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123화 (122/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123화

제22장 레지던트(3)

병원 인턴이 힘들다 힘들다 말하지만.

사실 더 힘든 건 레지던트 1년 차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주치의가 되어 환자를 맡게 됐다는 책임감.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업무 범위.

전공 과목에 대한 세밀한 공부.

직급상 아래인 인턴의 관리 등등.

하지만 준후는 레지던트가 되어서 오히려 좋았다.

레지던트 1년 차가 겪는 고생들이 일종의 게임 속 퀘스트처럼 느껴졌다.

이것들을 잘 이겨내면.

성장의 발판이 되겠다 싶었다.

목적이 없는 고생은 불행이지만.

목적이 있는 고생은 행운이라고 무림의 은거기인이 말해준 적이 있었다.

딱 그 말대로였다.

타다다닥.

당직실에서 차트 업무를 보고 있던.

준후의 손가락이 폭주했다.

영문 타자 속도 2,000이라는 경이적인 속도를 뽐내며 순식간에 업무를 해치워 나갔다.

물론 속도가 빠르다고 해서.

업무를 대충 보는 것은 아니었다.

준후는 본인이 맡은 환자의 특이사항을 줄줄이 비엔나처럼 꿰고 있었다.

환자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외과의를 꿈꾸는 준후 아니던가.

그런 준후가 업무의 효율만 따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선생님. 601호실 서훈 환자 노티 좀 드리려고요.

업무 도중, 스테이션에서 간호사의 콜이 왔다.

“네. 말씀하세요.”

-환자분이 오전부터 편두통을 호소하시거든요. 두통약 처방해달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할까요?

“나프록신 B.i.d(하루에 두 번) 아침·저녁으로 주시고요. PRN(필요시마다) 아스피린 오더 내놓을게요.”

-604호실 양순례 환자분이요. 수술받고 계속 다리를 심하게 떠는데 이분은 어떻게 할까요?

“환자분, 프라미펙사졸 복용하고 있죠?”

-네. 0.15mg으로 하루 세 번이요.

“내일까지 복용량을 0.25mg으로 증량하겠습니다. 증량하면서 팔로우하죠.”

-근데 선생님. 저 궁금한 게 있는데…….

간호사가 불현듯 화제를 돌렸다.

“네. 말씀하세요.”

-어떻게 제가 물어보는 족족 바로 대답이 나오세요? 혹시 제 생각이라도 읽으시나요?

간호사가 농담조로 물었다.

준후의 처방이 그만큼 재깍재깍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준후는 이제 막 신경외과 1년 차가 되었다.

간호사가 노티를 하면.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우물쭈물하는 게 당연했다.

그래서 교재를 보면서 처방을 찾는다거나 선배에게 물어보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 결과로 처방 및 오더 입력에 긴 시간이 걸리는 게 당연한 일이었고.

그런데 웬걸?

준후는 일반적인 레지던트 1년 차와 차원이 달랐다.

처방이 바로바로 떨어지고.

오더 입력 또한 밀리지 않았다.

그래서 몇몇 간호사들은 준후에게 ‘바람돌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제 일 처리가 빠른 이유를 물어보시는 거죠?”

-네.

“조금 쑥스러운 말이긴 한데. 제 머릿속에는 환자밖에 없거든요.”

-…….

“쉴 때마다 틈틈이 간호 기록지를 보고 있습니다. 보면서 미리미리 처방을 생각해두고 있고요.”

-…….

“교수님이나 선배님들한테도 노티를 해두는 편입니다.”

-멋있어요. 선생님. 뭔가 명의들이 할 것 같은 이야기예요.

“하하하. 그런가요? 수고하시고 노티하실 거 있으면 바로 연락 주세요.”

-네. 준후 쌤도 수고하세요.

병동 간호사와 통화를 끊은 후.

준후는 명의라는 단어를 곱씹어 보았다.

명의가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손꼽히는 조건이야 많겠지만.

가장 중요한 조건은 분명 환자를 향한 애정과 관심과 배려일 것이다.

의사가 환자에게 무관심하다면.

본인의 의술을 갈고닦을 이유가 없을 테니까.

환자가 아프든 말든.

죽든 말든.

병원에 돈이 되는 검사와 치료만 하면서 실적만 올릴 테니까.

나는 언제쯤 명의가 될까.

나는 언제쯤 어시스트가 아니라 집도의가 될까.

업무에 다시 집중하기 전.

준후는 잠시 미래의 자신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 * *

그 날 오후, 수술방.

준후는 제2보조로 수술 스크럽을 서고 있었다.

신경외과 레지던트 1년 차가 되고 처음 들어간 영광의 첫 수술은 바로…….

뇌종양 수술이었다.

뇌종양은 폐암, 위암, 대장암 등등, 다른 종양에 비해 발병률이 낮은 편이었다.

하지만 수술은 훨씬 어려웠다.

첫째로 수술할 공간이 비좁았다.

뇌는 두개골 안에 갇혀 있었고.

두개골 내부의 여유 공간은 많지 않았다.

둘째로 정교한 수술 시야가 필요했다.

가로 15센티미터.

세로 15센티미터.

깊이 20센티미터.

이 작은 기관 안에 신체의 향상성을 유지하는 신경과 혈관들이 잔뜩 분포되어 있었다.

뇌를 잘못 건드렸다간 마비, 실어증, 간질, 신경 손상이 후유증으로 따라올 수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해서.

신경외과는 미세 현미경을 이용해 수술을 진행했다.

‘이게 사람의 뇌구나.’

어시스트를 하면서.

준후는 처음으로 뇌를 두 눈으로 보게 되었다.

구불구불한 형태로 퍼져 있는 이랑(뇌가 융기된 부분).

구불구불한 형태로 퍼져 있는 고랑(뇌가 움푹 파인 부분).

뇌는 마치 거대한 호두 같았다.

처음 본 뇌에서 준후는 신비로움을 느꼈다.

1.4-1.6킬로그램 밖에 안 되는.

저 보잘것없어 보이는 기관이 신체와 정신을 일사불란하게 조절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실제로 인간에게 뇌는 여전히 신비로운 기관이기도 했다.

뇌의 작동 방식.

구역별 뇌의 역할.

천억 개의 신경세포.

그리고 천억 개의 신경세포가 만들어낸 일만 개의 시냅스 간의 상호작용 등등.

과학자와 의사들이 연구 중이지만 밝혀진 정보들은 확실하지 않을뿐더러 밝혀야 할 영역도 무궁무진했다.

역시 쉽지는 않겠어.

뇌를 직접 본 순간, 준후는 깨달았다.

성호와 같은 뇌사 환자.

또는 식물인간 환자를 회복하는 일이 불가능에 가까울 것 같다고.

설령 준후가 무림에서 갈고닦은 손놀림과 내공이라는 신비로운 무기를 갖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준후는 포기하지 않았다.

꿈을 꺾지 않았다.

좌절하지 않았다.

과거 인간이 비행기를 발명해 하늘을 날고 대륙을 횡단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당장은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집념을 발휘한다면.

뇌사와 식물인간 상태도 완치할 수 있을 거라고 준후는 믿었다.

“신경외과 들어와서 처음 스크럽 서는 거지?”

집도의 고창현이 수술 도구를 내려놓으며 준후에게 말을 걸었다.

“네. 교수님.”

“뇌를 직접 본 소감은 어때?”

“신기하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합니다. 앞으로 제가 싸워야 할 전쟁터라서 비장하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감수성이 풍부한 친구로군.”

“감수성이 풍부한 게…… 혹시 나쁜 걸까요?”

“아니야. 좋은 뜻에서 말한 거야.”

창현이 준후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뜻밖의 제안을 했다.

“뇌를 한 번 만져보겠나?”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멸균 상태니까 괜찮아. 가볍게 손을 대는 정도는.”

창현의 제안에 감사를 표하고.

준후는 조심스럽게 환자의 뇌를 향해 손을 뻗었다.

수술 장갑을 착용했지만 뇌의 말랑말랑한 감촉이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이게 뇌의 촉감이구나.

소화기 외과나.

정형외과에서 만져본 장기들과 뇌의 감촉은 확실히 달랐다.

또한 준후의 눈에 뇌는 마냥 연약해 보였다.

이 상태에서 뇌에 조금만 압력을 가하기만 해도 뇌신경이나 뇌혈관에 손상이 올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뇌가 두부 같다는 우스갯스러운 표현이 새삼 실감 나게 느껴졌다.

“자네가 뇌 파트를 전공할지, 척추 파트를 전공할지는 모르겠지만 뇌와 친해져서 나쁠 건 없지.”

“…….”

“어쨌거나 난 매일 수술을 하면서도 항상 놀라곤 해. 뇌라는 녀석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친구거든.”

“저도 교수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주 조금은.”

“동지가 생겼구만. 희준이 녀석은 이런 쪽으로는 영 공감을 못 하는 쪽이라.”

창현이 피식 웃으며.

제1보조인 3년 차 레지던트 희준을 응시했다.

“잡담은 이쯤하고 수술 계속하지.”

“네. 교수님.”

“네. 교수님.”

준후는 손에 닿았던 뇌의 감촉을 가슴에 새겨두곤 어시스트에 나섰다.

다른 1년 차와 달리.

준후는 어시스트에 적극적이었다.

집도의와 제1보조가 필요로 할 어시스트를 능동적으로 찾아서 했다.

썩션.

출혈 부위에 거즈 대기.

생리 식염수 세척.

뇌엽의 견인 등등.

그러는 와중에 준후는 한 가지 실험을 해보았다.

미세 현미경과 자신의 안공(시력을 증폭하는 무공)을 비교해 봤던 것이다.

미세 현미경은 수술 부위를 10-25배까지 확대할 수 있었다.

초점 조절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준후의 안공은 결코 미세 현미경에 뒤처지지 않았다.

체감상.

준후의 안공은 수술 부위를 최대 27배까지 확대할 수 있었다.

단, 배율을 최대치로 끌어올릴 경우.

유지 시간이 2분 정도밖에 안 된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말이다.

잠깐만…….

이게 된다고?

두 번째 실험을 해보고 준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미세 현미경으로 수술 부위를 보면서 거기에 안공을 더해보았다.

그러자 펼쳐지는 신세계.

와…….

준후는 거의 세포 단위의 움직임까지 목격할 수 있었다.

미세 현미경과 안공이 시너지를 일으킨 것이다.

이런 사기적인 수술 시야라면.

집도의가 되었을 때.

경이로울 정도로 세심하게 수술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시야만 증폭한다고 해서 능사는 아니었지만 그 잠재력은 기대해 볼 만했다.

나중에 세포 단위 수술이 가능한 수술 도구들이 갖춰진다면 말이다.

진정하자. 진정해.

준후는 들뜬 마음을 억누르며 어시스트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면서도 또 다른 숙제를 잊지 않았다.

바로 수술의 초식화였다.

준후는 집도의가 사용하는 수술 도구.

수술 부위에 접근하는 방법.

종양을 떼어내는 손놀림과 요령을 전부 초식으로 전환했다.

이를 태권도의 품새처럼 동작의 연결세로 머릿속에 저장해두었다.

언제든지 꺼내볼 수 있도록.

아무도 모르는 사이.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기발한 방법으로.

준후는 강해지고 있었다.

* * *

전두엽에 발생한 성상세포종 제거 수술이 무사히 끝난 후.

준후는 희준과 휴게실을 찾았다.

“어때? 지낼 만해?”

희준이 자판기에서 뽑은 캔 커피를 준후에게 내밀며 물었다.

“잘 마시겠습니다. 네. 별 탈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힘든데 안 힘든 척하는 건 아니고?”

희준은 준후의 말을 순순히 믿지 않았다.

물론 준후가 특별한 친구라는 건 잘 알았다.

준후는 인턴 때부터 워낙 유명 인사였고 오늘 수술에서도 야무진 어시스트를 뽐냈다.

희준에게 필요한 수술 도구를 제때 건넸고.

희준이 채 오더를 내리기도 전에.

희준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척척 처치를 해냈다.

갓 1년 차 레지던트가 이렇게 빈틈없이 어시스트하는 걸 희준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말이다.

준후가 일을 잘한다고 해서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신경외과의 고된 업무를 처리하다 보면 멘탈이 흔들리기 마련이니까.

희준조차 2년 차까지는 수시로 탈주(?)를 꿈꿨다.

“선배 눈에는 제가 힘들어 보이나요?”

“전혀~ 그렇게 안 보여. 그래서 더 불안하단 말이지. 네가 참았다가 터뜨리는 스타일일까 봐.”

“전에는 선배가 말한 그런 스타일이었어요.”

준후가 손목에 찬 팔찌를 내려다보며 말을 계속했다.

“그런데 친한 형한테 배웠죠. 힘들 때는 주변 사람에게 기댈 줄도 알아야 한다고.”

“…….”

“만약 제가 힘들면 그때는 가감 없이 선배님께 말씀드릴게요.”

사연이 있는 듯한 준후의 고백이 희준의 가슴에 닿았다.

“그럼 다행이고. 너도 대충 감은 잡았겠지만, 우리 의국은 분위기가 좋은 편이야.”

“…….”

“딱히 군기를 잡는 애도 없고. 후배를 못살게 구는 애도 없고.”

“네. 그래서 더 좋더라고요.”

“앞으로도 잘해보자.”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선배, 피곤하지 않으세요?”

준후가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피로야 달고 사는 거니까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제가 간단하게 마사지해드릴게요.”

준후가 자리에서 일어나 희준 쪽으로 다가왔다.

이어지는 마사지.

준후의 마사지는 전설의 마사지를 방불케 했다.

희준의 뒤에 서서.

희준의 목을 90도로 사정없이 꺾었으며.

희준의 어깨와 목 주변을 악력으로 주무르고 또 엄지로 지압해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허리 주변의 뭉치고 수축한 근육을 풀어주었으며.

뚜두둑. 뚜두둑.

뼈마디 하나하나를 분절을 시켜주었다.

특히 희준의 마음에 들었던 건 머리 마사지였다.

준후가 관자놀이와 이마, 정수리 부근을 지압하자 머리가 1급수처럼 맑아졌다.

1시간은 잔 것처럼 머리가 개운해졌다.

“이야, 너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 손맛이 아주 끝내주는데?”

희준은 가뿐해진 몸을 확인하며 감탄했다.

마사지 받기 전과 마사지 받은 후의 차이가 극명했던 것이다.

“친척 중에 마사지하는 분이 있어서 배워뒀어요.”

“그래? 어쨌거나 미쳤네. 대박이야.”

“앞으로 피곤하면 자주 이용하세요. 무료로 해드릴게요.”

씽긋 웃는 준후를 보며 희준은 생각했다.

신경외과에 복덩이가 굴러왔다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