의 C.C(Chief complaint, 주 호소)도 두통과 오심으로 평범했고.
머리 엑스레이 결과도 별 이상이 없었다.
그런데 준후는 개두술을 입에 담고 있었다.
“근거 있어?”
“결론부터 말하면 난 EDH(경막하 혈종) 룰 아웃(rule out, 의심 가는 질환) 하고 있다.”
“EDH씩이나?”
되묻는 민희의 눈동자가 부엉이처럼 동그래졌다.
이어지는 준후의 설명은 더 기가 막혔다.
첫째로 환자가 마약 중독자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려주었다.
동공 반사에서 핀 포인트(마약 징후를 보여주는 사인)가 보였으며.
쑥 냄새가 나는 걸 보면 대마초를 피운 것 같다고 했다.
“나도 동공 반사는 확인했어. 근데 핀 포인트는 못 봤는데?”
“핀 포인트는 원래 바늘 끝처럼 작아서 잘 안 보여.”
“그 작은 걸 준후, 너는 어떻게 봤어?”
“내가…… 시력이 좋거든.”
준후가 멋쩍게 웃었다.
“그럼 쑥 냄새는 어떻게 맡았어? 나는 향수 냄새 밖에 못 맡았거든.”
“내가…… 후각이 좋거든.”
준후의 반복된 대답에 민희는 피식 웃고 말았다.
시각이며.
후각이며.
다 좋다고 하니 딱히 뭐라고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준후는 환자가 마약 복용으로 인한 혈관 손상으로 뇌출혈을 앓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 결과가 궁금해 민희도 자리를 지켰다.
잠시 후.
응급 의뢰한 CT 검사 결과가 환자보다 먼저 도착했다.
PACS(영상 전달 시스템)에 떠오른 영상을 확인하고.
민희는 두 눈을 의심했다.
정말 환자에게 경막하 혈종이 존재했던 것이다.
우측 측두부에 하얀 음영이 관찰되었다.
순간 민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EDH 환자를 일반 두통 환자로 착각하다니…….
준후가 꼼꼼하게 진료를 보지 않았다면.
환자는 두통약만 받아서 응급실을 나갔을 것이다.
그 결과 환자는 몇 시간 후 구급차에 실려 다시 응급실을 찾았을 테고.
그 책임은 민희가 져야 했을 수도 있었다.
“민희야, 자책할 필요 없어. 원체 놓치기 쉬운 환자였으니까. 그래도 환자를 그냥 돌려보내지 않고 우리 쪽에 콜했잖아?”
“…….”
“넌 충분히 최선을 다했어.”
민희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준후가 위로를 건넸다.
그 따스함에 민희는 마음이 한결 풀어졌다.
예전부터 느껴왔지만.
준후는 다른 동기들과 다른 차원에 존재했다.
인턴 배 봉합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할 만큼 손놀림이 좋았고.
응급 상황에서는 냉철했고.
동료와 후배, 선배, 환자·보호자에게는 늘 다정했다.
인성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준후는 이미 완성된 의사처럼 보였다.
“저기 환자 온다. 부축받으면서 오는 걸 보니 상태가 악화됐네.”
준후가 얼굴을 찌푸리며 환자 쪽을 응시했다.
“미안한데 환자랑 보호자에게 상황 설명 좀 해줄래? 나는 신경외과에 노티부터 해야겠다.”
“그 정도야 가뿐하지.”
민희는 준후 대신 환자와 보호자에게 다가가 검사 결과를 설명했다.
환자는 크게 놀란 눈치였다.
민희와 마찬가지로 본인의 두통을 가볍게 여겼던 것이다.
“치료 방식이 정해지는 대로 곧장 알려드릴게요. 그런데 환자분.”
“왜요?”
“안구 검사 한 번만 다시 해볼게요.”
환자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딸칵!
펜 라이트를 켜고 민희는 환자의 동공을 다시 살폈다.
그런데 말이다.
환자에게 핀 포인트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도.
민희는 도무지 핀 포인트를 찾을 수 없었다.
준후, 얘는 시력이 대체 얼마나 좋은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