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121화
제22장 레지던트(1)
“선배 찾는 전화인데요?”
“누구?”
“준후요.”
경수가 무심하게 내민 수화기를 민경이 받았다.
안 그래도 응급실에 내려갔던 준후의 근황이 궁금하던 참이었다.
없는 환자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복귀가 늦었던 것이다.
준후의 성격상 농땡이를 부릴 리는 없었다.
준후는 손톱만 한 자투리 시간마저 신경외과 서적을 읽는 데 사용하곤 했다.
다만 민경이 궁금한 것은.
준후가 보는 환자의 상태였다.
“어. 준후야. 오래 걸리네. 혹시 상황이 심각하니?”
-네. 선배. 머리 CT 촬영했는데 경막하 혈종 나왔습니다. 환자가 마약도 하는 것 같고요.
“엥? 경막하 혈종에 마약씩이나? 농담이 지나친 거 아니야?”
노티가 워낙 충격적이라 민경은 쉽게 믿지 못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준후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쪽 빠져 있었다.
-동공 반사에서 핀 포인트 확인했고요. 쑥 냄새도 맡았습니다. 마약을 장기 복용하면서 뇌혈관 손상이 온 것 같아요.
준후는 2분 동안 폭풍 같은 노티를 쏟아냈다.
민경은 듣기만 했다.
준후의 진료와 검사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환자를 세심하게 관찰했다는 사실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준후의 노티 또한 깔끔했다.
군더더기 없이 필요한 정보만 전했다.
그래서 민경은 든든했다.
준후가 신경외과 1년 차 레지던트로 들어왔다는 사실이.
준후는 모든 외과에서 탐내던 인재가 아니던가.
“잠깐만 영상 좀 확인할게.”
민경은 모니터에 CT 영상을 띄운 후 찬찬히 살폈다.
혈종은 측두엽에 위치해 있었고.
지금과 길이는 3센티미터 정도 되었다.
“으음…… 병동 입원까지는 필요 없고 응급실 입원시키면 되겠는데?”
-…….
“약물 치료하면서 경과 보자. 환자 머리 45도로 거상하고 만니톨(이뇨제)하고 글리세롤(고삼투 제제) 투여해.”
-선배. ICP 모니터링(IntraCranial Pressure monitoring, 두개내압 감시)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ICP씩이나? 약물로 충분해.”
민경이 고개를 저었다.
준후의 오더는 과했다.
ICP 감시란.
환자의 머리 일부를 열고 튜브를 삽입하여.
환자의 뇌압을 낮추고 뇌압을 측정하는 처치였다.
현재 준후가 진료 중인 환자에게 필요한 처치는 아니었다.
혈종이 더 크거나.
두부 외상이 있거나.
뇌혈관에 손상이 있으면 또 모를까.
“준후, 너는 다 좋은데 말이야. 환자를 딥(deep)하게 보는 경향이 있어. 한 마디로 걱정이 너무 많다는 거지.”
-…….
“때로는 환자와 적당히 거리를 두고 냉정하게 관찰할 필요가 있어.”
-저 지금 엄청 냉정합니다. 지금 체온 재면 34도 정도 나올지 몰라요.
“하여간 넉살은. 약물 오더 내고 빨리 올라와.”
-선배. 아무리 생각해도 ICP 모니터링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준후는 도통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민경도 살짝 열 받았다.
노티를 했으면 선배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대들지?
“준후야, 선 넘지 말자. 선배가 오더 내렸으면 따라야지.”
-저도 선배하고 싸우고 싶은 마음 없습니다.
“참나. 내 말을 안 듣겠다는 건 나랑 싸우자는 거 아니야?”
민경은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약물 치료만 하기에는 환자의 상태가 갈수록 악화되고 있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준후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응급실에서 직접 환자를 보고 있으니까요.
“…….”
-전화 끊지 말아 주세요. GCS(환자 의식 수준) 평가하고 바로 노티 드릴게요.
수화기 너머로 준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후는 환자에게 무언가를 계속 물어보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를 기다리는 민경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민경은 이미 최선의 치료법을 알려주었다.
이제 와서 GCS를 측정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하여간 환자만 보면 눈 돌아가는 건 여전하네.
왜 모든 환자에게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거지.
상황을 차근차근 지켜봐도 되는데 말이야.
“준후야. 끝났어?”
-네. 방금 끝났습니다.
준후가 곧바로 환자의 GCS 스코어를 알렸다.
Eye opening(눈뜨기 반응): 2점.
Verbal response(언어 반응): 3점.
Motor response(운동 반응): 3점.
환자의 GCS 스코어는 8점으로 꽤 낮았다.
확실히 응급의학과에서 초진할 때에 비하면 환자의 상태는 악화되었다.
환자는 통증 자극에만 눈을 떴고.
문장을 말하지 완성하지 못한 채 단어만 내뱉었고.
통증에 굴곡 반응을 보였으니까 말이다.
-선배. GCS 스코어가 8점 이하면 ICP 감시하는 거 맞죠?
“어 맞기는 한데…….”
민경이 볼을 긁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혈종이 작아서 충분히 자연흡수 될 것 같거든?”
-혈종 크기보다 GCS가 우선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저는 교재에서 그렇게 배웠습니다.
“교재가 항상 옳은 건 아니야. 상황에 따라서 해석을 달리해야지.”
드르르륵.
준후를 다시 설득하려는데.
당직실 문이 열리며 3년 차 희준이 들어왔다.
“준후야. 잠깐만 기다려 봐. 선배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뭔데?”
“응급실 환자 노티 드리려고요. 치료 계획에서 저랑 준후 사이에 약간 마찰이 있어서요.”
“마찰? 준후가 네 말 들으면 끝 아니야?”
희준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레지던트 1년 차는 아직 아기였다.
스스로 무언가를 판단할 시기가 아니었다.
문제가 생기면 보통 윗사람에게 노티하고 오더를 따르는 게 보통이었다.
“제 말이 그 말이라니까요. 근데 준후가 도통 말을 들어먹어야죠. 그래도 선배가 이야기하면 듣지 않을까 싶네요.”
민경은 하소연을 섞어 현 상황을 희준에게 노티했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 노티를 듣던 희준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민경이 네가 잘못했네.”
* * *
드르르륵.
준후는 침상을 끌고 수술방으로 이동 중이었다.
민경의 오더를 따르는 중이었다.
3년 차 희준과 대화를 하더니.
민경은 돌연 ICP 모니터링을 하겠다고 결정을 바꿨다.
사실 준후는 약물 치료를 하자는 민경의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환자의 혈종은 그리 크지 않았다.
약물 치료로 자연흡수를 기대해 볼 만했다.
하지만 말이다.
누가 뭐래도 현재 최선의 처치는 ICP 모니터링이었다.
환자의 뇌압을 즉시 떨어뜨리고.
환자의 뇌압을 감시도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최선의 치료를 할 수 있는 상황에서 굳이 차선을 선택할 필요가 있을까.
준후는 그 점을 납득할 수 없었다.
가족에게 좋은 것만 주고 싶은 것처럼.
준후는 환자에게도 좋은 것만 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런 마음가짐을 한결같이 유지해야 최고의 신경외과의가 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래야 하늘에 있는 성호에게도 부끄러움이 없을 거라 믿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준후는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30분 전만 해도 껄렁껄렁하던 환자는 이제 쥐 죽은 듯 누워 있었다.
“선생님. 기우, 설마 죽는 거 아니죠?”
보호자가 불안한 눈동자로 준후를 쳐다보았다.
“안심하세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죽을병은 아닙니다. 신경외과 처치를 받고 며칠 입원하면 좋아질 거예요.”
“그럼 다행이긴 한데…….”
“다행이긴 한데 반쪽짜리 다행이죠.”
준후가 보호자의 말을 이어받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진지하게 경고하는데 약 끊어요. 건강하게 살고 싶으면.”
“약이요? 저희는 그런 거 한 적 없어요!”
준후가 넌지시 마약 흡입 여부를 지적하자 보호자가 펄쩍 뛰었다.
“무슨 근거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죠? 말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제가 말한 약이 무슨 약인지 알고 그렇게 흥분하시죠? 찔리는 게 있습니까?”
“그…… 그게…….”
유도신문에 걸린 보호자가 준후의 시선을 피했다.
더 말을 해도 못 알아들을 것 같아서 준후는 입을 다물었다.
준후가 두 사람의 마약 흡입 여부를 파악한 이상.
어차피 두 사람은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
[띵동~ 4층입니다.]
준후는 침상을 끌고 보호자와 수술실로 향했다.
보호자 대기석에는 이미 수술실에 소중한 사람을 보낸 보호자들이 초조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여기서 기다리세요. 처치는 30-40분 안에 끝날 겁니다.”
“네.”
준후는 혼자 침상을 끌고 수술방 출입구로 향했다.
출입구 앞에 민경이 서 있었다.
“들어가서 나랑 이야기 좀 해.”
* * *
준후는 갱의실에서 환복하고.
세면대 앞에서 스크럽(수술 전 소독)을 했다.
벅. 벅. 벅.
소독액이 묻은 솔이 준후의 손가락, 손가락 틈, 손바닥, 팔뚝을 사정없이 문질렀다.
민경도 준후 곁에서 스크럽을 하는 중이었다.
“아까는 내가 미안했어.”
민경이 허심탄회하게 사과부터 건넸다.
“선배가 미안할 게 있었나요? 사과를 하려면 제가 해야죠. 오더를 받고 딴소리를 한 건 저인데요.”
“네가 맞는 소리를 하고 내가 틀린 소리를 했으니까. 선배가 돼서 말이야.”
민경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GCS를 우선적으로 생각했어야 하는데 난 약물 치료를 고집했잖아?”
“그렇게 판단할 만했어요.”
“아니야. 내 잘못이 맞아.”
“…….”
“생각해 보니까 나는 ICP 모니터링을 하기 귀찮았던 것 같아. 일종의 게으름을 피운 거지.”
“…….”
“또 내심 2년 차라고 널 휘어잡고 싶은 욕심도 있었던 것 같고.”
“…….”
“여러모로 선배답지 못했어. 그 점 사과할게.”
민경의 솔직한 고백에 준후는 감탄했다.
내면을 똑바로 응시하는 일.
내면을 다른 사람에게 고백하는 일.
이 두 가지는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데.
민경은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해냈다.
그것만으로도 민경은 좋은 선배가 되기 위한 필요 충분 조건을 갖추었다.
그래서일까.
준후는 오히려 민경에게 매력을 느꼈다.
“선배, 방금 좀 멋있었네요. 드라마 대사 같았어요.”
“나도 알아.”
민경이 너스레를 떨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수술 장갑, 마스크, 수술모 등을 착용하고 두 사람은 수술방으로 들어갔다.
수술방 공기는 서늘했다.
감염을 막고 균의 번식을 막기 위해 수술방은 바깥보다 차가운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준후는 이 서늘함을 사랑했다.
찬 공기는 준후의 정신력과 집중력을 날카롭게 벼려 주었다.
“선생님. 방금 마취 끝났거든요? 먼저 올라가도 되죠?”
“네. 고생하셨습니다.”
“두 분도 수고하세요.”
먼저 도착해서 전신 마취를 끝낸 마취의가 수술방을 떠났다.
ICP 모니터링은 까다로웠지만, 수술이 아닌 처치의 영역이었다.
마취의가 수술방에 남아서 바이탈을 감독할 필요가 없었다.
터벅. 터벅.
준후와 민경이 수술대로 다가갔다.
인턴이 왔다 갔는지.
수술대 옆에 처치 도구가 놓인 드레싱 카트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ICP는 내가 할 테니까 준후 너는 삭두해 볼래?”
“네.”
준후는 드레싱 카트에서 면도칼을 집어 올렸다.
삭두란 말 그대로 환자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이었다.
머리카락으로 인해.
환자의 머리 절개창에 오염이나 감염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하는 처치였다.
서걱.
서걱.
준후는 면도칼로 환자의 머리카락을 잘라냈다.
손놀림은 망설임이 없었다.
손놀림은 정교했다.
준후의 손은 한 번도 헛돌지 않았으며 정확하게 머리카락을 잘라냈다.
피부에 상처도 생기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무림에서 준후는 검객이었고.
면도칼도 넓게 해석하면 검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검을 쓰는 일이라면.
현대에서 그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준후였다.
“삭두는 언제 봐도 예술이네. 치프도 이렇게 못할 텐데.”
준후의 삭두를 지켜보고 있던 민경이 감탄조로 말을 이었다.
“이러다가 나중에 바버샵이라도 차리는 거 아니야?”
“나중에 은퇴하면 생각해 볼게요.”
삭두를 마친 준후는 환자의 머리카락을 따로 모아 비닐 백에 담아두었다.
그 모습을 이상하게 여긴 민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머리카락은 왜 보관해? 폐기물로 버려야지. 너 혹시 이상한 취미라도 있는 건 아니지?”
준후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상한 취미는 없고요. 이 환자 마약했잖아요. 머리카락 보관했다가 신고해야죠. 치료하고는 별개죠.”
준후의 똑 부러진 대답에 민경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래.
내가 졌다. 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