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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124화 (123/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124화

제22장 레지던트(4)

신경외과 당직실.

일찌감치 업무를 끝낸 준후는 하염없이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었다.

모니터에는 뇌종양, 뇌혈관 질환 환자들의 각종 판독 영상이 떠올라 있었다.

CT, MRI, MRA, PET 등등.

“누가 보면 고3인 줄 알겠다? 업무 시간 빼고 나머지 시간은 다 공부만 하냐?”

곁에서 업무 중인 동기 경수가 하품하며 준후에게 말을 걸었다.

“공부해야지. 훌륭한 신경외과 의사가 되려면.”

“훌륭한 의사씩이나? 의사도 직업이야. 어차피 돈 벌려고 하는 거 아닌가?”

경수의 말에는 은근한 비아냥이 섞여 있었다.

“맞아. 의사도 직업이지. 돈 벌려고 하는 거지. 하지만 아닌 사람도 있어.”

준후는 담담한 표정으로 대꾸하고 경수를 쳐다보았다.

경수의 외모는 이지적이었다.

우선 얼굴이 가늘고 길었다.

콧대는 높았고 턱은 역삼각형으로 뾰족했다. 착용하고 있는 안경이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말은 많이 못 섞어봤지만.

경수는 지극히 현실적인 타입처럼 보였다.

“난 다른 사람을 위해 개고생하거나 나를 희생하는 건 못 참아. 너처럼.”

“그래 보이더라. 근데 신경외과는 왜 왔어? 네 성격에 신경외과는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

“글쎄. 그건 딱히 말하고 싶지 않네.”

경수가 대답을 회피했다.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아니면 단순히 낯을 가리는 걸까.

그 이유를 준후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뭐야? 영상 판독 공부 중이었어?”

경수가 뒤늦게 준후의 모니터를 확인하고 화제를 돌렸다.

“어.”

“영상의학과에서 다 판독해 주는데 벌써부터 공부할 필요 있나?”

“영상의학과의 판독이 늦을 수도 있고. 때로는 판독을 못 해주는 경우도 있으니까.”

“판독을 못 해주는 경우가 있다고?”

경수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준후는 고개를 끄덕이고 사례를 설명했다.

사례는 뇌종양과 뇌혈관 수술의 항법장치(navigation) 사용이었다.

신경외과는 수술 도중 내비게이션을 사용한다.

내비게이션이란…….

수술 전 찍은 MRI 영상을 띄워놓은 후.

신경외과 집도의가 뇌수술을 진행하면.

그 수술 과정이 기존 촬영에 반영되어 영상에 기록되는 과정을 의미했다.

내비게이션을 사용하면.

수술 도중 MRI나 CT를 촬영하는 번거로움을 덜 수 있었다.

수술 진행 과정이 실시간으로 기존 영상에 나타나고 있으니까 말이다.

“내비게이션 영상은 진단검사의학과에서 판독 못 해. 그건 수술방에 들어간 신경외과의의 몫이니까.”

“벌써 내비게이션까지 생각한다고? 너무 앞서가는 거 아닌가?

“환자나 응급 상황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아. 내가 먼저 대비해야 해.”

“어이쿠, 잘 나셨네~ 잘 나셨어.”

“잘난 게 아니라…… 필사적인 것뿐이야.”

할 말은 많았지만 준후는 말을 아꼈다.

동료들의 죽음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했던 무림에서의 경험.

성호와의 안타까운 이별 등등.

준후의 가슴에는 무수히 많은 상처가 존재했다.

그리고 다시는 상처 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 준후는 필사적으로 의술에 매진했다.

이 간절함과 애절함을 타인에게 설명하는 건 불가능했다.

딸칵.

딸칵.

잡담을 마친 준후는 각종 뇌 영상을 확대해서 보고.

구역별로 쪼개서 보고.

병변에 집중해서 관찰하고.

정상인 영상과 비정상인 영상을 비교하면서 봤다.

마치 무림에서 상대의 초식을 파훼하듯.

지독할 정도로 세심한 관찰력.

이것은 준후가 가진 또 다른 무기였다.

영상 공부를 마친 준후는 곧바로 신경외과 교재를 책상에 펼쳤다.

팟. 팟. 팟.

자신의 전두엽과 측두엽을 검지로 점혈했다.

언어를 다루는 브로카 영역과 베르니케 영역의 뇌신경을 자극했다.

점혈을 하고 책을 보니…….

펼쳐지는 신세계.

단어와 문장들이 물밀듯이 머릿속으로 쏟아졌다.

그것들은 준후의 머릿속에 도장처럼 선명하게 찍혀나갔다.

마치 활자를 인쇄하는 것처럼.

펄럭.

펄럭.

속독법까지 더해서 준후는 게걸스럽게 책을 읽어나갔다.

갈 길은 아직 멀었다.

식물인간과 뇌사 환자마저 회복시키려면 더 많고 더 폭넓은 의학지식이 필요했다.

고되고 험난한 길이었지만.

준후는 완주할 자신이 있었다.

아니, 반드시 완주를 해내야만 했다.

그것이 성호와의 약속이었다.

* * *

“어우. 뜨거워. 에어컨이라도 틀어야겠다.”

당직실에 들어온 민경이 너스레를 떨었다.

교재를 공부하며 학구열에 불타는 준후를 보고 한 농담이었다.

“아. 선배 오셨어요?”

“왔지. 뭐 보고 있어? 신경외과 총론?”

“네. 일단 전체적인 틀을 잡아 놔야 할 것 같아서요.”

“공부하는 건 좋은데. 처음부터 너무 열심히 하다가 번아웃 오는 거 아니야?”

민경이 걱정스레 물었다.

민경이 지켜본 준후는 여러모로 과했다.

처치 및 처방 실력도 과했고.

업무 정확도와 속도도 과했고.

심지어 틈틈이 하는 공부량도 과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민경은 준후가 가끔씩 위태로워 보였다. 폭주하는 기관차를 지켜보는 것 같아서.

“전 괜찮아요. 걱정만 감사히 받을게요.

“그럼 다행이지만…… 근데 준후야.”

“네. 선배.”

“책을 그렇게 보면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니? 잠깐 보고 휘리릭 넘기는 것 같던데.”

민경은 예전부터 의문이었다.

의학 용어가 난무하는 의학서적을 준후가 만화책 보듯 넘겼기 때문이다.

“그럼 퀴즈 내기하실래요?”

“알아서 무덤을 파겠다, 이거지? 좋아. 진 쪽이 오늘 야식 쏘는 걸로 하자. 이 기회에 의국 회비도 좀 아껴야지.”

“좋습니다.”

민경은 준후가 건넨 교재를 받아들었다.

어떤 문제를 내야 잘 냈다고 소문이 날까.

민경은 페이지를 손으로 훑다가 수술 파트에서 멈췄다.

“두개골 성형술 도중 두개골 편이 심하게 오염됐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메타크릴산으로 소독합니다.”

“두개골 성형술 중 가장 흔하게 발생하는 합병증은?”

“서브 듀랄 하이그로마요(경막 하 활액낭종).”

준후가 번개처럼 정답을 맞혔다.

진단·처방 쪽 공부를 많이 했을 거라 생각해서 수술 파트 문제를 냈건만…….

민경의 예상은 철저하게 빗나갔다.

그 후로도 민경은 다섯 개의 질문을 던졌지만 준후는 전부 정답을 맞혔다.

적중률이 명사수 로빈후드를 뺨치는 수준이었다.

“이제 한 문제 남았습니다. 선배.”

“나도 알거든? 지금까지는 연습 문제였으니까 각오 단단히 해.”

민경은 준후 몰래 교재 뒷부분을 펼쳤다.

준후가 공부하지 않은 뒤쪽 부분 말이다.

준후야.

아무리 너라도 공부 안 한 부분을 맞출 수는 없겠지?

후후후.

치사하지만 어쩔 수 없어.

이번 달은 나갈 돈이 너무 많단 말이야.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며.

적당한 합리화를 하면서.

민경은 최후의 문제를 입 밖으로 말했다.

“반측성 안면경련에 원인, 감별질환, 치료법에 대해 말해봐.”

“……”

“왜 대답이 없어? 이제 모르는 게 나왔나 보지?”

“잠깐…… 생각 좀 해보고 있었어요.”

생각이란 걸 할 게 있나?

머릿속에 든 지식이 있어야 생각이라도 하지.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민경은 간신히 참았다.

그런데 왜일까.

당황한 것처럼 보였던 준후가 금방 여유를 되찾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차례대로 대답할게요. 반측성 안면경련에 원인은 7번 신경이 전하소뇌동맥에 압박을 받아서고요.”

“…….”

“감별해야 할 질환은 안면근육파동증과 안검 경련입니다.”

“…….”

“치료법은 미세 혈관 감압술이고요.”

준후의 똑 부러진 대답에 민경은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이게 말이 되냐고요.

공부 범위 밖에 문제를 냈는데.

이걸 어떻게 맞힐 수가 있지?

혹시 투시 능력이라도 가진 거 아니야?

당연히 못 맞힐 거라고 생각했던 문제를 준후가 맞히자 별의별 생각이 다 드는 민경이었다.

허탈하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다양한 감정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근데 선배. 너무 치사한 거 아닙니까?”

준후가 별안간 씨익 웃으며 민경을 쳐다보았다.

말투와 표정이 의미심장했다.

“으응? 뭐가?”

“제가 읽고 있던 부분, 뒤에서 내신 문제잖아요.”

“그걸 어떻게 알았어?”

민경의 두 눈이 부엉이처럼 휘둥그레졌다.

준후는 문제가 출제 범위 바깥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또 어떻게 정답을 맞힐 수 있었을까.

민경은 그것이 알고 싶었다.

“일단 교재부터 주실래요?”

“그래.”

민경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책을 건넸고 준후가 책을 받았다.

“선배 사실은요.”

뜸을 들이며 말하는 준후.

“저 이 교재 세 번째 읽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미 두 번은 완독했다는 거죠.”

“엥? 이 두꺼운 책을 벌써 두 번이나 봤다고?”

민경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준후가 책을 절반 가까이 봤길래.

당연히 처음 보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총론 교재는 워낙 두껍고.

내용이 어려웠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벌써 두 번이나 완독을 했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질문에 척척 대답할 정도니.

대충 본 것도 아니라 정독을 했다는 소리인데 말이다.

“으으. 분하다. 함정에 빠졌어.”

“이제 아셨어요? 저는 원래 지는 싸움은 안 하거든요. 야식은 잘 먹겠습니다.”

“……그래.”

준후의 얄미운 말에 민경은 그저 고개를 숙였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핑계의 여지가 없는 완패였다.

* * *

그 날 저녁 9시, 당직실.

1-2년 차 레지던트들과 인턴들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였다.

동그랗게 모여 앉은 스태프들 중앙에는 먹음직스러운 피자 3판이 놓여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민경 선배.”

“잘 먹겠습니다.”

1년 차와 인턴들이 한마디씩 하고 피자를 먹기 시작했다.

준후도 출출했던 터라 피자 한 조각을 손에 쥐었다.

문득 시식 전 민경을 쳐다보니.

민경의 표정은 시무룩했다.

본인이 퀴즈에서 질 줄은.

본인이 야식을 살 줄은 꿈에도 몰라서 충격받은 모습이었다.

인생의 좋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세요. 선배.

원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는 법이거든요.

준후는 속으로 웃었다.

“준후 선배. 하와이안 피자 좋아하세요?”

곁에 앉은 인턴 은하가 준후에게 물었다.

스태프 중 하와이안 피자를 선택한 건 준후 밖에 없었다.

“어. 적당히 달달해서 좋더라.”

“준후 선배는 단 음식을 좋아 하나 봐요.”

“그런 편이지.”

“음식 취향 한 번 독특하네. 나 같으면 거저 줘도 안 먹을 텐데.”

동기 경수가 대화에 껴들었다.

“파인애플이 피자 맛을 가린다는 생각은 안 하나 봐?”

“네 손에 쥐고 있는 치즈 피자도 마찬가지 아니야? 그럴 거면 차라리 치즈를 따로 먹지.”

“치즈는 피자의 근본이야.”

“근본도 과하면 없느니만 못해. 과유불급 몰라?”

“과한 건 파인애플이지.”

“파인애플은 토핑 중 하나일 뿐인데?”

경수와 치열한 논쟁(?)을 벌이던 준후의 시선이 은하에게 머물렀다.

아직 은하만 피자를 먹고 있지 않았다.

“은하야.”

“네. 선배.”

“넌 무슨 피자를 좋아해?”

준후의 관심을 받은 은하가 좌우로 눈을 굴렸다.

준후가 좋아하는 하와이안 피자냐.

경수가 좋아하는 치즈 피자냐.

선택의 갈림길에 들어선 것이다.

“제가 준후 선배를 존경하고 좋아하지만…… 파인애플 피자는…… 아닌 것 같아요.”

은하의 선택은 결국 치즈 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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