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125화
제22장 레지던트(5)
야식을 먹는 내내, 준후는 고독한 미식가가 됐다.
동료들 중 누구도 하와이안 피자에 손을 대지 않았다.
새콤달콤한 파인애플이 피자의 다소 느끼한 맛을 싹 씻어주는데 이 맛을 모른다고?
아…… 못 보겠다. 너무 끔찍해.
급기야 준후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치츠 피자와 콤비네이션 피자를 먹어 치운 동료들이 하와이안 피자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반가운 마음은 찰나뿐이었다.
동료들은 만행을 저질렀다.
피자에서 파인애플을 떼어내고 먹었던 것이다.
그것은 파인애플에 대한 모독이었다.
“선배. 요새 뉴튜브 영상 왜 이렇게 안 올라와요?”
그러다 불현듯 은하가 준후에게 물었다.
“레지던트 업무에 적응하느라 아직 촬영은 못 했어. 다음 주부터 올릴 것 같은데.”
“…….”
“내 채널 봤니?”
“당연하죠. 병원에서 선배 채널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 저, 엄청 팬이에요. 동영상 다 봤어요. 좋구알 다 했고 댓글도 항상 달아요.”
대답하는 은하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했다.
“고맙다. 재미도 없는 걸 열심히 봐줘서.”
“어차피 선배 얼구…… 아니, 선배의 열정적인 모습이 보기 좋은 거니까요.”
이어서 은하는 다음 촬영 때.
댄스 챌린지 영상을 더 올려달라고 부탁했다.
준후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띠리링~
당직실 전화기가 울렸다.
먼저 배를 채운 준후가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네. 신경외과입니다.”
-…….
“네. 네.”
“응급환자야?”
준후가 통화를 끊자 2년 차 민경이 경계하며 물었다.
신경외과의 약자는 NS(NeuroSurgery)였다.
하지만 신경외과의들은 스스로를 NS(Night surgery)라고도 불렀다.
그만큼 밤에 수술할 일이 많았던 것이다.
교통사고 환자.
외상 환자.
급성 뇌출혈과 급성 뇌경색 환자 등등.
“소아 두부 외상 환자인데 제가 갔다 올게요.”
“오케이. 부탁해.”
준후는 당직실을 떠나 응급실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응급실에서 준후는 5살의 소영을 마주했다.
소영의 곁에는 소영의 어머니로 보이는 보호자가 곁에 서 있었다.
모녀의 외모는 데칼코마니였다.
계란형의 동글동글한 얼굴.
축 처지고 서글서글한 눈매.
이래서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나온 것 같았다.
“소영아, 선생님이 상처부터 볼 게.”
“네.”
준후는 소영의 정수리 인근을 살폈다.
정수리에서 이마 쪽으로 향하는 한 지점에.
1센티미터 길이의 열상(찢어진 상처)가 존재했다.
열상은 그리 넓지도.
그리 깊지도 않았다.
“보호자분, 아이가 어떻게 다쳤을까요?”
“남동생이랑 놀다가 탁자 모서리에 머리를 찧었지, 뭐예요.”
“머리 쿵 했어요. 지금도 아파요.”
소영이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며 한마디 보탰다.
사실 준후는 머리 상처보다 학대 정황을 의심했는데 학대는 없어 보였다.
학대하는 부모와 학대받는 아동.
그 둘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과 얼어붙은 분위기가 있는데.
그게 느껴지지 않았다.
“소영아. 머리는 어떻게 아프니? 두통 같은 건 없고?”
“따끔거리고 화끈해요. 두통은 없어요.”
“선생이 봤을 때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아. 그래도 한 가지 확인만 해보자.”
준후는 열상을 피해 소영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단전에서 끌어올린 내공을 소영의 머리에 불어넣었다.
통배권의 이치로.
내가기공의 이치로.
두개골을 통과한 내공들이 뇌신경과 혈관을 이 잡듯이 수색했다.
그 결과…….
소영의 머리 내부는 멀쩡했다.
두피만 살짝 찢어진 상태였다.
모처럼 두 개 엑스레이 검사와 내공 혈관 조영술의 결과가 일치했다.
응급 수술은 필요 없었다.
마지막까지 쥐던 긴장의 끈이 풀리면서.
준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겠습니다. 찢어진 부분만 살짝 꿰매면 되겠네요.”
“아.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준후의 설명에 보호자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치료가 손쉽게 끝나는 듯했으나 의외의 변수가 등장했다.
준후가 봉합하기 전.
부분 마취를 위해 주사기를 들었을 때.
“으아아아앙!”
소영이 별안간 울음을 터뜨렸다.
응급실이 떠나갈 듯 떠들썩해졌다.
아무래도 주사기가 무서웠던 모양이었다.
보호자가 좋게좋게 달래도 소영은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난감한 건 준후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소영이 착하지? 엄마가 병원 나가면 소영이 좋아하는 과자 사줄게.
“시러어어어!”
“여기 소영이랑 엄마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시끄럽게 하면 안 돼. 울음 뚝!”
“뚝도 시러어어!”
“소영아. 선생님 말 좀 들어볼래?”
잠자코 있던 준후가 나섰다.
“선생님도 시러어어.”
“이제 선생님 손에 주사기 없는데?”
“정말요?”
준후가 드레싱 카트에 주사기를 내려놓자.
소영이 서서히 울음을 그쳤다.
준후를 경계하는 눈빛만큼은 여전했지만.
“선생님이 소영이 안 무섭게 머리 꿰매줄게. 약속.”
“진짜 약속해요?”
“그럼. 선생님 거짓말쟁이 아니야.”
“그럼 약속.”
소영이가 먼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고 준후는 소영이와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선생님. 뒷감당은 어쩌시려고 그래요?”
준후 곁을 지키고 있던 간호사 남혜가 속삭이듯 말했다.
걱정이 한가득인 목소리였다.
“부분 마취 해야 하잖아요. 거기다가 봉합침도 뾰족해서 무서워할 텐데. 그냥 강제로 밀어붙이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뇨. 마침 좋은 방법이 떠올랐어요. 저만 믿고 봉합용 본드만 챙겨주세요.”
“본드는…… 왜…….”
“직접 보는 게 빠를 겁니다.”
준후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아이가 울더라도 강제로 봉합을 하는 게 일반적인 선택이긴 했다.
하지만 준후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이가 주사기나 처치 도구.
나아가서는 병원에 트라우마를 얻는 게 싫어서였다.
살면서 행복한 기억만 가질 수는 없겠지만.
기왕이면 불행한 기억은 피하는 게 좋을 것이다.
다행히도 준후는 현 상황을 타파할 의료지식을 떠올리는 데 성공했다.
“자. 선생님 손에 아직 아무것도 없지?”
“네.”
“지금부터 상처 꿰매줄게.”
팟! 팟! 팟!
준후는 소영의 찢어진 상처 인근을 검지로 점혈했다.
진통 점혈이었다.
상처는 소영의 어머니가 이미 소독을 한 상태라 추가 소독은 필요 없었다.
그래서 곧바로 봉합에 들어갔다.
준후는 찢어진 상처 양옆에 있는 머리카락으로 매듭을 지었다.
머리카락을 봉합사로 삼은 것이다.
머리카락을 팽팽하게 당겨서 장력을 발생시키고.
좌우 머리카락을 꼬아서 매듭을 만들면 봉합 완료.
이것은 머리카락 꼼이라는 봉합술이었다.
머리카락 길이가 3센티미터 이상이고 상처가 깊지 않을 때 쓸 수 있는 봉합술이었다.
흉터가 남지 않으며.
소독을 자주 할 필요 없는 전천후 봉합술이었다.
“와, 대박. 선생님. 머리카락으로 봉합하시는 거예요?”
의료용 본드를 가지고 돌아온 남혜가 준후를 보며 감탄했다.
“네. 이러면 소영이가 겁먹을 필요가 없으니까요.”
“다른 선생님은 이런 거 안 하시던데.”
“아무래도 익숙하지가 않으니까요.”
경험 많은 척했지만.
사실 준후도 머리카락 꼼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다만 머리카락 꼼을 떠올렸을 때.
어려움 없이 소화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어서 펼쳤던 것뿐이었다.
손으로 하는 처치는 다 자신이 있는 준후였다.
머리카락 봉합은 3분 만에 끝났다.
똑! 똑! 똑!
의료용 본드가 매듭 위로 떨어져 내렸다.
본드가 굳으며 매듭이 단단해졌다.
“소영아, 선생님 약속 지켰지? 거짓말쟁이 아니지?”
“네. 선생님 최고!”
소영이 밝게 웃었고 보호자도 그제야 미소를 띠었다.
베드 분위기는 금방 화기애애해졌다.
“소영이, 앞으로 3일 정도는 머리를 못 감습니다. 감염 우려 때문에요.”
“아, 네. 명심할게요.”
“그리고 소독은 집에서 해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네. 선생님.”
“그런 의미에서 소영이한테 서비스를 해줘도 될까요?”
“서비스라면…….”
“긴 머리를 감지 못하면 떡 져 보일 수 있잖아요. 제가 예쁘게 따드리겠습니다.”
보호자의 허락을 받고.
준후는 소영의 등 뒤에 자리를 잡았다.
“아영아, 선생님이 공주님 머리해 줄게.”
“진짜요? 그럼 이런 머리 돼요? 엄마. 선생님한테 엘시 보여주세요. 엄마는 이런 머리 못 해준데요.”
“녀석도 참. 죄송해요, 선생님. 괜히 번거롭게 해드려서.”
보호자가 허탈하게 웃으며 준후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휴대폰에는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떠올라 있었다.
에메랄드빛 드레스를 입은 여왕 캐릭터였는데 땋은 머리가 꽈배기 같았다.
“선생님, 엘시 머리 돼요?”
“물론이지.”
준후는 캐릭터의 머리카락 형태를 기억했다.
휘리리릭.
아영의 머리카락을 야무지게 땋아나갔다.
머리를 땋는데 걸린 시간은 5분.
캐릭터의 화려한 머리 형태를 생각하면 엄청 빠른 속도였다.
거울로 확인한 머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아영이 방방 뛰었다.
“엄마. 나 병원 좋아. 다음에 또 올래!”
그런 아영을 지켜보며 준후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의사라서 행복한 순간이었다.
* * *
응급실 진료를 마치고 준후는 당직실로 복귀했다.
피자 냄새가 진동하긴 했지만.
당직실은 깔끔하게 정리된 상태였다.
스태프들은 대부분 자리를 비웠고.
경수만 자리를 지킨 채 업무를 보고 있었다.
“넌 당직도 아닌데 왜 여기 있냐?”
“공부하려고.”
“공부하는 건 좋은데 퍼지지는 마라. 나만 곤란해지니까.”
경수의 말투는 냉정했다.
준후를 동기라고 생각하는 배려는 손톱만큼도 담기지 않았다.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른데 꼭 그렇게 말을 해야겠니?”
준후가 혀를 차며 물었다.
“그래서 내 말이 틀렸어? 너 퍼지면 내가 고생하는 건 팩트인데?”
“퍼진다면 내가 아니라 너일 거라는 것도 팩트지.”
“난 너처럼 오지랖 안 떨어. 쓸데없는 힘을 안 쓰니까.”
“너, 오지랖의 개념을 모르네. 공부하고 환자와 보호자를 돌보는 건 오지랖이 아니라 의사의 책임이지.”
드르르륵.
때마침 은하가 당직실로 들어왔다.
어쩐 일인지 은하의 표정이 시무룩했다.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채 경수 앞에 섰다.
어쩐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박은하.”
경수가 나지막하게 은하의 이름을 불렀다.
“네. 선배.”
“처치, 그딴 식으로 할 거야? 환자가 무슨 장난감인 줄 알아? 아니면 생체 실험 대상인 줄 알아?”
“아니요.”
“네가 아작 낸 환자 혈관만 네 개다. 결국 네 똥 치운 건 나였고.”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죄송할 짓을 왜 하냐고. 자소서 좀 가져와 봐라. 취미에 민폐 끼치기라고 적혀 있는지 확인 좀 하게.”
경수는 신랄하게 은하를 깠다.
한편.
준후는 이야기를 가만히 들으며 둘 사이에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차렸다.
은하가 ABGA 채혈에 네 차례 실패했고.
경수가 그 부분을 따끔하게 지적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대화를 듣다 보니 속이 영 거북했다.
경수의 화법 때문이었다.
이 정도면 폭언이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은하의 자존심을 잔인하게 짓밟고 있었다.
“박은하.”
“네. 선배.”
“똥 싸고 나니까 아주 시원하지? 세상 날아갈 것 같지.”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ABGA도 못하는 널 어디다 써먹어야 할지 고민이다. 진짜.”
“…….”
“별명이 다람쥐라고 하던데. 저기 야산에서 도토리라도 캐올래? 그걸로 묵이나 좀 쒀 봐.”
“아닙니다. 다음부터 잘하겠습니다.”
대답하는 은하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모욕감을 느끼는지 희미하게 몸이 떨렸다.
이쯤 되면 준후도 한마디 껴들지 않을 수 없었다.
“윤경수, 적당히 해라. 나 폭발하는 꼴 보기 싫으면.”